6. Guard
#14
지한은 만 18세가 될 때까지 한 보육원에서 자랐다. 그 보육원은 그가 오기 이전에도, 그가 퇴소한 이후에도 줄곧 같은 자리에 있었다. 따라서 보육원생들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든 학업 또한 그 동네에서 마쳤다. 말인즉슨 그의 출신을 모르는 동급생은 없었다.
애들은 무서웠다. 어른들도 무섭지만 애들이 더 무서웠다. 순진해서가 아니었다. 뭣 몰라서도 아니었다. 미성년자라서 무서웠다. 무슨 짓을 해도, 상상 이상의 사고를 내도 어른보단 애가 유리했다. 그 점을 알고 있는 것까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너무 잘 알다 못해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 순간 애들은 어른들보다 무서워졌다.
「너 이시우 없인 잠도 못 잔다며?」
지한을 둘러싼 소문들이야 항상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지만 개중에서도 제일 좆같은 소문은 시우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소문이 많아질수록 지한과 함께 더 많은 곤욕을 치러야 하는 건 시우였다. 지한의 불면증을 알 수 있는 사람은 그와 한 건물 안에서 잠드는 보육원 애들밖에 없었다. 범인은 피를 나누지 않은 형제들 가운데 있었다.
「왜, 그 새끼가 니 엄마 대신 자장가라도 불러주냐?」
지한이 범인을 색출하려 들 때마다 시우는 말렸다. 자신들이 의심받는다는 사실을 보육원 애들이 알게 되면 그 후폭풍은 기분 나빠하는 수준을 훨씬 넘을 것이라고 했다.
틀릴 거 없는 말이었다. 실은 맞기만 한 말이었다. 그래서 지한은 보육원생이어야만 알 수 있는 내용과 거짓말이 혼합된 소문을 들먹이는 놈들을 몇 번이고 무시했다. 같은 처지에 놓인 보육원 애들마저 적으로 돌리게 되면 그땐 정말 아무것도 없게 됐다. 그게 싫어서 시우의 말을 들었다.
「아, 맞다. 이 새끼들 그렇고 그런 사이라 그랬지. 미안, 미안. 내가 말을 잘못했다. 엄마가 아니지 그러면.」
아빠가 공무원이라고 했는지, 아니면 돈 좀 벌어들이는 사업체의 주인이라고 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놈에게 멀쩡히 살아 숨 쉬는 부모가 있었다는 것만 똑똑하게 기억났다. 그 나이 또래 애들은 엄마라는 단어를 만능 무기처럼 아무 데나 끼워 넣었다.
「그럼 너희 둘이 그것도 하냐? 고아원은 한방에서 여럿이 자지 않아? 어떻게 해?」
하지만 그놈은 아니었다. 옆 동네 초등학교를 나왔다는 그 새끼의 친구들은 지한과 같은 초등학교 출신들이었다. 심지어 두어 명은 같은 반이었던 적도 있었다. 지한이 어디에 사는지 모르는 놈들은 하나도 없었다. 그 빌어먹을 새끼는 지한이 고아임을 알고서 의도적으로 엄마란 단어를 사용한 것이었다.
「근데 너희 둘이 하면 누가 여자야? 설마 너는 아니지?」
죽여야 해.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강한 욕구가 지한의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저 새끼를 지금 당장 죽이자. 지한은 친구 놈 하나가 선물이랍시고 주머니에 쑤셔 박아놓고 간 라이터를 꺼냈다.
처음엔 라이터를 손안에 쥐고 있으면 가격할 때의 힘이 더 강해진단 소리를 떠올리고 꺼낸 것이었으나 상황 파악을 못 하고 깐죽거리는 면상과 마주하자 마음이 바뀌었다.
지한은 그때도 키가 컸다. 상대의 이마를 라이터로 찍어 내리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기습 공격에 주춤거리는 틈을 타 발로 배를 차 넘어뜨렸다. 그리고 올라타 되는 대로 주먹을 내질렀다.
언제 손안에 들려있던 라이터가 저 멀리 날아갔고 교실 안에 있던 애들이 몰려나와 구경하기 시작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가 알 수 있었던 것은 그저 물리적 폭력이 빠른 결과를 보여주는 수단이란 점이었다. 그 씹새끼는 딱 한 대만에 조용해졌고 두 대째에 쓰러져서 세 대부터 빌기 시작했다. 그 성취감은 깨달음에 가까웠다. 이거구나. 아프게 하면 닥치는구나.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모를 피가 어린 피부를 타고 흘러 복도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피는 수십 수백 명의 발이 털어내고 간 먼지와 대비되어 더욱 진득해 보였다.
