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Entrance
#06
지치지도 않고 조잘거리던 어린애 둘이 역 이름을 뒤늦게 확인하곤 날다시피 열차를 뛰쳐나갔다. 두 자리나 빈 것을 보고도 가만히 서있기만 하는 지한의 눈치를 살피던 남자가 여자친구를 먼저 앉혔다. 빈자리 하나가 남았다. 그래도 지한이 움직이지 않자 남자도 뒤따라 앉았다.
어색하게 웃는 남자와 눈이 마주친 지한은 그제야 자신이 눈 뜬 채로 빈자리를 남에게 넘겨줬음을 알아차렸다. 별로 아쉽진 않았다.
자꾸 앞에 앉은 커플과 눈이 마주치는 것 같아서 일부러 위쪽으로 돌린 시야에 광고 하나가 포착됐다. V자에 가까운 얼굴형을 가진 여자가 모델인 성형외과 광고였다. 소현도 그에 못지않게 뾰족한 턱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점을 찾자면 소현은 태어날 때부터 그런 모양으로 태어났다는 것 정도였다.
물론 그들이 처음 만났던 해에 소현은 스물아홉이었다. 지한은 스물아홉 이전의 그녀를 몰랐다. 원래부터 그렇게 생겨먹었다던 말이 진실이었는지, 거짓이었는지도.
―소현이가 지한 씨 얘기 많이 했어요. 그래서 꼭 다 같이 한 번 만나고 싶었는데.
소현의 친구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는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에 지한을 부르고 싶다고 했다. 통성명도 못 한 사이에 엉뚱한 소리를 하고 앉아있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덧붙여오는 말이 그것이었다. 소현이 살아있을 때 꼭 다 같이 한 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여태 그런 자리를 만들 기회가 없었으니 이제라도 대접해주고 싶다는.
소현이 죽고 없는데 왜 대접해주고 싶은 거냐고 묻지 않은 데에 특별한 이유가 있진 않았다. 지한의 번호를 아는 것 보면 소현과 아는 사이란 말은 사실인 듯해서 그냥 믿었다. 보통 죽은 사람을 가지고는 장난치지 않으니까.
만나기로 한 날을 하루도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지한은 문득 깨달았다. 여자는 지한의 이름을 알지만 지한은 여자의 이름을 몰랐다. 그건 별로 자연스럽지 않았다. 즉 열차에 두 발을 딛고 서있는 현재로부터 열두 시간 전쯤부터 이쪽만 상대의 이름을 모르는 채로 가지는 만남이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모르는 사이에 첫 대화를 할 때는 이름부터 밝히는 것이 상식적이었다. 소현의 친구라는 말로 소개를 끝내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이상했다.
이상했는데, 이상하다는 생각을 너무 늦게 해버렸다. 하지만 미리 깨달았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못했을 것이다. 대뜸 전화해서 왜 나만 당신 이름을 모르냐고, 이름이 뭔지 말하라고 다그치기도 뭐했다.
뭘 믿고 오란다고 옷까지 갖춰 입고 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싶다가도, 그럼 안 믿을 건 또 뭔가 하고 반기를 들게 됐다. 지한에게는 사기꾼이 탐낼 만한 거액이나 자산이 없었다. 자산은 무슨, 버는 족족 월세, 공과금, 이자 등 적자만 안 나도 다행이었다. 따라서 적어도 여자가 지한을 속여 뭔가를 빼앗아가려는 사기꾼일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했다.
열차가 정차했다. 열리는 문 위의 스크린에 낯선 이름이 떴다. 목적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소현은 희한한 여자였다. 겉보기엔 어느 분야의 전문가를 불러서 평가하라고 해도 만점 아래를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머릿결, 머리카락 색, 피부, 눈, 코, 입, 손 하다못해 몸에서 풍기는 향까지 완벽했다.
단순히 예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소현의 겉모습이 취향에 맞지 않을 순 있어도 모자란 데가 있다고 말할 자는 없었다. 인간이 한 가지 답만으로 귀결되는 공식처럼 맞고 그르게 생길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랬다. 생김새부터 몸짓까지 어디 하나 흐트러지는 부분이 없었다. 아귀가 딱 들어맞는 도형. 꼭 도형 같았다.
