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Warm Up (4/38)

  4. Warm Up

#09

“예.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도경은 한 시간만이라도 코드를 뽑아 놓으면 어떨지 고민했다. 오전에만 열한 번째 통화였다. 연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과했다. 불행히도 탓할 대상은 없었다. 과한 스케줄은 다 그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멀쩡히 다니던 본사에서 좌천당하듯 엔터테인먼트로 옮겨온 지도 벌써 4년이 지났다. 그 4년 동안 도경은 적자만 내고 해산할 위기에 처해있던 아이돌 그룹을 구독자 수 500만의 채널 주인으로 만들어 놨고, 한동안 스크린 활동이 뜸해 이미지 변신이 절실했던 아역 출신 배우를 천만 관객 동원 작품 두 개에 출연시켰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음주운전 도박 폭행 트리플 크라운을 기록해 사실상 연예인으론 끝났다는 평가를 받았던 가수까지 차트 1위로 복귀시켜 놨다.

쉬지 않고 사력을 다해왔다. 연예계의 큰손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소현이 다녔던 회사는 영화 투자, 배급, 프로그램 제작, 게임 제작 등 연예 면에서 라이벌이 없는 대형이었다. 반면 도경이 좌천되어 온 회사는 그야말로 일반 기획사였다. 연예인을 양성해 데뷔시키고 키우는 매니지먼트.

소현은 첫 직장을 쭉 다녔어도 삶에 별 탈이 없었겠지만 도경은 어떻게든 본사로 돌아가야만 했다. 명예가, 그리고 미래가 걸린 문제였다.

3년이 되던 해에는 이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유배에도 마침표가 찍힐 뻔했다. 전 직원 수가 열 명 이하였던 기획사는 3년 만에 마흔 명의 일터가 되어있었다. 본사인 A일보의 연예부를 제외하고도 많은 연예 전문 언론에서 도경의 유배지를 ‘앞으로의 성장이 더욱 기대되는 엔터테인먼트’로 소개했다.

새해를 맞이해 네 식구를 아침 식탁에 모이게 한 권 회장은 도경이 묻기도 전에 먼저 운을 띄웠다. 소현이랑 결혼하려면 너도 올해에는 복귀해야지? 집안의 자랑이었던 장남이 여자 문제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지 반년 만이었다. 도경과 소현의 결혼은 곤두박질친 권 씨 일가의 체면을 회복시키기에 알맞은 행사였다.

「왜 내가 너랑 결혼할 거라고 생각해?」

만남이 뜸해졌던 것도 맞고, 만나서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었던 것도 맞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도경과 소현은 못 해도 일 년에 두 번씩 헤어졌다 다시 붙는 관계를 몇 년째 유지해오고 있었다. 사랑도, 우정도 없었지만 서로만이 서로의 민낯을 꿰뚫고 있었다. 적어도 동지애로는 맺어진 사이인 줄 알았다.

「우린 결혼하지 않을 거야.」

권 회장이 복귀 얘기와 함께 결혼을 언급했다는 소식에 소현은 정색했다.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다. 결혼하기 싫다는 의사 표현이 아닌, 결혼하지 않을 것이란 미래형 단언이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집안, 학력, 나중에 받을 유산, 이미 가진 자산, 사회적 위치 등 도경보다 더 나은 조건의 남자가 소현의 인생에 나타날 가능성이란 없다고 봐야 했다.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남자친구들은 소현을 드세거나 피곤한 여자라는 이유로 기피했고 사회에 나가서 만난 남자들은 소현과 수준 차이가 심했다. 따지고 또 따져 봐도 그녀에겐 도경 만한 후보가 없었다. 그래서 이유를 물었다. 우리가 왜 결혼을 안 해? 그리고 대답을 들었다.

「너, 나보다 더 미쳤잖아.」

주둥이를 비틀어도 시원찮을.

밖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도경은 휴대폰을 화면이 보이지 않게 엎어놓고 나서야 네, 하고 문이 열려도 좋다는 것을 알렸다.

“이사님, 강이안 씨 오셨는데요.”

“들어오라고 하세요.”

도경을 찾아오는 이 중 업무상의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이안 하나뿐이라 온 회사 사람들이 다 그의 존재를 알았다. 알면서도 바로 들여보내는 사람은 없었다. 항상 도경의 의사를 먼저 확인했다. 도경이 그러라고 시켰다. 이안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놀아달라고 하는 꼴은 방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만 왜 이렇게 추워. 히터 껐어?”

“더워.”

“덥다고? 나 오늘 이것만 걸치고 나왔다가 얼어 죽는 줄 알았는데.”

이안이 도경에게 이상한 눈초리를 보냈다. 오기를 부린다고 오해받은 것 같았다. 거짓은 말하지 않았다. 잠잠하던 혈압이 다시 날뛰는지 머리통 전체로 열이 몰리는 느낌이었다.