소란을 듣고 나타난 담임이 아연실색해 비명을 질렀다. 맞은 놈을 걱정하는 것인지, 제 반인 지한을 걱정하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이 모든 일에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할 스스로를 위한 것인지 모를 담임의 비명이 지한을 일깨웠다.
지한의 밑에 깔린 놈은 거의 정신을 잃은 상태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늦어도 너무 늦게 돌아온 현실감이 지한을 때렸다. 이제 어떡하지, 나는 돈도 없고 부모도 없는데…….
「날 믿으라고 했잖아.」
새로운, 하지만 낯설지는 않은 목소리였다. 지한은 고개를 들었다. 비명을 지르던 담임은 어디로 가고, 웬 여자가 덜 자란 중학생들을 비집고 나왔다.
「나는 실패하지 않는다니까.」
잡으라는 듯이 내민 손이 하얬다.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에서는 붉은 기가 돌았다. 낯설지 않은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독특한 향이 났다. 꽃처럼 화사하지도, 과일처럼 싱그럽지도 않은 그 향에선 어떤 무게감이 느껴졌다. 소현이었다.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도 지한은 의문을 품었다. 믿어 보라니까 믿어 보겠지만, 하고많은 사람 중 왜 나한테 손을 내밀어주는 거야? 곧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속으로만 생각한 그 의문을 듣기라도 한 듯 소현이 대답했던 것이다.
「그 새끼한테 보여주려고.」
그 새끼?
“우지한!”
눈을 뜨고도 한참, 일 초인지 일 분인지 모르겠으나 느끼기엔 아주 오래도록, 지한은 자신이 있는 장소를 인지하지 못했다. 직사각형 모양의 천장 중앙에 달린 전등이 너무 밝았다. 눈을 도로 감고 싶게 만들어지는 밝기였다.
“깼어? 나 봐. 정신 차려.”
불빛 말곤 아무것도 없던 시야에 작은 얼굴이 끼어들었다. 빛이 가려지자 눈이 한결 편해졌다. 시우가 걱정스레 물었다.
“너 왜 이래. 어디 아파?”
지한은 눈을 세게 감았다 떴다. 꿈이었다. 그날의 일이 꿈으로 재현되는 것 자체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언제부터였다고 딱 잘라 말할 필요가 없을 만큼 꾸준히, 지한은 그날을 꿈에서 만났다. 처음으로 남의 얼굴에 손을 댄 날. 상대를 닥치게 하고 싶을 땐 주먹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란 것을 배운 날.
“……지금 몇 시야. 너 왜 안 자고.”
“너 때문에 깬 거 아니야. 아직 세 시밖에 안 됐어.”
상체를 일으켜 앉은 지한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우와 눈을 맞췄다. 지한을 안쓰러워하는 빛이 가득 담긴 눈이었다. 또 그날 꿈을 꿨을 뿐이라고 말해주면 시우도 안심할 것이다. 수없이 반복해 꿔온 꿈 중 하나에 불과했다. 난데없이 등장한 소현을 제외한다면.
“안 좋은 꿈 꿨어?”
지한은 마른 침을 삼켰다. 선뜻 그래, 라고 답하기가 뭐했다. 한때 지한보다 더 지한을 잘 아는 사람이었던 시우는 이제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딱히 한쪽의 잘못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곧잘 지한에게 너 정도 얼굴이면 가만히 서있어도 기획사에서 데려갈 거란 식의 말을 했다. 하지만 세상엔 다양하게 잘난 놈들이 많았다.
지한만큼 생기진 못해도 돈과 인맥을 다 갖춘 부모 밑에서 태어난 놈이 있는가 하면, 지한만큼 생긴 데다가 자식이 필요하다면 동냥을 해서라도 돈을 마련해줄 부모가 있는 놈이 있었다. 그보다 조금 못났든, 더 잘났든 어지간해선 다들 부모가 있었다. 양쪽이 없으면 한쪽이라도, 그마저 없을 땐 형제라도.
그래서 지한도 하나 구했던 것이다.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연인도 아니지만 그것들을 다 합친 것보다 훨씬 더 잘난 뒷배.
“아니.”
애초에 소현의 손을 잡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단 덜 좆같은 기분이었을지, 지한은 잘 몰랐다. 다만 그녀와 엮이지 않았다면 적어도 시우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지 못해 화병에 걸리는 경험은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이제 와서 하기엔 우스운 후회였다. 소현은 손을 내밀었을 뿐, 지한이 반드시 그 손을 잡아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았다.
손을 잡은 것은 지한의 의지였다.
“땀을 너무 많이 흘리는데. 열나는 거 아냐?”
“아니라니까.”
아니라고 몇 번을 우겨본들 시우는 설득당하지 않았다. 지한은 체온계를 가져오겠다며 기어이 일어서는 시우에게 여러 갈래의 감정을 느꼈다. 제발 사라졌으면 좋겠다가도, 조금만 더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다.