소현이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느껴질 수 있었던 데에는 매번 훌륭했던 행색만큼이나 대외적인 행동거지의 효과도 컸을 것이다. 그녀는 서비스직 종사자들에게 언제나 깍듯한 예의를 갖춰 대했고 밥이든 술이든 과하게 먹는 법이 없었다. 교통 법규를 위반한 적도, 부하직원이 사고를 쳐서 야밤에 팀장과 통화를 해야 할 때도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그래서 소현이 지한과 단둘이 남았을 때마저 완벽한 여자였냐면 그렇지는 않았다. 아무리 포장해도 소현은 지한의 스폰서였다. 인맥과 자리를 대가로 지한에게서 원하는 바를 받아냈다. 가끔은 잘 웃다 갑자기 화를 내며 지한을 내쫓았고 어떨 때는 손에 집히는 대로 아무 물건이나 던져서 호텔 룸을 개판으로 만들었다. 가방을 휘둘러 모서리에 얼굴이 찍힌 적도 있었다.
만에 하나 소현이 밖에서 볼 때처럼 실제로도 완벽했다면 이야기가 조금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 그토록 아름답고 우아한데 예의까지 바른, 균열 없는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지한의 인생에선 환상의 동물이기 때문이었다. 무섭게 빠져버렸을 수도 있다. 생전 처음 보는 금은보화의 값어치가 얼마나 되는 줄도 모르면서 그 눈부심에 홀려버리는 도둑처럼.
그렇지만 소현은 완벽하지 않았고, 지한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안내 방송이 정차 역을 알렸다. 목적지였다. 내도록 잡고 있던 손잡이가 뜨거웠다. 미련 없이 떨쳐내고 문 앞에 섰다. 광고 속 여자 모델이 자꾸 시야에 걸렸다. 소현에게 미안해졌다. 사랑하지 않았을 뿐, 스물다섯 인생에 그녀보다 더 뛰어나게 생긴 인간은 아직까지 못 보았다.
여자가 알려준 대로 역에서 걸어 나가자 택시 정류장이 있었다. 주소를 대니 기사가 백미러로 뒷좌석을 보았다. 좋은 동네 가시네요. 한 시간 반 넘게 지하철을 타고 온 동네가 창밖으로 빠르게 전시됐다. 어딜 가나 머리통들로 바글대는 서울과 달리 인도가 한산했다.
미터기가 올라갈수록 아파트가 줄어들고 건물들의 높이가 점점 낮아지더니, 어느 순간 아예 주택들만 늘어져있는 길이 펼쳐졌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날씨 때문인지 마당에 나와있는 사람도 찾기 힘들었다.
“팔천 원입니다.”
대로변에서 꽤 깊숙이 들어온 택시가 마침내 멈추었다. 차에서 내린 지한은 두 가지에 놀랐다. 차갑다 못해 몸 안 곳곳을 뚫고 들어오는 것 같은 시린 공기와 소현의 친구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 뒤로 펼쳐진, 언덕이라고 하기엔 너무 웅장한 산.
새카만 대문을 사이에 둔 담벼락이 양쪽으로 높고 길게 세워져 있었다. 문이나 벽 어디에도 초인종으로 보이는 버튼은 없었다. 고민할 틈도 없이 문이 살짝 열리며 사람이 하나 튀어나왔다. 귀에 무전기를 낀 남자는 지한의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곧 가볍게 묵례하며 문을 열어주었다.
그만한 규모의 문이 열리려면 응당 날 것이라 예측하게 되는 소음은 없었다. 너무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아서 뭐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염려하게 될 정도로 조용했다.