“열이 나서.”

“감기 걸린 거 아냐?”

계속 열나면 병원 가, 그래야 안 심해지지. 잔소리처럼 들리는 걱정을 한 이안이 책가방처럼 생긴 가방에서 서류 봉투 두 개를 꺼내어 건넸다.

“맨 위에 거가 사진이고 두 번째 건 학생기록부랑 뭐 그런 거 카피. 등본도 있어. 근데 보호 관찰 기록은 못 구했대. 그게 더 구하기 힘들다 그러더라.”

“보호 관찰?”

이안이 턱을 열심히 끄덕거리며 손님용 의자에 앉았다.

“마이너들이 법 어기면 그런 거 받잖아.”

“무슨 짓을 했는데?”

“애 팼대. 여러 번. 그래도 중학생 땐 합의도 보고 뭐지 그거, 반성문도 쓰고 그래서 큰일까진 안 된 거고.”

첫 번째 봉투의 입구를 뜯자 사진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최소 스무 장 이상으로 보이는 사진들은 전부 하나의 피사체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우지한.

“하도 많이 싸우고 다니니까 체육관 관장이 소문 듣고 차라리 격투기 선수로 키워보자 해서 복싱을 가르쳤었나 봐. 안 그래도 위험한 놈한테 아이템 준 거지.”

불륜 현장 잡으려는 처지도 아니고 사진이 굳이 필요할까 싶었는데 추가하길 잘한 듯싶었다. 매일 입는 옷, 잘 짓는 표정, 주로 다니는 장소, 자주 만나는 사람. 따로 떼어놨을 때는 의미 없어 보이기 쉬운 조각들이지만 모이는 순간 그것들은 한 인간에 대해 말해주는 좋은 지침서가 됐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상대가 불구 안 된 게 다행일 정도로 심하게 팬 거야. 그래서 걸린 거.”

도경에 의해 선택된 첫 사진은 단독 사진이었다. 아파트에서 막 나온 지한이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고 있다. 무릎만이 아니라 허벅지까지 시원하게 찢긴 청바지가 눈에 띄었다. 넓은 면적의 구멍으로 보이는 허벅지에 근육이 바짝 서있었다.

“그런 건 어떻게 알아냈대? 기록도 못 구했다면서.”

“안 물어봐서 몰라. 자꾸 그런 거 물어보면 일 안 받아줄 수도 있다 그랬어.”

두 번째 사진에서도 지한은 혼자였다. 까만 팬츠는 전 사진에서 입고 있었던 청바지와 색만 바뀌었지 지나치게 많이 뚫린 구멍으로 허벅지가 보인단 점에선 달라진 점이 없었다. 몸을 남에게 전시하는 것에 한해서, 자신감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아, 그리고 이력서 카피는 없어. 하나도. 어디 정식으로 취직한 적이 아예 없대.”

세 번째, 네 번째를 지나 열 번째에 이를 때까지 사진 속 지한은 혼자였다. 홀로 걷거나, 앉아서 버스를 기다리거나 누군가와 통화를 하면서. 누구나 혼자 이동할 때는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한다 해도 지한의 표정은 약간 사나운 편이었다. 그냥 인상이 더럽게 생겨먹은 것인지, 아니면 늘 공격성이 뻗치는 상태인지는 조금 더 봐야 알 것이다.

“부모 돈으로 사는 건가.”

“그건 아니야. 고아니까.”

도경은 열한 번째 사진을 집으려다 말고 이안을 쳐다보았다.

“키우다 버린 게 아니고 태어나자마자 버려져서 부모는 아예 모르고, 보육원 나온 다음부터 쭉 같이 사는 사람 하나 있고.”

“여자?”

“에이, 소현이 누나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여자,” 까지 말한 이안이 실수를 깨닫고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남자야. 둘이 고아원에서부터 친구였대.”

고아 출신 청년. 그것이었다. 분량은 적어도 존재감 하나만큼은 주연 못지않은 단역이 고아였어야만 했던 까닭. 그 역을 맡게 될 지한이 진짜 고아라서. 고아니까 고아 역할을 준다는 발상이 너무 납작하고 유치했다. 피식피식 웃음이 절로 났다.

“왜 웃어? 웃긴 사진 있어?”

“아니.”

이안과 계획을 공유할 마음은 없었다. 도경은 보려다 만 다음 사진을 위로 들었다. 지금까지 본 사진들과는 분위기가 확 달랐다. 새로운 피사체 덕분이었다.

“여긴 누구?”

“그게 같이 산다는 사람. 사진 뒤에 이름 있어.”

과연 사진 뒤에 조그맣게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이시우’. 도경은 다시 사진을 뒤집었다. 지한보다 작은 남자가 활짝 웃고 있다. 앳되었다. 많게 봐줘도 기껏해야 대학생쯤.