“그냥 좀.”
패대기치고 싶다가도, 안겨들고 싶다.
“가만히 있어.”
몸을 돌리려다 만 시우가 지한을 내려다보았다. 곧 작은 손이 지한의 이마에 와 닿았다. 생긴 것과 달리 차가운 온도를 지닌 손바닥이 열을 식혔다.
“나 여기서 잘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윽박지르려다가도, 오늘만 그래 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지한은 가만히 있었다. 어느 쪽도 택하지 않은 채.
20년이란 시간은 그들로 하여금 말없이도 서로가 원하는 바를, 서로에게 필요한 바를 알아차릴 수 있게 허락했다. 지한이 필요로 하는 바를 알아들은 시우는 문 쪽으로 걸어가 불을 껐다. 블라인드나 커튼이 달리지 않은 민낯의 창가로 빛이 듬뿍 들어왔다.
불을 끄고 돌아온 시우가 망설임 없이 침대 위로 올라왔다. 성인 둘이 편히 눕기엔 좁은 침대였다. 최대한 벽으로 붙은 지한은 등을 돌려 누웠다. 낡은 벽지가 초라한 행색으로 그를 맞이했다.
시우의 팔이 지한의 옆구리로 올라오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허리를 감았다. 원래대로라면 지한을 곤히 잠들게 만들어줬을 그 동작은 거꾸로 그에게서 모든 잠기운을 앗아갔다. 그는 한숨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입 안을 깨물었다.
밤이 길었다.
#15
시선은 아파트 단지 입구에 고정한 채로 손만 움직여 테이크아웃 잔을 든 이안은 그대로 그것을 입에 갖다 대려다 말고 멈칫했다. 잔이 너무 가벼웠다. 뚜껑을 여니 잔 안에 보이는 것은 갈색으로 물든 종이바닥이 다였다. 평소 커피를 물처럼 마시는 스타일은 아니었는데 하는 일 없이 한 자리만 지키고 있으려니 300미리쯤은 순식간에 바닥났다.
이제 곧 화장실에 가고 싶어질 것이다. 가만, 화장실? 그제야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이안은 핸들에 머리를 박았다. 그의 임무는 지한을 미행하는 것이었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았다간 놓치기 십상이었다. 근처에서 화장실을 찾으려면 못해도 5분은 소요될 것인데 그 사이에 지한이 외출이라도 했다간 지금까지 기다린 몇 시간이 말짱 도루묵이었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오후가 다 되어서야 집을 나서기는 했지만, 오늘 이안은 경기도의 한 아파트 근처로 출근했다. 지한이 특정 호텔로 가거든 도경에게 즉시 알린다. 그것이 이안에게 주어진 과제의 내용이었다. 언뜻 들었을 땐 어려울 것 없는 과제였다.
팔자에도 없는 스토커 역할을 맡게 된 데엔 그럴듯한 사유가 있었다. 며칠 잠잠하던 도경이 불쑥 연락을 해온 것은 어젯밤의 일이었다. 도경은 심부름센터가 실시간 보고도 해주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안 될 거야 없었다. 돈만 주면 살인 빼고는 다 해줄 인간들이니 늘 하는 미행에 실시간 보고만 더하는 일쯤이야 흔쾌히 수락할 것이었다.
문제는 지정된 대상을 따라다니며 실시간으로 의뢰인에게 보고하기 위해서는 연락처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도경에게 지한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알려주려면 무조건 전화번호가 필요했다. 선불 휴대폰을 사용하는 방법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그것 또한 쓰는 동안에는 실체가 있는, 따라서 언제 증거품으로 둔갑할지 모르는 물건이었다.
그래서였다. 그냥 그러지 말고 나한테 시켜, 라는 패기만 있고 생각은 없는 발언을 해버린 것은. 말을 뱉자마자 너무 갔나 싶긴 했고, 아무리 도경이라도 그런 일을 이안에게 시키지는 않을 것이라고 앞서간 자기 위안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조용하던 도경이 갑자기 묻기를,
―안 들킬 자신 있어?
라고 하지 않겠는가. 거기 걸려드는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언제나 그래왔듯 뻔히 알면서도 걸려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전화는 끊어져 있었고 이안은 심부름센터 대신 지한의 뒤를 밟기로 약속한 뒤였다.