마당으로 한 걸음 내딛자마자 신발 바닥을 통해 이물감이 전해졌다. 담벼락 주변에 저마다 조금씩 다른 진하기를 가진 자갈들이 쫙 깔려 있었다. 밟고 걸으라는 용도로 깔린 것들이 아니었다. 자갈들 사이로 사각형 판들이 징검다리처럼 띄엄띄엄 이어져 있었다. 잿빛 판 위로 발을 디뎠다. 찬기가 신발을 뚫고 발바닥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건물 앞에 당도해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 거냐고 묻기 위해 뒤를 돌아본 지한을 반기는 것은 텅 빈 마당이었다. 분명 마당을 가로지를 때만 해도 뒤에서 걷던 남자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현관 안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난처하긴 해도 최악은 아니었다. 적어도 안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문고리를 잡고 내려 보았다.
문이 열렸다.
주택보다는 저택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건물 안은 매우 넓었다. 산 바로 앞에 있는 건물답게 목재를 사용한 인테리어는 전체적으로 오래되었다는 느낌을 주었지만 낡았다거나 촌스럽다는 인상은 풍기지 않았다. 그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이들이 하나같이 보기 좋은 것들을 걸친 젊은이들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 젊은 얼굴 중 지한에게 아는 척을 하는 이는 없었다. 당연했다. 지한도 그 얼굴들을 몰랐다. 소현은 지한에게 친구들을 소개해주지 않았다. 그 또한 당연한 바였다. 그들은 단 한 순간도 서로를 진심으로 대한 적 없는 사이였다. 하나둘 모여드는 이목이 지한의 속을 바짝 조였다. 소현이 지한 얘길 많이 했다던 여자의 말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었다.
애써 묻어두었던 의구심이 조금씩 고개를 쳐들었다. 과연 누군가에게 거짓말을 해가면서까지 지한을 불러내야만 하는 목적이 있을까. 그의 등장이 소현의 친구들에게 그만한 가치를 지녔다고는 여기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소현이 그랬듯 그녀의 친구들 또한 지한을.
“쟤 소현이 남자…….”
순식간이었다. 그 한 마디로 거실에 있는 모두가 지한의 등장을 눈치챘다. 누가 한 말인지를 알아내긴 힘들어 보였다. 초대자의 이름도 모르는 상태로 발을 들인 저택은 지한이 살면서 들어가 본 개인의 공간 중 가장 넓었다. 그의 귀에 들렸으면 얼추 열 명 이상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분명 들렸을 텐데, 어째서인가 누구 하나 나서서 사실 여부를 가리려 들지 않았다.
모두가 지한을 봤다. 보고 있었다. 보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없는 사람 취급했다. 눈앞에서 얼쩡거리니 보긴 하겠으나 먼저 어떤 행동을 취할 만큼의 가치는 없다고 여기는 듯했다.
지한은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자격지심이 도를 넘기고 있었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 들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물론 언제나 예외는 있었다.
똑똑히 들었다. 지한을 두고 한 소리였다. 훌륭한 성능의 스피커가 잔잔한 음악소리를 계속해서 내보내고 있는 데다가 아는 이름도 아니라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들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는 내용이었던 것만은 확실했다. 절대로 들어선 안 된다는 투였다. 누구일까, 그가 소현의 남자친구란 말을 들어선 안 되는 사람은.
지한이 넓디넓은 거실을 다 지나 주방에 이를 때까지도 그에 한정된 침묵은 끝나지 않았다. 소현의 친구들과 살갑게 인사를 나누고 싶은 욕심 따윈 지한에게도 없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소현을 언급해 그를 여기까지 오게 한 여자와의 대면이었다.
거실과 달리 텅 빈 주방에서 그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그가 모르는 것은 여자의 이름뿐이 아니었다. 얼굴도 몰랐다.
답답했다. 목구멍까지 나쁜 숨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벌어진 입 안으로 찬바람이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주방 공기가 찼다. 찬 공기의 근원지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그의 눈에 한 뼘만큼 열린 유리문이 들어왔다.
하얀 레이스 커튼이 유리문 밖의 정경을 한정적으로 내보였다. 밟으면 끽끽 듣기 싫은 소리를 내는 나무 바닥. 나무로 된 의자와 테이블. 한쪽은 바닥에, 다른 한쪽은 공중에 떠있는 적갈색 구두 한 쌍. 다리를 꼬느라 추켜올라 간 바지 밑단 아래로 살짝 드러난 발목. 하얗고 날씬한.
