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Try Out
#03
창밖이 온통 생생했다. 구름 몇 점 없는 하늘은 환한 볕을 내리쬐고 섬세한 손길 아래 자란 나무와 잔디는 싱싱한 원색을 뽐냈다. 앞마당이라는 프레임 속 모든 소품이 저마다 생기 넘치는 기운을 자랑하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들이 넘쳐나는 바깥으로부터 시선을 거둔 도경은 고요한 실내와 마주했다. 마당과 벽 하나를 사이에 뒀을 뿐인 거실에는 살아있는 것이 부재했다. 바닥에 깔린 대리석부터 짐승의 겉가죽을 벗겨내 씌운 소파 그리고 잘린 나무를 깎고 칠해 만든 찬장까지 전부 인공품이었다. 안락했다. 팔딱이는 생명력은 도경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날것들은 계산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계산을 위해선 값이 필요했다. 이안이 보여준 방명록에 우지한이란 이름은 없었다. 소현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자식이 아니었다. 재벌 손녀의 이른 죽음은 대중의 흥미를 유발할 요소가 다분했다.
부의금과 방명록을 맡았던 이안은 모든 조문객에게 빈소로 들어가기 전 이름부터 적게 했다고 한다. 이름을 적었더라도 기자로 보이는 사람은 쉽게 들여보내지 말란 집안 어른들의 당부가 있었다고.
도경이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그가 신경을 할애해야 할 대목은 조문객들이 직접 이름을 적은 방명록에 우지한이란 세 글자가 없었다는 부분이었다.
나도 아까 그 남자 봤어. 얼굴 하나는 제대로 골랐던데.
평소 도경을 정신병자라고 욕하고 다니던 년들과 줏대 없이 그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는 새끼들은 도경이 밖에 나갔다 돌아온 줄도 모르고 마음껏 떠들어댔다. 단순히 지한의 존재를 가십거리 삼는 내용이 아니었다. 당일에 두 눈으로 직접 지한을 보고 나서 하는 말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한 가지 가설로 귀결되었다.
방명록에 다른 이름을 썼다.
400개가 넘어가는 이름을 하나하나 체크했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속이려고 작정하고 쓴 남의 이름까지 알아볼 재간은 없었다. 게다가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본인과 연관 없는 이름을 갖다 썼을 것이다.
“형, 여기.”
달라고 한 적도 없는 주스를 굳이 주겠다며 들어간 주방에서 한참 돌아오지 않던 기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현이 건네는 컵 안쪽 여기저기에 주스가 튀어있었다. 주스 한 잔 깔끔하게 따르질 못했다. 도경은 약하게 미소 지어 보이며 생각했다. 머저리 같은 놈.
“어머님 아버님은?”
“엄마는 외할머니네 갔고 아빠는 울산 별장에 내려갔어.”
“오늘 너 혼자 있어?”
장례식을 치른 지도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었다. 소현의 부모가 어떤 연유로 어린 아들을 내버려 둔 채 각자 다른 곳으로 피신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들은 의도치 않게 도경에게 좋은 기회를 주고 갔다.
“별채에 아저씨들 계셔서. 완전 혼자 있는 건 아니야.”
뒷조사는 함부로 시작할 일이 못 되었다. 사람을 붙인다는 것은 제3자가 투입된다는 뜻이었다. 개입되는 머릿수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비밀유지는 점점 더 먼 이야기가 되었다.
도경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래도 여긴 너 혼자잖아.”
지한의 흔적을 찾아야 한다.
“괜찮아. 애도 아니고…….”
어떻게?
“내가 오늘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갈까.”
“어?”
“어차피 내일 반차라.”
기현이 거절할 타이밍을 놓쳤다. 사촌인 이안은 어설픈 잔머리라도 돌아가건만 기현은 그마저도 해당 사항이 없었다.
“어……. 진짜? 그럼 나야 좋지.”
미성년자인 기현에게 열 살 이상 연상인 소현의 친구들과 어울릴 기회는 없다고 봐야 했다. 그들에게 세뇌당해 기현마저 도경을 기피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면 지나가는 길에 들렀다는 말만 듣고 문을 열어주거나 지금처럼 감동한 듯이 감사 인사를 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기현의 방에서 하룻밤 자기로 했다. 도경은 손님용 방에서 자겠다고 했지만 기현이 기어코 제 방을 내줘야겠다고 우겼다. 두 번을 끝으로 그 이상의 사양은 하지 않았다. 두 번도 지겨웠다.
기현의 방은 한국 고등학생의 것이라기에 지나치게 깨끗했다. 도경은 소파를 손끝으로 쓸어내려 보았다. 먼지는 묻어나지 않았다.
그는 같은 층에 있는 소현의 방으로 관심을 옮겼다. 2층에 올라오자마자 본 소현의 방문은 닫혀있었다. 잠겼는지까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소현의 일가족이 사는 주택은 실외를 제외하면 현관과 1층 창가에만 CCTV가 설치되어있었다. 나가서 확인해보는 것도 무모한 짓은 아니었다.