아무리 도경을 위해서라지만 누군가의 뒤를 쫓는 짓은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범법이라서가 아니었다. 차 안에 앉아서 계속 바깥을 기웃대는 일은 일단 영 본새가 나지 않는 데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그보다 더 창피한 일은 찾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 끝난 이야기였다. 이성이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입술과 혀가 알아서 벌어지고 움직여 생긴 일이니 따질 대상도 없었다. 대체 왜 도경의 앞에서만 그러는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조금 더 정직해지자면 대학에서 첫 PPT 발표를 할 때도 그랬고 생애 첫 섹스를 할 때도 그렇긴 했다만 어쨌든, 몇몇 특수한 케이스들 말곤 도경의 앞에서만 나오는 병적 습관이었다.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무조건 알겠다고, 좋다고 해버렸다. 왜냐고? 그야……
도경이니까.
“어.”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오는 인영이 익숙했다. 선글라스를 벗고 제대로 다시 봤다. 틀림없었다. 한겨울에 춥지도 않은지 짧은 재킷을 입은 남자는 지한이었다. 길을 건너지 않고 서성이던 그는 곧 택시를 잡아탔다. 자칫하면 놓칠 수도 있었다. 이안은 급히 선글라스를 조수석에 집어 던지곤 기어를 바꾸었다.
수상해 보이지 않으려 택시와 적당한 간격을 두고 달리던 자유로에서만 해도 시작한 첫날 원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치 않았다. 강변북로의 정체 속에서 지한이 탄 택시 바로 뒤에 붙었을 때까지도 이안의 상태는 비교적 태평했다. 그러다 택시를 따라 반포대교로 빠진 직후 마침내 그의 머릿속에 알람이 울렸다. 아무래도 택시가 호텔로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택시가 차선을 바꿨다. 이안도 핸들을 틀며 디스플레이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퇴근 시간은 지나 있었으나 도경은 툭하면 야근하는 워커홀릭이었다. 월요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본 통화 연결음이 한참을 이어졌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다고 말하는 친절한 목소리가 이미 들려오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 때쯤이었다. 도경이 전화를 받았다.
“형, 난데! 끊지 마! 중요한 얘기야.”
허락을 기다릴 시간까지는 없었다. 이안은 되는 대로 말을 이어갔다.
“얘, 우지한 있잖아, 지금 거기로 가는 것 같아 그, 그 무영이 형네 호텔. 근데 아직 다 온 건 아니니까 좀만 기다려봐. 지금 중요한 일하고 있었던 거 아니지?”
택시가 정확히 그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이안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오! 임무를 맡은 첫날 바로 성과를 냈다는 기쁨에서 우러난 환호였다. 그때까지 한마디도 않고 있던 도경이 조용히 말했다.
―소리 지르지 마.
칭찬은 못 해줄망정 쌀쌀맞게 쏘아붙이기나 했다. 도경은 참 싸가지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나게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으려던 이안은 택시에서 내리는 지한을 보고 급히 핸들을 왼쪽으로 틀었다. 호텔 입구까지 따라 들어오려던 건 아니었는데 도경과의 통화에 정신이 팔려 실수를 저질렀다. 주차장 출구 쪽으로 가려는 이안의 차를 보고 놀란 도어맨이 뛰어왔다. 이안은 브레이크를 밟았다.
―뭐야. 여보세요?
통화가 아직 연결된 상태였다. 더 고민할 것도 없이 이안은 종료 버튼을 눌렀다. 도경에게 상황을 들켰다간 때려치우라는 소릴 들을 게 뻔했다.
한숨 돌린 이안은 호텔 입구부터 살폈다. 지한은 이미 안으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도어맨이 창을 두드리든 말든 간에 기분 하나만큼은 상쾌했다. 도경에게 도움이 됐다. 그거면 한 일주일은 보람찬 기분으로 보낼 수 있었다.
#16
지한은 눈을 한 번 깜박였다. 푸르스름한 조명이 낮게 깔린 실내. 다시 눈을 감았다 떠보았다. 가죽 소파.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눈꺼풀을 내렸다 올렸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남자.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대며 팔을 올리느라 드러난 손목이 하얬다.
현실이었다.
“아닙니다. 그건 괜찮은데 제가 지금 집이 아니라서. 주요 수정 사항만 메시지로 보내주세요.”
다른 말로는 대체가 불가능했다. 홀렸다고밖엔 할 수 없는 그런 경험이었다. 그 지랄 맞게 기분 나쁜 악몽이 발단이었다. 죽은 사람이 꿈에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꺼림칙한데 꿈에서 소현이 한 말은 더 의미심장했다.
그 새끼 보여주려고.
이전에도 소현이 나오는 꿈을 꾼 적은 있었다. 그러나 이번만큼 의식에 오래 남은 적은 없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소현이 지한에게 준 단역을 빼앗아간 인물은 계획적이었다. 동시에 음침했다. 자신의 정체는 감추되 지한이 역할을 빼앗긴 이유는 일부러 흘렸다. 철저히 감추고 싶은 정보였다면 지한의 귀에까지 들어왔을 리가 없다. 들으라고 흘린 정보였다.