겨울바람을 마시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테라스 위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다 보고 싶어서인지 지한 자신조차 몰랐다. 그저 가만히 있다가는 또 숨이 가빠지고 시야가 좁아질까 무서웠다. 모두가 그를 보고도 안 보이는 척하는 장소에서 사고를 일으키는 상황에 처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그는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한겨울의 테라스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사람은 남자였다. 까만 코트 깃 위로 꼿꼿한 목이 휑했다. 발목처럼 하얬다. 춥지도 않은가 의아했지만 왜인지 추워 보이지 않았다.
구름이 비켜나며 해가 테라스에 드리워졌던 그늘을 거두어졌다. 까만 줄 알았던 코트가 제 색을 공개했다. 파랗다고 하기엔 너무 진하고 까맣다고 하기엔 묘한 빛깔이 감돌았다. 바다보다는 밤하늘. 그런 색.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원래부터 그런 모양을 가지고 태어난 듯이 자연스럽게 넘어간 머리카락과 날렵한 형태의 눈썹이 대비되어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인상을 만들어냈다. 눈매가 날처럼 길고 선명했다. 코도, 턱도, 얼굴도 다 비슷한 선을 가졌다.
그 남자다. 소현을 닮은.
구름이 해를 가렸다. 테라스가 그늘을 되찾아왔다. 지한은 움츠러들지 않으려 목에 힘을 주었다. 공기에 노출된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아났다.
#07
산을 가까이에 두고 마시는 공기의 온도가 차디찼다. 숨을 마시고 뱉을 때마다 코를 뚫고 체내로까지 파고드는 것 같았다.
도경을 초대한 별장 주인은 이곳을 오세아니아의 섬나라에서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에 살았던 집과 최대한 비슷하게 구현하느라 고생했다며 자랑했다. 그 섬은 미국에서 시골구석 취급받는 나라였다. 건축 디자인이나 인테리어가 구식인 것쯤은 그렇다 쳐도, 뒷마당에 가져다 놓은 조각품은 도저히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었다. 작품의 값어치는 창작자의 유명세에 좌지우지된다지만 겨울이라 꽃들이 다 시들어 죽고 없는 정원 한가운데 혼자 엉거주춤하게 선 자세의 남성 조각이 미적으로 공헌하는 부분은 어디 있단 말인가.
고약한 취향이 안팎으로 흘러넘치는 장소의 주인은 소현의 친구였다. 소현을 좋아했던 여자들이 그랬듯 별장 주인 역시 도경을 미워했다. 도통 그들의 심리를 모르겠다. 자기네들이 소현과 사귀고 싶었던 것도 아니면서 도경이 무슨 지랄을 하든 상관하지 못해 안달인지.
―소현이 없다고 친구들 하나도 안 보고 살 거야? 이럴 때 와서 애들하고 만나고 그래. 이안이도 오기로 했으니까 같이 내려오면 되잖아.
소현이 살아있었다면 오히려 안 왔을 자리다. 죽었기 때문에 왔다. 반드시 도경과 소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자리라서. 뭣 모르는 것들이 함부로 도경을 우스워하다 동정할 꼴을 떠올리니 도저히 오지 않고선 버틸 수가 없었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단 소리는 참을 수 있어도 바보가 되는 기분은 참기 쉽지 않았다.
테라스와 연결된 주방 쪽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커튼에 반쯤 가려진 유리문 너머로 손에 술잔을 하나씩 쥐고 웃어젖히는 몇몇이 보였다. 의자에 등을 기댄 도경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웃음을 멈추지 않는 인간 군상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머리 위로 각자의 사양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빈 와인글라스를 허공에 대고 흔들며 시끄럽게 떠드는 놈. C그룹 장손. 입주 교사를 붙였는데도 스카이에 못 들어가서 재수했다. 워낙 영향력 있는 집안 자식이니 100점 만점에 50점. 그 옆에서 50점짜리의 팔뚝을 때리며 웃는 년. D그룹 막내 손녀. 별로 뜨지도 못한 아이돌과 결혼하겠다고 설치다 조부를 기절시켰다. 그렇지만 대학은 잘 나왔다. 60점.