“M호텔 있잖아. 무영이 형네 사촌인가 오촌인가 암튼 그쪽 집에서 하는 데. 터미널이랑 붙어있는 지점에서 일한대. 바텐더.”

동안인 남자는 다음 사진에도 연이어 등장했다. 지한의 재킷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있는 모습이었다. 뭔가를 찾거나 집어넣는 중인 것으로 보였다. 도경은 열두 번째 사진에 조금 더 긴 시간을 할애했다. 남의 손이 주머니에 들어와 있는 사람치고 지한은 놀랍도록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무관심한. 의자에 앉는 행동 하나도 섣불리 하지 않던 경계심과 가만히만 있어도 밖으로 새어 나오던 투박한 기운이 어제 본 듯 생생했다. 동거인의 손이 어디로 들어가 뭘 하든 가만히 놔두는 태도는 그런 행위가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만큼 익숙하기 때문이라 해석되었다.

“그리고 우지한 말인데, 오토바이 잘 타서 작년에는 스턴트도 두 번 했대. 대회 경력도 없고 다닌 학원도 없다는데 어떻게 영화감독들하고 연결된 건지는 모르겠고.”

감독들과 지한을 연결하는 고리는 아마도 소현이었으리란 가설 또한, 도경은 굳이 이안과 공유하지 않았다. 새로이 쥔 사진 속에서 오토바이에 올라앉기 직전의 상태로 박제된 지한을 품평할 뿐이었다.

일제 오토바이는 낡았고 등에 멘 가방은 싸구려였다. 엉덩이를 덮지 못하는 재킷의 가죽은 합성피혁으로 추정되었다. 사진 안에 보이는 것 중 유일하게 값어치가 있는 품목은 후진 옷들만 걸치고 있어도 젊음을 숨기지 못하는 지한의 몸뚱이였다. 그 외엔 값을 매길 가치가 없었다.

“맞다. 그리고…… 이것도 카피는 없는데, 빚이 있대.”

“집 사느라?”

“아니. 사채 써서. 지금 사는 아파트는 월세야. 렌트.”

“스물다섯에 사채는 왜. 도박?”

“노, 노. 왜 아까 보호 관찰? 있었다고 했잖아. 그러고 나서 잘 버티다가 졸업하기 직전에 또 사고 친 거지.”

“그럼 보호 관찰만 두 번.”

“아니. 스물 된 다음이어서 갔으면 그땐 감옥이었지. 그러니까 어떻게든 안 보내려고 합의금이랑…… 아무튼 원금 자체가 좀 높더라고.”

“누가 안 보내려고 대출을 받아. 고아라면서.”

“그 같이 사는 친구.”

이안의 머리통 너머, 블라인드를 쳐놓은 유리창에 시선을 둔 채 도경은 생각했다. 지한이 별장에 입고 왔던 정장은 상의만 4백만 원에 이르렀다. 안정적인 직업도 없으면서 아직까지 빚을 다 청산 못 했다는 지한에게 옷에 그만한 돈을 쓸 여유가 있을 리 만무했다.

소현이 사줬다. 확실했다. 일부러 도경과 같은 브랜드의 향수를 썼던 소현이 우연히 그 정장을 지한에게 입혔을 리 없다. 알고 입혔다.

“형 괜찮아?”

남들더러 실컷 비교하라고. 지한과 도경을.

도경보다 똑똑하거나 돈이 많은 놈일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안이 심부름센터를 통해 얻어온 정보는 상상을 초월했다. 근본도 없고 능력도 없는데 준법정신도 없었다.

빚만 있었다. 한 마디로 거지새끼였다. 그런데 지한을 집안에까지 소개시키려고 했다고? 다른 소문은 몰라도 그 소문만은 죽었다 깨어나도 사실일 수 없었다. 소현에게 부모를 쇼크사시키려는 목적이 있지 않았다면.

“괜찮아.”

구식 오토바이에 기대어 담배를 나눠 피우는 두 남자가 담긴 사진 위로 먼지가 내려앉았다. 도경은 검지 끝으로 먼지가 앉은 부분을 꾹 눌렀다. 아무리 세게 눌러도 인화된 사진 속 지한은 망가지지 않았다. 영원히.

도경이 필요로 하는 것은 진품이었다. 한 대 치면 한 대 맞은 흔적이 남고 열 대 치면 열 대 맞은 흔적이 남는, 살아있어 영원하지 않은 진짜 지한.

#10

오전에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빤한 내용이었다. 지한 씨 안녕하세요, 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연락을……. 막내 조감독의 목소리에 미안함과 민망함이 뒤섞여 있었다. 몇 번이고 예측했으면서도 설마, 그래도 설마 하며 끝에 가선 오지 않기를 바랐던 전화였다.

허탈하고 무력했다. 의외로 화는 많이 나지 않았다. 오디션 한 번 보지 않고 낚아챈 자리였다. 한 방에 얻은 것은 한 방에 도로 빼앗겨도 별로 할 말이 없게 됐다.