아무도 지한에게 그 사람의 성별이 남자라고 알려주지 않았다. 잘하는 거라곤 몸 쓰는 게 다인 지한이라지만 그 정도 추측은 가능했다. 단번에 지한의 역할을 빼앗아감으로써 협박성 경고를 보내는 데에 성공한 그 인물은 99프로의 확률로 남자였다.
그 언젠가의 호텔 방에서 술에 그다지 취하지도 않은 소현이 똑똑한 발음으로 어딘가를 찢어버려야 한다며 저주했던 대상은 분명 새끼지 년이 아니었다. 지한은 소현의 그 새끼를 알아내야만 했다.
“네, 맞아요. 원천세 포함. 영문 계약서 어차피 방송국에서 또 검수하니까 더 안 보셔도 돼요.”
도경이 지한의 눈앞에 나타난 타이밍은 우연치고 너무 절묘해 극적일 정도였다. 시우를 기다리던 호텔 옆 편의점에서 마주쳤던 밤은 그렇다 치기로 했다. 호텔도, 그 안의 바도 워낙 유명한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두 번째 마주침까지 똑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런 것도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지.
끊어질 듯 말 듯 계속 이어지던 통화가 끝났다. 도경이 테이블 위에 휴대폰을 뒤집어 올려놓았다.
“죄송합니다. 안 받으면 계속해서요.”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정작 입 밖으로 나간 것은 아, 하는, 뭣도 아닌 소리였다. 성의 없어 보였을 반응에도 별 내색하지 않은 도경이 지한의 앞에 놓인 글라스를 보며 물었다.
“맛은 괜찮으신가요?”
도경의 통화가 끝난 시점부터 두 배로 경직되어 있던 몸이 힘을 탁 풀었다. 도경은 지한에게 술맛을 묻고 있었다. 맛있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지한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각각 이름 모를 술이 담긴 잔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아있는 이 자리가 새삼 이상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잘.”
타고나길 부족한 차분함을 억지로라도 쥐어 짜낼 필요가 있었다. 호텔까지 온 것은 지한의 자의였다. 바 안에서 마주치면 아는 체를 하라던 그, 누구든 가볍게 할 수 있는 말이 잊히지 않았다.
별장에서부터 줄곧 지한에게 호의적으로 대해준 도경이라면 소현의 그 새끼를 알아내는 데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단 희망 한 가닥을 가지고 왔던 지한은 호텔에 들어가기 직전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도움이 된다니 누가, 도경이? 지한에게? 그런 순진한 믿음을 유지하기엔 지한이 없어도 너무 없이 살아왔다. 아무리 태도가 다르다 해도 도경 또한 별장에 모여있던 소현의 친구 중 하나였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부류일 터였다.
호텔 입구에서 돌아 나온 지한은 도경과 마주치기 전 이성이 돌아온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항상 오토바이를 주차하곤 하는 편의점 앞에서 담배를 피웠다. 강풍으로 인해 불씨가 너무 빨리 타들어 간 탓에 새 담배를 하나 더 꺼냈을 때 누군가가 뒤에서 어깨를 두드려 뒤를 돌았고, 그랬더니 도경이 서있었고, 그러고 나서.
“모르겠는데.”
다시 이성을 되찾았을 땐 호텔이 아닌 근처 빌딩 지하의, 약간 덥게까지 느껴지는 난방 시스템을 갖춘 술집 안이었다. 맞은편에는 도경이 앉아 있었다. 지한은 뭔가에 단단히 홀린 사람의 기분이 되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와서 술맛 평가를 하고 있는 거지? 또 홀린 건가?
“네?”
그런데 홀리다니 누가. 지한은 멍하니 도경을 쳐다보았다. 홀려? 내가? 저 남자한테?
“무슨 맛인지…… 잘.”
지한은 입을 다물었다. 방금 자신이 뭐라고 했는지 확신이 가지 않았다. 다른 생각에 정신이 팔린 채로 입술만 움직이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다, 그렇게 말한 것 같다가도 또 아닌 것 같았다.
지한이 입술만 달싹거리고 있자 도경도 더는 채근하지 않았다. 살며시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웃는 모습에선 기꺼이 시간을 더 주겠다는 선심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저 인간 때문이야.
지한은 다시 흐릿해지려는 이성을 다잡았다. 그가 자꾸 있지도 않은 귀신에 홀린 것처럼 정신이 없어지는 데엔 분명 도경의 탓이 있었다. 마주치면 술을 사겠다는 말, 아무나 하고 다닐 수 있는 말이지만 상황에 따라선 얼마든지 다음 만남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여지를 흘리는 말로 해석될 수 있었다.