“형, 형.”
거실로 돌아가는 군상들과 달리 테라스로 기어 나오는 놈. B그룹의, 무려 열다섯 명의 손자 중 열셋째인 이안. 성적도 평균 이하, 실적도 평균 이하 하다못해 집안에서의 서열도 상위권 밖으로 탈락에 가까운 인간상이지만 도경은 인심을 쓰기로 했다. 70……, 80점. 왜냐하면 이안은 도경을……
“도경이 형.”
좋아한다고 표현하고 싶지는 않았다. 좋아한다니, 그런 것은 생각만 해도 성가셨다. 이안은 도경에게 충성스러웠다. 도경에게는 꽤 고사양의 인간이라 할 수 있었다. 말을 잘 들으니까.
“확실한 건 아닌데 내가 방금 들었거든.”
거실과 주방을 차단하는 문이 아예 열려 있었다. 다는 아니라도 도경의 자리에서 거실을 어느 정도 엿보는 것이 가능했다. 두 여자와 한 남자가 대화에 열중하는 중이었다. 당사자가 열 발자국도 안 떨어진 곳에 있으니 도경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 하는데 어째서 번갈아 가며 도경이 있는 테라스를 힐끔대는지 몰랐다.
“오늘 여기 걔 온대.”
거짓말이었다. 모르지 않았다. 도경의 이야기를 하느라 힐끔댄다고 보는 쪽이 더 그럴싸했다. 어찌 그리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지. 장례식에서도 경망스럽게 굴던 것들이니 어떤 상황에서인들 진중하게 굴 리가 없는 것이었다.
“아니지, 오라고 했대. 그니까 완전히 정해진 건 아니네. 지가 안 오면 그만이긴 하니까?”
고인에 대한 예의는 길바닥에 갖다 버린 무뢰배들처럼 군것만으론 모자라 아직도 떠들 거리가 남아있다는 점이 신기했다. 소현의 새 남자가 얼마나 잘생겼고 몸도 좋으며 어리기까지 한지, 그 남자에 비하면 도경이 얼마나 뒤떨어지는지에 대해 3일 내내 토론해놓고도 할 말이 남아있다니 감탄스럽기까지 했다.
이제는 무슨 주제로 떠드는 것인지 궁금했다. 소현 몫의 재산이 다 어디로 돌아갈지? 소현과의 관계 덕분에 집안에서 점수를 톡톡히 땄던 도경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대한 걱정?
“형 내 말 듣고 있어?”
사람들은 남을 쉽게 오해했다. 그랬다가 또 쉽게 풀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반복될 경우 오해는 오해에 머무르지 못하고 신념이 되었다. 그 단계에 가면 더는 아무것도 쉽게 풀리지 않았다. 수십 번 항변해봤자 물로 벽을 녹이려는 시도보다 더 가망이 없었다.
소현은 도경과 헤어진 뒤 새 남자를 만난 것이지 바람을 피운 것이 아니었다. 도경은 소현이라는 훌륭한 약혼자를 쟁취한 공로만으로 집안의 점수를 딴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노력하여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어느 순간 공공의 정신병자 취급을 받게 된 도경은 사실 평생 남들 보는 앞에서 언성 한 번 높여본 적 없었다.
그렇게 말하고 다녀봤자 아무도 안 믿어준다는 이야기였다.
도경은 정면을 보았다. 어느새 의자까지 빼고 맞은편에 앉은 이안이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떴다. 말을 무시당해 짜증 난 기색은 아니었다.
“말을 전할 때는 정확하게 해야지.”
소현의 친구라면 도경을 싫어한다. 그들 사이에선 그것이 순리이고 법칙이었다.
“걔가 누구고.”