「날 믿어. 나는 한 번도 실패한 적 없으니까.」

소현이었다면 정말로 지한의 과거를 걸림돌이 아닌 발판으로 만들어줄 수 있었을까?

이제 와서 궁금해봤자 소용없었다. 알면서도 자꾸 궁금해졌다. 밥을 먹으려 해도, 술을 마시려 해도 돈이 들지만 궁금해하는 것엔 돈이 들지 않았다. 그러니 조금 더 궁금해해도 괜찮았다. 소현이 죽지만 않았다면 모든 일이 그녀의 계획대로 잘 풀렸을지, 그래서 지한이 스스로의 힘만으로도 남부럽지 않게 현금을 긁어모으는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을지.

“무슨 일 있어?”

지한을 볼 때마다 모자라고 연약한 대상 앞에 선 것처럼 안쓰러운 눈빛이 되는 시우에게 당당히 말할 날이 왔을지. 이제 내 걱정 안 해도 돼. 그러니까 제발 너나 잘 살아.

“아니.”

지한은 일부러 고개를 반대편으로 틀었다. 다행히 더 이상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시우가 현관을 열고 집을 나섰다. 자동으로 문이 잠겼음을 알리는 기계음이 났다. 너무 못되게 생각했다, 지한은 또 후회했다. 뒤늦게 쓸쓸했다.

새롭게 전화가 걸려왔다. 감상에 빠질 겨를이 없어져서 좋아해야 할지 말지를 단언하긴 일렀다. 이번에는 또 어떤 소식이 그의 기운을 빼놓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여보세요.”

―야, 지한아. 나 지방에서 올라오느라 방금 들었다.

격양된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번 영화에서도 함께 일할 예정이었던 무술 감독이었다. 스턴트로 출연했던 두 작품에서 연달아 마주쳐 인사하고 지내다 보니 서로의 휴대폰에 번호가 저장된 사이로까지 발전했다. 여타 감독들과 달리 무술 감독은 지한을 스턴트로 출발했다가 극적으로 스크린 데뷔까지 하게 된 개천의 용쯤으로 여겼던 것 같다.

“네. 형님.”

―아무리 이 바닥이 오늘 일 내일 어떻게 될지 몰라도 그렇지, 뭐 그런 놈들이 다 있어? 크랭크인만 하면 되는데 갑자기 배우 다 정해진 역할 내놓으라고 하는 게 말이 되냐고.

맞는 말이었다. 다른 역도 아니고 소현이 재창조해낸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실상 지한의 삶을 90프로 이상 반영해 만들었던 역할에 촬영 시작까지 2주도 안 남은 시점에서 갑자기 다른 배우를 넣어달라고 하는 것은 어느 각도로 보아도 억울한 일이었다.

―대체 대본은 어떻게 손에 넣은 거야?

“그러게요.”

그러나 지한은 억울함을 토로하지 않았다. 그에겐 소현이라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없는 이들이 널리고 널렸다. 자신이 어디까지 억울해도 되는 놈인지 지한은 잘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말을 아꼈다.

―감독님도 그러시잖아. 갑자기 네 역할을 어떻게 알고 그걸 달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너한테 너무 미안하게 됐대.

그래도 한 가지는 잘 알겠다.

“굳이 그렇게 안 둘러대도 돼요.”

소현이 죽는 순간 지한의 기회도 함께 죽었다. 다시 원점이었다. 웬만해선 사람 취급받지 못할 과거, 빚 그리고 그를 심리상담가에게 보내고 싶어 하는 시우. 그것들이 다인 삶.

―뭐?

그것들이라도 있어서 유지되는 삶.

“그냥 처음부터 감독이고 조감독이고 나 마음에 안 들어 했다고 말해도 된다고요. 내가 뭐 어떻게 하겠어요. 가서 카메라라도 부술까 봐?”

―너 말을 그렇게 하면 안 되지. 감독님이 어, 너 같은 마스크 요새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얼마나 좋아하셨는데. 그리고 일부러 하는 말이 아니야. 다들 황당해하는 중이라니까.

“그렇게 말 안 해도 된다니까요? 나 형한텐 아무 감정 없었거든요. 자꾸 쓸데없는 소리 붙여서 감정 생기게 하지 마요.”

―환장하겠네.

원래 성격대로라면 진즉에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어야 한다. 이쪽에선 최선을 다해 참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상대가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지한은 입 안을 깨물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욕이 튀어나갈 것 같았다.

―나는 너랑 장 차장님이 무슨 사이였는지 모르겠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데 말이야.

“…….”

―그것 때문일 수도 있다고 말들이 많아. 그렇게만 알아둬.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열기가 얼음물을 맞은 것처럼 한 순간에 가라앉았다. 무술 감독은 소현과 지한의 사이가 공공연히 의심받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관계자들에게 의심받았을 뿐 아니라 그 의심이 결국 지한의 기회를 빼앗아갔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불쾌한 이야기를.