소현과 긴 역사를 공유한 이의 도움이 필요한 지한에게는 자꾸만 그 말이 후자로 들렸다. 도경이 정말 지한을 다시 보고 싶어서 일부러 그렇게 말하고 사라졌던 것이란 생각이 사라지질 않았다.
“아니, 그게 아니고. 괜찮아요. 맛.”
무엇 때문에 도경이 지한을 다시 보고 싶어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들기는 했다. 하지만 그보단 지한의 사정이 더 급했다.
설령 도경이 지한을 희귀동물 취급해 호기심을 가지는 것이라 해도 괜찮았다. 속으로 지한을 뭔 취급하든 말든, 적어도 도경은 별장에서 마주친 다른 사람들처럼 지한에게 다 들리게 수군거리지 않았다. 예의 바르게 인사도 건넸다. 그런 사람에게 나쁜 의도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뚝뚝 끊어져 나간 지한의 대답에 도경이 뭐라 말하려다 말고 갑자기 손등을 입술에 댔다. 그러고는 웃었다. 사실 소리가 하나도 나지 않아 웃는 건지 뭔지 알기도 힘들었다. 확연히 접히는 눈매를 보고서야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웃는 소리 하나마저 함부로 내지 않는 남자였다.
“죄송해요. 웃겨서 그런 게 아니라.”
입가에서 떼어낸 손을 테이블 위에 얌전히 내려놓은 뒤, 도경이 말했다. 말은 죄송하다면서 목소리엔 옅은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지한은 침침한 조명 아래에서도 하얗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도경의 손등에서 소현을 떠올렸다.
소현은 보기만 해도 경외심이 절로 생기는 결과 색의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도경도 딱 그랬다. 반질반질하고 매끈해 보였다. 소현의 피부는 실제 촉감도 보기만큼이나 굉장했었다. 도경의 피부는 어떤 감촉으로 손끝에 닿아올지, 아주 잠시 알고 싶어졌다.
지한은 시선을 들었다. 눈 맞춰주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도경이 바로 말했다.
“잠깐 되게 어린애 같아 보였어요. 그래서 웃은 거니까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어린애. 순한 인상과 둥글둥글한 말씨를 가진 시우가 자주 듣는 말이었다. 지한은 별로 어려 보이는 타입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성숙해 보인단 말만 들었다. 그런데 도경은 지한이 어린애 같아 보여서 웃었다고 한다. 비꼬는 걸까.
“제 와인이 그래도 지한 씨 것보다는 조금 덜 떫을 텐데.”
비꼰다고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지한은 늘 그런 식으로 상대방의 속을 넘겨짚어 주먹을 날렸고, 그러면 경찰이 왔고, 경찰서에 가선 부모며 형제가 달려와 주는 상대편과 다르게 혼자 서있는 자신을 초라히 여겨야 했다.
시우는 언제나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끝자락이 되어서야 나타났다. 엉망이 된 머리를 정리하지도 못하고 허리를 숙이는 시우를 볼 때마다 지한은 경찰서를 폭발시키는 상상을 하곤 했었다. 누군 살려두고 누군 죽이고, 그런 것 없이 그냥 다 같이 터져버리게.
“드셔 보실래요?”
도경이 지한 쪽으로 와인글라스를 살짝 밀었다. 손이 앞으로 나오면서 도경의 상체도 함께 테이블 쪽으로 기울었다. 조명이 비추는 영역에서 비껴있던 얼굴이 빛 아래로 들어왔다.
이해하기 힘들게도 지한은 자연광이 내리쬐던 테라스 위에서보다 빛이 최소화된 실내에서 훨씬 더 도경의 생김새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도경은 이목구비까지도 소현과 닮은 면이 있었다. 그리 생긴 눈을 칭하는 표현이 따로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치켜뜬 것처럼 보이는 눈.
“지한 씨?”
지한은 숨을 들이마셨다. 의도치 않게 큰 소리가 났다. 이번에도 웃었다면 정말로 비웃음을 사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도경은 웃지 않았다.
“그렇게 부르지 말까요?”
“……예?”
“부를 때마다 대답을 안 하시잖아요. 저번에 편의점 앞에서도 그렇고요. 싫어서 그러시는 거면 안 부르려고요.”
어이가 없었다. 상대의 대꾸가 느리다고 해서 곧바로 싫어서 그러는 거면 그만하겠단 직구를 던지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런, 직설적인 건지 공격적인 건지 모를 내용을 읊는 말투는 또 한없이 예의가 발랐다. 지한은 엉킨 머릿속을 다 풀지 못한 채 대답했다.
“그렇게 불러도 돼요.”