그럼에도 많은 친구들이 모이는 자리에 도경을 초대했을 때는 그에 상응하는 목적이 있어 마땅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지.”
이안의 눈이 여러 번 빠르게 감겼다 열렸다. 곧 말귀를 알아먹은 그가 사과했다.
“어, 응. 미안. 내가 그게 기억이 안 나서.”
목적.
“기억?”
만에 하나 그 목적이 도경과 지한을 만나게 하는 것이라면.
“이름이 우 뭐였지. 지훈이었나?”
둘이 치고받고 싸우라고, 체면과 교양은 바닥에 내던진 채?
그 쉬운 이름 세 글자를 정말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물으려던 도경은 어떤 변화를 감지했다. 주위가 너무 조용했다. 사그라졌다. 별장 안에서 끊임없이 내보내던 대화와 웃음소리들이.
죽는 순간까지 진중한 고민은 해보지 못할 것이 확실시되는 면상을 마주한 채로, 도경은 기다렸다. 별장을 갑자기 침묵하게 만든 원인이 알아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공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문은 옆으로 밀릴 때 딱히 이렇다 할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래도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주방에서 테라스로 나오는 문을 열었다. 누가? 그야 보면 알게 되는 법이었다.
도경은 고개를 돌렸다.
테라스에 두 발을 내딛자마자 문 닫을 생각은 않고 굳어 서있는 남자의 몸에 걸쳐진 정장이 눈에 익었다. 몸의 윤곽을 드러내는 디자인과 벨벳 재질이 어우러진 그 옷은 도경이 매 시즌 스타일별로 하나씩 꼭 구매하는 브랜드의 것이었다. 어지간한 비율의 소유자가 아니고서는 굴러다니는 쿠션으로 보일 위험이 다분한 옷이, 큰 키만큼 다리도 긴 남자에게는 맞춘 듯 훌륭하게 어울렸다.
그림자 진 레드카펫처럼 어두운 벨벳에 감싸인 몸을 훑고 올라간 도경의 시선이 얼굴에 가닿았다. 둥근 듯 마냥 둥그렇지만은 않은 눈이 컸다. 다문 입이 작지 않아 보이며, 콧대가 유독 높아 보였다.
사진 속에서보다 더.
“누구세요?”
이안이 정적을 깼다. 줄곧 도경이 있는 방향에 고정되어있던 눈동자가 움직였다. 미동 없이 눈만 굴리는 모습이 마치 경계심을 최고치로 높인 짐승 같았다.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파악하려 애쓰기 시작하는. 초식동물이나 새끼짐승처럼 애처로운 눈은 아니었다. 생김새 자체도 연약함을 연상시키는 구석은 없었다. 세다? 강하다? 아니, 그런 것들보다도 뭔가 더,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사달을 내겠다는 느낌으로.
거칠다.
남자, 우지한이 눈을 세게 감았다 떴다. 이제 막 마취가 다 풀린 것 같은 반응이었다. 그가 택한 다음 선택지는 이안에게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도경이었다. 두 번째 시선의 마주침에 도경은 무엇인가를 직감했다.
아직 종류도 분명치 않은, 미세하고 약한 감이었다. 그러나 감은 미신이 아닌 과학이었다. 수십 년간 보고 먹고 만지고 맡고 들어온 데이터에 근거해 보내는 신호였다.
그의 감각들이 말했다. 무엇인가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어……. 혹시.”
이안이 재차 말을 건네도, 지한은 도경만 바라보았다. 적대감이 부재한 눈빛이었다. 그냥 보고 있었다. 도경의 얼굴을. 집중적으로.
“소현이 누나 장례식에 오시지 않았어요?”
왜?
자리에서 일어난 이안이 지한을 더 자세히 보려는 듯 고개를 앞으로 뺐다. 드디어 지한이 이안을 쳐다보았다.
“예.”
성대에 일부러 힘을 줘 긁는 것처럼,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생긴 것보다 더 투박한 목소리라고, 도경은 생각했다.
“저 기억 안 나세요? 입구에서 조의금 받았는데.”