“그게 무슨 소리예요.”

―차장님이 너를 여기다 소개시켰다는 거, 그걸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사람이 있어서 이렇게 된 걸 수도 있다고.

“누가요?”

―그걸 알면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겠냐. 아무튼 당분간 몸 사리고 다녀라. 진짜 걱정돼서 하는 말이다.

통화가 급하게 끝났다. 지한은 화면이 꺼진 휴대폰을 노려보았다. 손자국이 묻은 액정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무술 감독이 없는 말을 지어낼 이유는 없었다. 제3자의 개입으로 일이 이렇게 됐다는 말은 사태를 진정시키기는커녕 불만 키우는 기름이었다. 그런 거짓말로 이득을 얻을 자는 없었다. 그러니까 진짜라고 치고, 아니, 진짜라고 믿고, 그리고……

대체 누가?

결국 휴대폰을 집어던졌다. 거실 바닥에 튕긴 기기가 TV 앞까지 굴러갔다. 지한은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화가 난다.

#11

입구로 들어선 도경을 본 웨이터가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숙였다. 웨이터 뒤로 등장한 매니저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만 살짝 숙였다 펴는 것으로 인사를 마무리했다. 너무 요란한 응대는 싫어하는 도경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어서였다.

“부장님은 조금 전에 도착해서 미리 들어가 계십니다.”

매니저가 도경을 직접 룸까지 안내하며 상황을 알려주었다. 회장님은 아직 안 오셨습니다. 수축해있던 심장이 느슨해지는 기분이었다. 들키고 싶지 않은 기분이라, 도경은 매니저에게 살짝 웃어 보였다.

족히 열 명은 앉을 수 있을 긴 테이블의 상석의 대각선 자리에 현경이 앉아있었다. 매니저가 말한 부장이었다. 도경이 팔자에도 없는 연예기획사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현경은 본사 부장 자리를 꿰찼다. 학력도 비슷하고 성적도 비슷해 의도치 않게 평생 경쟁을 벌여왔던 형제는 어느 순간 과연 따라잡을 수 있을지 의심이 가는 격차를 벌리게 됐다.

형을 시기 질투하는 놈한테는 내가 키우는 개털 하나도 물려줄 수 없어. 현경이 주식으로 수십억 날려 먹는 과정을 수개월에 걸쳐 봐놓고도 입 한 번 벙긋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도경을 회사에서 쫓아낼 당시 권 회장이 직접 했던 말이었다. 수십억을 허공에 흩뿌린 장본인은 도경이 아니라 현경이었음에도.

“도경아. 정신 좀 차리고 다녀.”

매니저가 도경의 잔에 차를 따라주고 나가자마자 현경이 도경에게 말을 걸었다. 이름을 부르는 투가 제법 다정했지만 하는 말까지 다정하진 못했다.

“네가 다른 놈한테 소현이 빼앗겼다는 소문이 우리 회사에까지 퍼졌어. 오죽하면 편집장이 널 걱정했다니까?”

도경은 침착하게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향이 너무 약했다. 목은 타지만 마시지 않기로 했다. 진한 것이 필요했다.

“사람이 물건인가. 뺏기고 말고 하게.”

언제 다정히 동생의 이름을 불렀냐는 듯 현경의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형편없었다. 얼굴로 속내를 드러내는 것은 하수의 몫이었다. 권 회장은 잘못 짚었다. 시기 질투는 도경이 아니라 현경이 하는 것이었다. 도경은 핏줄을 적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부모를 공유하는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은 무익하고 유해했다.

“말장난할 때야, 지금? 아버지가 왜 오늘 밖에서 보자고 하신지 몰라?”

모르지 않았다. 권 회장이 두 아들을 따로 바깥에서 보자고 한 것은 와이프를 이겨 먹을 자신이 없어서였다. 장남 사랑이 권 회장 몫이라면 차남 사랑은 황 원장 몫이었다.

시댁이 꼴 보기 싫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단순히 자신을 더 닮아서 그런 건진 몰라도 남편과 정반대로 황 원장은 도경을 아픈 손가락 취급했다. 권 회장이 도경에게 던진 도자기를 두 손으로 막아낸 적도 있었다. 도경은 어떤 경우에도 황 원장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 사랑은 진짜였다.

“모른다고 한 적 없는데.”

“또 말장난한다. 네가 진짜 모르는 것 같아서 물어본 게 아니잖아.”