지한 쪽으로 밀어놓은 글라스에서 손을 거두어간 도경이 싱긋거렸다. 갸름한 얼굴 어디에서도 불쾌해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한은 자신의 잔을 치우고 도경의 잔을 앞으로 끌어왔다. 유리잔 입구가 깨끗했다. 이제 막 수건으로 닦아 나온 새것처럼.
“근데 지한 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스물다섯.”
“와. 좋겠다.”
“뭐가요?”
“어려서.”
어리다는 이유로 남을 부러워하기엔 도경도 못지않게 젊었다. 그러는 당신은 몇 살이냐고 물으려던 지한은 입을 다 벌리기도 전에 다시 다물었다.
당신이란 호칭을 쓰긴 좀 그러니 이름을 불러야 할 텐데 어째서인지 도경 씨,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남의 이름 뒤에 ‘씨’를 붙이는 것은 지한에게 지나치게 간지러운 짓이었다.
“몇 살……?”
결국 지한의 입에선 바보 같은 문장이 흘러나왔다. 도경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되물었다. 저요? 지한은 멍청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진짜 모자란 놈으로 보이지는 않기를 바라면서.
“몇 살 같아 보여요?”
안 그래도 한마디 할 때마다 생각이 너무 많아져 곤란하던 차였다. 지한의 머릿속 사정을 알 리 없는 도경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할 것이지. 다소 짜증스럽게 생각한 지한은, 웃기게도 진짜로 도경이 몇 살처럼 보이는지 맞추려 눈에 힘을 주었다.
“서른?”
사실 지한은 도경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볼수록 정확한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겠다는 인상만 받았다. 단순히 어려 보이거나 보기 좋게 생겼다는 점을 떠나서, 화장을 진하게 한 사람 앞에 설 때 받을 수 있는 느낌이 났다. 뭐랄까. 정말이지 흠이라곤 찾아볼 수 없어 신기하면서도 사람이라기엔 인위적인.
도경의 눈이 크기를 키웠다. 입술도 살짝 벌어졌다. 진심으로 놀란 것 같았다.
“어떻게 아셨어요?”
“아는 사람이랑 비슷해 보여서…… 그 사람도 서른이에요.”
진실이었다. 소현이 서른이었으니까.
“아는 사람? 친구요?”
“아니요.”
소현을 언급한다고 큰일이 일어나진 않을 테지만, 지한은 일단 그러지 않기로 했다. 지한이 소현과 일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는 것까진 도경도 알고 있었지만 얼마 전 죽은 친구를 주제 삼아 대화하는 일이 막 달갑지는 않을 터였다.
또, 행여나 소현에 대해 캐물으려 이 자리에 응했다는 의심은 받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도 지한은 알고 싶은 것이 없었다. 이미 죽은 소현에 관해서는.
“그날은.”
“저기.”
도경과 지한의 말이 한데 섞여들었다. 멈칫거리는 지한과 달리 도경은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순서를 넘겼다.
“먼저 말씀하세요.”
아, 그래. 지한은 잠시 잊고 있던 본 목적을 되새겼다.
그는 소현이 아닌 그녀의 남자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그녀에게 지한 말고 또 다른 남자가 있었는지. 지한을 영화에서 배제시키는 데 들어간 입김이 누구의 것인지. 그 둘이 동일인물인지.
물론 그런 것을 지금 물을 수는 없었다. 그런 것은 아주 나중에.
“어……. 술, 자주 마셔요? 원래?”
도경과 지한이 지금보다 한 스무 배는 가까워진 다음에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되는 대로 던진 질문에 도경이 잠시 허공을 쳐다보았다.
“일주일에 한두 번이니까, 자주까지는 아니네요.”
생각하고 던진 질문이 아니다 보니 딱히 할 대꾸도 없었다. 대화가 뚝 끊겼다. 지한은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술집에서 의무적으로 트는 음악 소리가 지금처럼 반가웠던 적도 없다.
“그날 잘 들어가셨어요?”
“그날?”
“에스더네 별장에서 만났던 날이요. 혼자 오셨었잖아요. 전 먼저 올라오는 바람에 인사도 못 해서.”
그날 지한은 이동하는 데만 왕복 세 시간을 길바닥에 갖다 버렸다. 도경이 언제 사라졌는지를 알아차릴 틈도 없었다. 에스더란 이름의 여자는 뒤늦게 나타난 주제에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한의 팔을 끌고 다니며 소개했더랬다.
인사해, 소현이 친구야. 우지한. 알지? 그러면 소현의 친구들은 언제 통성명을 했다고 하나같이 턱을 끄덕이며 지한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 별장에서 만난 인간들은 죄다 무례하고 이상했다.
도경은 아니었지만.
“금방 나왔어요. 얼마 안 있다가.”