아직도 갑작스레 등장한 남자와 오늘 올지도 모른다는 ‘걔’를 연결시키지 못한 이안이 거의 반갑다는 태도로 지한에게 다가섰다. 지한은 당황한 빛을 숨기지 못했다. 도경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여기까지 혼자 와놓고 뭘 그리 당황해하는지, 그의 상식으로는 선뜻 추리하기 힘들었다.
“아. 나요. 기억.”
“누나랑 일로 아시는 분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맞죠? 여기서 뵐 줄은 상상도 못 했네.”
이안이 의자를 빼 지한에게 오라고 손짓하며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그럼 B엔터 다니세요? 누나 후배 직원? 테이블 가까이로 온 지한은 의자에 바로 앉지 않고 망설였다.
도경은 혼란스러운 기분에 빠졌다. 첫인상은 분명 거칠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 사이 당황하거나 망설이는 모습이 두 번이나 포착되었다. 파악이 되려다 말았다.
“아니요.”
“그럼, 아. 배우예요?”
지한이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아니요.”
그쯤 되니 세상 걱정 없는 이안도 제가 눈치 없게 굴고 있다는 것을 안 듯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도경에게 도움을 요청하다 먹히지 않자 냅다 손부터 내밀고 보았다.
“그러고 보니까 저희 아직 인사도 안 했죠? 저 소현이 누나 사촌 동생이에요. 강이안.”
지한이 내밀어진 손을 맞잡았다. 이번에는 재는 시간이 없다시피 했다.
“우지한입니다.”
이안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지한과 악수한 제 손바닥을 한 번 들여다본 이안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기함한 빛에 뒤덮인 얼굴이 꼭, 눈앞의 남자가 지한인 줄 알았다면 악수를 청하는 일은 꿈꾸지도 않았을 거라고 항변하는 듯했다.
“형.”
더 놔뒀다간 이안이 입을 함부로 놀릴 것이다. 느리게 일어선 도경은 장갑을 벗었다. 산바람에 베인 맨살이 호소하는 고통을 무시하고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권도경이라고 합니다.”
그때까지도 앉지 않고 서있던 지한이 황급히 손을 포개어왔다. 몸처럼 길쭉한 손가락들이 도경의 손을 덮었다. 맞닿은 손바닥의 온도가 전해졌다.
뜨거웠다.
#08
대교에 들어서면서부터 차가 거의 앞으로 나가질 못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람들이 자는 시간만 빼놓곤 항상 최악의 정체를 맛보는 구간이었다.
이안은 핸들을 초조하게 두드렸다. 차체를 흔들리게 하는 비포장도로는 벗어난 지 오래이지만 그의 속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우지한입니다.」
듣는 순간 가물가물하던 이름이 기억났다. 그 남자가 지한이었다니. 이안은 장례식장에서의 지한을 똑똑히 기억했다. 이안 아니라 다른 누가 조의금을 받고 있었어도 그 얼굴은 잊지 못했을 것이다. 눈만 보면 진하고 예쁘게 생긴 것 같은데 콧대까지 같이 보면 잘생겼다는 인상이 더 강해지는, 아무튼 복합적으로 감명 깊은 외모라 저도 모르게 빤히 봤었다.
그런데 그게 지한이었다. 소현과 놀아났다던, 도경이 그토록 흔적을 찾아내려 애썼던.
「권도경이라고 합니다.」
도경이 지한의 멱살을 잡거나 시비를 걸 것이라고는 물론 기대하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나 흥분하지 않는 남자이니까. 통성명을 하고 악수를 나누는 것까지도 납득이 갔다. 별장 안의 사람들이 테라스에서 벌어지는 만남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둘 주방으로 오기 시작했으니. 이안의 어이가 증발되기 시작한 것은 별장 주인과도 알고 지내냐는 도경의 질문에 지한이 휴대폰을 꺼냈을 때부터다.
「이 번호 알아요? 이 사람이 여기 주인이에요?」
도경은 지한의 휴대폰을 받아 이안에게 건넸다. 이안의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지 확인해보란 것이었다.
“내가 아무 말 안 할라 그랬는데.”