도경은 맞은편의 현경을 바라보았다. 그것 말고는 딱히 취할 행동이 없었다. 동생의 무반응에 현경이 멀쩡한 머리를 쥐어뜯다시피 헤집었다. 퇴근 후에도 모양을 유지하고 있던 머리가 순식간에 망가졌다. 픽션 속에서건, 현실에서건 시끄러운 속을 감당하지 못해 머리카락을 헤집는 이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도경의 공감을 사지 못했다. 기분이 복잡하다고 행색을 망가트려 봤자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걱정돼서 하는 말이니까 제발 오늘은 알아서 입조심해.”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여덟 살 터울의 동생 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녔었다는 현경은 언제부턴가 도경을 검은 머리 짐승 취급했다. 어렸을 때 예뻐해 줬더니 고마운 줄 모른단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런 혈육에 대해 도경은, 별생각 없었다. 한때나마 동생을 예뻐했다는 현경의 말이 덥석 믿어지지도 않거니와, 굳이 예뻐해 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예뻐하고 아끼는 감정은 사사로웠다. 사사로움은 많은 일들을 그르쳤다.

영양가 없는 대화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존재감을 숨기지 않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현경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경이 의자를 뒤로 빼고 반쯤 일어섰을 때 문이 열렸다. 조심성 없이 밀린 문이 벽과 부딪혀 큰 소음을 냈다. 권 회장의 솜씨였다. 그는 종종 문이나 문을 세게 다루는 것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종종. 사실은 매일.

세 부자가 모인 룸 안은 한동안 정적을 유지했다. 음식을 가져다주러 드나드는 웨이터 말고는 누구 하나 소리랄 것을 내지 않았다. 불안정한 침묵이 깨지는 것은 숙성회가 나오고 나서였다.

“사실이야?”

권 회장이 대뜸 물었다. 질문의 대상이 어느 아들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굳이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두 아들 다 그 질문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았다.

“뭐가요?”

“소현이가 너 두고 다른 남자랑 바람피웠다는 말이 사실이냐고.”

망자에 대한 예의는 당연히 없고, 아들에 대한 배려도 없었다. 거침이랄 것이 없었다. 권 회장은 우아하지 않았다. 고상을 헛짓거리로 여기며, 도경을 못 미더워했다. ‘사나이’다운 면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잘 몰라?”

“소현이가 살아 있었으면 물어봤을 텐데요.”

현경이 사나이답게 돈을 날려먹는 동안 도경은 차곡차곡 커리어를 쌓았다. 그런데 권 회장은 현경을 내치는 대신 도경을 쫓아냈다. 형을 돕기는커녕 부모에게 언질도 해주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납골당에 가서 저 혼자 떠들어봤자 소용없으니까.”

도경은 이따금 의문했다. 남자다운 것이 대체 뭐지?

“연예인 한다고 설치는 놈이라는 것도 모른다 이거지?”

현경이 도경에게 눈짓했다. 괜한 소리로 권 회장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 같다가도, 그러게 너는 왜 여자나 빼앗기고 다녀서 이 사달을 만들었냐는 힐난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연예인이여도 황당할 판에 뭐, 연예인 지망생한테 여자를 뺏겨? 네가 그러고도 불알 두 쪽 달린 사내새끼라고 할 수 있어?”

도경의 무반응을 수치의 발현으로 여기기라도 한 것인지, 안 그래도 작지 않은 목소리가 확 볼륨을 높였다. 계속 두면 점점 더 심한 소리가 나올 것이다. 그래서는 테이블에 둘러앉은 세 사람 중 누구도 멀쩡한 기분으로 귀가할 수 없었다. 다음날은 평일이고, 그들은 모두 열두 시간쯤 후면 출근을 해야 했다. 둘은 어쩐지 몰라도 도경은 컨디션 난조로 하루를 망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어요. 장소현이 갑자기 미쳐서 그런 놈을 좋다고 하는데 제가 뭘 어떻게 해요.”

권 회장의 얼굴이 삽시간에 구겨졌다.

“알면서 뺏겼다 이거야? 그 소릴 뭐 그렇게 당당하게 해? 너 밖에서도 이러고 다니는 거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아니요, 몰랐어요. 그리고 자꾸 뺏겼다고 하시는데 그 둘이 언제부터 만난 건지는 아무도 몰라요. 저랑 사귀면서 만난 건지, 헤어지고 나서 만난 건지 확실하지가 않다고요. 그렇지만 알았어도 제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요.”

제발 나를 여기서 내쫓아라. 도경은 염원을 담아 말했다.

“죽이기라도 했어야 하나요?”

룸 안 공기가 소현의 장례식보다 더 칙칙하게 가라앉았다. 불호령이 떨어지기 전부터 지레 겁먹은 현경은 미리 고개까지 숙이고 있었다. 글쎄, 권 회장이 늘 강조하는 남성성이 그런 것이라면 별로 없어도 손해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나가.”

한 치 앞은 내다봐도 자식의 머릿속까진 꿰뚫어 보지 못하는 권 회장이 도경의 뜻대로 움직였다. 도경은 나가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일어났다. 정중히 인사하는 절차도 물론 잊지 않았다. 현경이 황망한 눈빛으로 도경을 좇았다. 미친 남자의 곁에 자신을 혼자 두고 가지 말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기분 탓이었다.