“거기까지 오토바이 타고 오셨던 거예요?”
“아니요.”
“지난번에는 뒤에 오토바이 있었잖아요. 편의점 앞에서.”
지한은 떨던 다리를 멈추었다. 왠지 도경이 눈치채면 별로 좋아할 것 같지 않아서였다.
“예.”
“오토바이 안 무서워요?”
“별로…….”
“저는 한 번도 안 타봐서.”
저 새끼가 나를 무시한다거나 공격하려 든다는 식의 추측은 맞든 틀리든 곧잘 하는 지한이었으나 그 외의 의도는, 맞추기는커녕 예상할 시도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오늘은, 안 끌고 와서 없고.”
악의가 아예 들어있지 않은 의도를 가진 타인 자체가 낯설다는 뜻이었다. 낯선 나머지 예상하는 시늉도 못 냈다. 잘 모르겠어서.
“다음에 뒤에 타세요. 궁금하면.”
말을 끝내자마자 아차 싶었다. 오토바이 뒤에 타라니, 도경이 무슨 고등학생인가. 게다가 하고 다니는 걸로 봐선 그 어떤 고가의 물건을 가져와도 타기 싫다고 해야 어울렸다. 바람 때문에 머리 모양이 필연적으로 망가질 테니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기란 불가능했다. 도경과 단둘이 앉아있는 내내 머릿속과 입을 따로 놀린 대가였다.
그런데 도경의 반응이 색달랐다. 그는 헛웃음을 치지도, 됐다며 사양하지도 않았다. 대신 눈을 아까보다 한층 더 크게 키우고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저를 오토바이 뒤에 태워 주신다고요? 진짜로?”
농담이었다고 얼버무리려 했던 지한도 그렇게 되니 생각이 바뀌었다. 도경만 탄다고 한다면 못 태워줄 것도 없었다.
“내가 뒤에 탈 순 없잖아요.”
지한의 말이 웃겼는지 도경이 피식거렸다.
“그래요, 그럼.”
그러고는 다시 대화가 끊겼다. 처음 대화가 끊겼을 때만큼 어색하지는 않았다. 도경은 다른 술을 시키려는지 메뉴를 열었고, 지한은 가죽으로 된 메뉴 커버를 감싼 도경의 손에 눈길을 주었다.
사실 잘 알 수 없었다. 시커먼 가죽과 닿은 도경의 하얀 손에 지한이 자의로 눈길을 준 것인지, 눈길이 알아서 가버린 것인지는.
“그런데 지한 씨.”
맨 마지막 페이지의 칵테일 리스트를 한참 훑던 도경이 지한을 불렀다. 지한이 도경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기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노랫소리에 묻힐 뻔했다. 그만큼 조용조용하게 말하는 편이었다. 여러모로 보통 남자들과는 달랐다. 많이.
“예?”
“이안이가 그러더라고요. 지한 씨 분명 신인 배우 같은데 인터넷에 검색해도 안 나오는 게 이상하다고.”
이안. 한국인 같지 않은 이름이라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소현의 빈소에서 조의금을 담당했고 별장에선 도경의 옆에 붙어있던 남자다. 시원시원하게 생겨서 하는 짓은 어딘가 맹한.
“어디서 날 봤대요?”
“아니요.”
“그러면.”
“너무 잘생겨서요. 지한 씨가.”
줄곧 메뉴에 꽂혀있던 도경의 시선이 느리게 대상을 바꾸어 지한에게로 옮겨왔다. 스르륵. 어디서 그런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그런 소리 많이 듣지 않으세요?”
숨이 막혀 온다.
습격처럼 지한을 찾아온 그 증상은 그가 평소에 곧잘 겪는, 심장이 두근거리며 호흡이 가빠지는 증상과는 살짝 달랐다. 손 한 번만 뻗으면 닿을 거리만을 사이에 둔 채 앉아있는 이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숨을 편히 쉴 수 없을 것 같단 근거 없는 느낌은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호흡은 멀쩡히 이어지는 중이었다.
“별로…… 별로요.”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아야 했다. 도경의 말 한마디에 왜 그리 큰 의미가 있는 것처럼 들리는지 몰랐다. 지한은 숨이 막힌다는 착각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알고 싶어 하는 스스로의 의식을 차단했다.
순간의 사소한 선택이 부풀어 거대한 덩어리로 되돌아올 미래를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그릇된 판단을 하기엔 그의 삶이 이미 너무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지한은 도경이 밀어놓은 지 한참 된 잔을 들어 입에 댔다. 도경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의 잔에 담겨있던 술은 지한의 술보다 조금 덜 떫고, 훨씬 더 향긋했으며, 물처럼 부드럽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 몸속으로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