결과적으로 지한을 초대한 장본인은 별장 주인이 맞았다. 이안이 번호를 확인해주자 도경은 지한에게 휴대폰을 돌려주며 별장 주인을 대신해 변명했더랬다. 이해해 주세요. 소현이랑 워낙 친했던 애라 아직 정신이 다 안 돌아왔을 수도 있어요. 도경이 황당한 짓거리를 하는 동안 이안은 애꿎은 산봉우리만 노려보고 있어야 했다.
“아까 그렇게 굴 거면 애초에 걔를 왜 찾은 거야? 나는 이해가 안 돼서.”
거기까지 말하고 멈췄다. 선을 넘고 싶지 않아서였다. 무반응이었다. 이안은 조수석을 힐끔거렸다. 바른 자세로 헤드에 머리를 기댄 도경의 눈이 감겨 있었다. 그러나 그가 끊이지 않는 엔진 소음을 배경음 삼아야 하는 차 안에서 푹 잠들 수 없는 사람이란 것은 이안도 잘 알았다.
“형, 자는 거는 아니지?”
내려가 있던 눈꺼풀이 번쩍 올라갔다. 자신이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린 후에도 도경은 천천히 눈을 깜박일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이안의 두피가 식은땀으로 후끈거렸다. 저러다 차를 세워달라고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강이안.”
사람들은 곧잘 도경을 언젠가 한 번 크게 발작하고 쓰러질 예비 환자로 여기지만 이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도경은 심각하게 예민한 사람일 뿐이었다. 때때로 목숨보다 자존심을 더 우선시하고, 눈이 뒤집히면 구급차를 부를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 올 때도 있지만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고비를 겪었다. 도경이 딱히 심하게 미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운전이나 똑바로 해.”
그러고 싶지만 역시 그냥 넘어가긴 찝찝했다. 소현의 친구들이 기대에 찬 목소리로 그 남자가 올지도 모른다고 떠들어댔던 것만 봐도 지한이 초대받은 이유는 도경이었다. 도경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서. 둘이 치고받기라도 하면 그만한 드라마가 따로 없을 테니까.
“누나들 보라고 일부러 그런 거야? 누나들이 쌈 붙일라 그래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니면 걔한테 왜 그렇게 잘해줬냐고? 싸울 필요 없다 쳐도 그게 잘 지낼 필요 있단 거는 아니잖아. 그리고 걔―.”
소현이 누나랑 바람피운 애잖아, 라는 소리까지는 차마 못 하겠다. 바람을 피운 것인지 아니면 이별하자마자 만나기 시작한 것인지 확실한 증거도 없을뿐더러, 도경에게 직접 그런 말을 했다가 역효과가 나면 책임은 고스란히 이안의 몫이었다.
“그럼 처음 보는 사이에 뭘 어떻게 해야 되는데. 인사 무시하고 대답도 하지 마?”
“그냥 처음 보는 사이가 아니었잖아, 이거는.”
“그래도 상관없어. 누구한테든 난 똑같이 해.”
“왜?”
묻고 나니 멍청하게 들리는 질문이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괜히 제 발이 저려 똑바로 못 쳐다보고 곁눈질했다. 이안을 보는 도경의 얼굴이 평소와 같았다. 딱히 표정이랄 것이 없었다.
“저녁이나 먹고 들어가자.”
도경이 고개를 앞으로 하며 말했다. 이안의 관심을 돌리려는 수법이었다. 알면서도 늘 당했다. 도경은 남과 식사하는 일을 즐기지 않았다. 그가 제안할 때 수락하지 않으면 언제 다시 기회가 올지 몰랐다.
뒤차가 클랙슨을 울렸다. 그새 앞차가 저만치 나가 있었다. 이안은 급히 액셀을 밟았다. 차가 다시 멈춰선 뒤 조수석을 보니 도경이 도로 눈을 감고 있었다. 노을이 날 선 얼굴 위에 색을 입혔다. 그만 날을 거두고 여길 좀 보라는 듯이.
도경은 눈을 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