차를 가게 앞에 정차시킨 뒤 내린 주차원은 도경이 내미는 현금의 액수를 확인하고 눈이 잠시 커졌다가, 이내 허리를 깊이 숙였다. 도경은 주차원이 허리를 펼 때까지 기다렸다가 턱을 까딱였다. 감사합니다. 주차원의 얼굴 위로 또 한 번 놀란 기색이 퍼졌다.

권 회장이었으면 뭔 쓸데없는 짓이냐고 싫은 소릴 한바탕했을 상황이었다. 권 회장은 틀렸다. 도경에게 손가락질하는 모두가 틀렸다. 그는 결코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았다. 그의 팁과 예의에 감동받은 주차원이 미담만 한 번 떠들어도 이미 그것은 쓸데없는 짓이 아니었다.

운전석 창에 달이 비쳤다. 누가 한입 베어 먹은 듯 윗부분이 잘려나간 모양이었다. 도경은 잠시 멈춰서 달을 보았다. 불안정한 형태의 달 주위로 안개 같은 구름이 껴 있었다.

알면서 뺏겼다 이거야? 그 소릴 뭐 그렇게 당당하게 해? 너 밖에서도 이러고 다니는 거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화낼 필요 없었다. 화라니. 그림을 보아야지 그 안의 개별적인 소품 하나, 피사체 하나에만 매달려 있어선 안 된다. 도경은 그림을 보았다. 다 그려지지 않아 아직은 미완성이지만, 그는 알았다.

완성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든 끝에 가선 그의 그림이 될 것이다.

#12

가끔 가방으로 지한의 얼굴을 후려치고 그것보다 조금 더 자주 그를 내쫓았던 소현은, 그런 짓을 저지르고 나면 십중팔구 먼저 사과의 손길을 건넸다. 담백하게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건네는 것은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다. 어떤 때는 구두였고 어떤 때는 정장 세트였다. 그녀가 하는 사과란 열에 아홉 그런 식이었다.

「너는 만나는 사람도 없어?」

나머지 한 번은 약간 달랐는데, 사람을 호텔로 불러놓고 앉아있게만 하다 뜬금없이 엉뚱한 소릴 하는 것이 어쩌다 가끔씩 나오는 방법이었다. 사실 지한에게는 사과라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사과치곤 너무 퉁명스럽기 일쑤인 데다가 소현이 던지는 엉뚱한 소린 대부분 그녀 본인에 관한 이야기였다. 딱히 알고 싶지도, 알아봤자 써먹을 데도 없을.

「누나도 없잖아.」

관심이 없는 것과 별개로, 지한은 소현이 의미심장한 말을 할 때마다 성의 있게 반응했다. 소현은 지한을 유명하게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녀의 손을 잡은 이상 지한 역시 맡은 바에 책임을 다할 의무가 있었다. 그게 설령 호텔 방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몇 시간을 앉아있기만 하다 하나 마나 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라 해도.

「너랑 같이 사는 걘 뭐야.」

소현은 시우를 알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지한이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어느 순간 그가 사는 곳, 학교를 나온 동네 심지어는 고아원 이름까지 알고 있었으니 현재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의 이름을 아는 정도는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소현의 입에서 시우란 이름이 나왔던 첫 순간에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었다. 두 번을 겪고 세 번을 겪다 보니 언젠가부터 내성이 생겨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시간은 사람을 무뎌지게 했다.

「걘 그냥.」

시간은 약이란 말이 있었다. 지한은 아직까지 모르겠다. 무뎌짐이 약이었는지. 혹시 독은 아니었는지.

「그냥?」

그 시간을 공유한 상대가 죽어버려 더는 물어볼 데도 없지만.

「그냥.」

봄이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날은 소현이 사과의 의미로 고가의 선물 대신 종잡을 수 없는 주제의 대화를 준비한, 아주 드물게 오는 날이었다.

「몇 살 때부터 알고 지냈다고 했지? 너랑 그 친구.」

그 무렵 소현은 부쩍 예민해졌었다. 원인은 몰랐다. 지한은 소현에게 왜 화를 내느냐고 물어본 적 없었다. 크게 궁금하지 않았고, 물어본다고 해도 알려주지 않을 것 같았다.

「다섯 살.」

사람들은 보통 지한과 시우와 알고 지낸 기간을 알고 나면 징글징글하단 눈빛이 되기 일쑤였다. 어려서 그렇게 붙어있어 놓고 아직까지 함께 사는 사내자식들이라면 반드시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는 의심을 대놓고 하는 이들도 꽤 있었다.

「나한테도 그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가 있어.」

소현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결국 또 본인 얘기였긴 해지만 공감한단 뉘앙스를 풍긴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소현이 지한과 공감대 형성을 하려고 드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지한은 기꺼이 경청의 자세를 갖췄다.

「제일 친한 친구?」

「그때부터 알고 지낸 애들은 걔 하나가 아니지만. 그런 애는 걔 하나밖에 없지.」

친구라는 단어를 썼으나 소현은 일반적으로 친구라 일컫는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때 지한은 최초로 소현과 공감했다. 지한에게 시우가 바로 그런 상대였다. 남들에게는 친구라고 소개하지만 절대 친구에 그치지 않는. 그렇다고 가족도 아니며 연인은 더더욱 아닌. 정의 내리기 힘든, 심지어는 사랑하는지 미워하는지조차 헷갈리는 힘든.

「그런 게 뭔데?」

소파 손잡이에 머리를 기대고 옆으로 누운 소현의 눈이 맞은편에 앉아있는 지한을 향했다. 숱 많은 머리카락이 이름을 기억해낼 수 없는 나무의 긴 잎들처럼 아래로 축 늘어졌다. 어지간히 취하지 않고선 보기 힘든 자세였다.

「어떨 때는 내 부모보다 나를 잘 아는 것 같은데.」

그러나 당시 그녀는 술 한 모금 마시지 않은 맨정신이었다.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다 보면 무서울 때가 있어.」

「뭐가?」

「내가 누굴 만나서 뭘 하든 말든 신경이 안 쓰이는 건지.」

지한은 그 무섭다는 것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무섭다고 말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소현은 겁먹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신경은 쓰이는데 안 쓰이는 척하는 건지. 그걸 모르겠어서 참을 수가 없어.」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농담이나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소현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즉, 그녀는 문제의 상대가 자신을 떨게 만든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너랑 잔다고 해도 알아서 하라 그럴 것 같아서 죽여버리고 싶다는 소리야.」

자신이 그 상대를 죽여버리게 될까 봐 무섭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저녁 대용으로 와인을 연거푸 몇 잔 비운 후였다고는 하나 소현은 절대 그 정도 양으로 만취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따라서 그녀가 어떤 이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XX를 찢어버릴 건방진 새끼 운운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소현이 짝사랑 대상인지 원수인지 그도 아니면 사귀다 헤어진 옛 애인인지 모를 남자의 이름을 지한과 공유한 의도가 어떤 것이었을지, 지한은 이날 이때까지 알아내려 들지 않았다. 소현과 관련된 누군가가 배역을 빼앗아갔다는 소식이 있기 전까지는.

그래서 그 이름이 뭐였더라.

소현의 친구들은 지한이 잊어버린 그 이름을 알고 있겠지만, 지한이 마음대로 연락할 수 있는 소현의 친구는 없었다. 연락처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지한을 불러놓고는 코빼기도 뵈지 않던 별장 주인 한 명뿐이었다. 그 여잔 도와준대도 싫었다.

「권도경이라고 합니다.」

차라리 그 남자였다면 나았을 텐데. 지한은 별장에서 만났던 남자를 떠올렸다. 장례식장에서 몇 초 본 것만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 남자는 지한을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살짝 잠긴 듯한, 음량이 적은 편에 속하는 목소리였다. 말하는 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점점 몸이 아래로 꺼지는 것 같은 기분에 젖어 들게 하는 남자였다.

「소현이랑 일로 아는 사이셨다고요. 저는 처음 뵙는 것 같은데.」

헤어 스타일부터 구두까지 다 혼자서 준비하고 차려입은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 보기 좋기만 했다. 그런 남자가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까지 예쁘게 한다는 것은 좀 비현실적인 구석이 있었다. 사람 같지 않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이해해 주세요. 소현이랑 워낙 친했던 애라 아직 정신이 다 안 돌아왔을 수도 있어요.」

편견이었다. 표면에 흠이 없다 해서 내부 또한 긁힌 자국 하나 없이 반질반질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소현을 통해 배웠으면서 또 같은 실수를 할 뻔했다. 도경이란 남자도 절대 완벽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그 남자가 소현처럼 손에 집히는 물건을 휘두르는 광경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지한은 정신을 차렸다. 불을 켜지 않은 집 안이 어두컴컴했다. 그새 저녁이 된 모양이었다. 거실 불을 켜자 저녁때를 훌쩍 넘긴 시간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앞으로 다시는 만날 가능성이 없을 남자에 대한 생각을 너무 멀리까지 했다.

이게 다 시간이 남아돌기 때문이었다. 내일부턴 뭘 하든 집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몸을 막 굴리면 애쓰지 않아도 절로 잠들고 싶어지게 되어있었다. 그러다 보면 다, 소현이 죽자마자 지한을 버린 영화감독도, 괜히 전화해서 속만 더 뒤집어놓은 무술 감독도, 큰소리만 쳐놓고 죽어버린 소현도 그리고 소현을 닮은 그 남자도.

깨끗이 잊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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