문을 열고 나간 직후, 또 다른 가정이 도경을 붙잡았다. 죽은 약혼자의 방에 말없이 들어가 앉아있는 남자는 과연 다른 이의 눈에 얼마나 수상쩍어 보일 것인가. 선뜻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서있을 때,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났다. 기현이다. 이제 와서 방으로 돌아가기엔 늦었다. 도경은 짧게 호흡했다. 연인의 닫힌 방문을 바라보는 남자. 그 정도는 정상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소현의 방문과 도경을 번갈아 본 기현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퍼졌다.
“아, 맞다, 누나 방…….”
띄엄띄엄 말하는 투에는 죄스러운 기운도 소량 섞여있었다. 먼저 말해야 하는데 미처 챙기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는.
“혹시 형이 전에 두고 간 옷이나 물건 있으면 지금 챙겨. 장례식 끝나고 저 방에 아무도 안 들어가서 다 그대로 있을 거야.”
들어가도 된다는 허락은 물론이고 알아서 문까지 열어주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도경은 망설이는 척했다.
영영 주인이 돌아오지 않을 그 방에 내가 감히 함부로 발을 들여도 되겠냐고 의문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표정을 짓지 않을까, 상상력을 가동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기현이 오지 않는 도경을 돌아보았다. 최대한 느리게 발을 움직였다. 머뭇거리는 것처럼 보이도록.
방에 들어서서 제일 먼저 인지한 것은 향이었다. 도경은 이미 그 향을 알고 있었다. 여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남자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향수를 소현은 애용했었다. 그녀가 어지간한 남자들도 기피하는 향을 고집해온 이유는 하나였다. 도경에게서 항상 그 향이 풍겼으니까.
“도경이 형. 그…….”
두 명이 나란히 앉고도 남을 만한 사이즈의 책상 끄트머리에 탁상용 캘린더가 고독히 자리를 지켰다. 주인이 살아있었으면 무난히 다음 달로 넘어갔을 달력은 지난달을 벗어나지 못했다. 거의 모든 날짜에 표시가 되어있었다. 검은색, 파란색, 빨간색. 빨간색으로 표시된 날짜엔 무조건 메모가 따라붙었다.
“응.”
두고 간 물건이나 옷은 있을 수 없었다. 이별하기 전에도 도경은 소현의 집을 자주 방문하지 않았다. 기현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굳이 도경을 방으로 불러들인 행동은 일종의 호의인 듯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은 신경 쓰지 마.”
도경은 주인 잃은 달력의 페이지를 넘겨주었다. 전달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깨알 같은 글자들이 이 칸 저 칸에 적혀있었다. 호의라. 웃고 싶다.
“누나가 진심으로 좋아한 사람은 형밖에 없어. 난 알아. 나 고등학생이라도 누나 동생이잖아. 남들보다 내가 훨씬 더 잘 아니까, 그러니까.”
울고 싶다.
“기현아.”
네 누나가 살아 돌아온다면 내가 직접 모가지를 꺾어버리고 싶으니까 그만 닥쳐. 소현을 닮은 면상에 내던지고 싶은 한 마디가 눈앞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또 한 번, 도경은 특정 상황에 처한 사람이 지을 법한 표정을 그려보았다. 이번 역할은 유족에게 진정성을 인정받은 미망인이었다. 그 사람을 살릴 수만 있다면 제가 대신 죽겠어요, 그렇게 해서라도 살리고 싶어요. 미망인이란 자고로 그런 징그러운 소릴 줄줄이 읊고도 남을 심정이어야 마땅할 터.
침을 삼킨 그는 떨리는 한숨을 섞어 말했다.
“고맙다. 진심으로.”
기현의 눈가가 붉어졌다. 안 돼. 도경은 긴장했다. 평생 들을 울음소리를 소현의 장례식에서 다 듣고 왔다. 기현이 우는 즉시 뒷덜미를 낚아채 창밖으로 던져버리자는 마음의 소리가 커졌다. 경보가 울렸다. 마음이 머리를 이기면 반드시 삶이 피로해졌다. 축적된 경험을 통해 얻은 공식이었다.
그래서 돌아서 버렸다. 떠나간 소현이 생각나 괴로워하는 모습으로 착각해주길 바라면서. 다행히 기현은 착각했다. 도경을 혼자 내버려 두고 떠나주진 않았지만, 우려했던 것과 달리 울음을 터뜨리지도 않았다. 한숨 돌린 도경은 기현을 등지고 선 채로 소현의 책장과 마주했다.
맨 위 선반에 꽂힌 책들의 책등은 모조리 영문이었다. 딱히 눈에 띄는 사항은 없었다. 그 아래 선반은 한국어 소설책들이었다. 역시 특별한 점은 포착되지 않았다. 가장 공간이 넓은 맨 아래 선반엔 파일과 노트, 스테이플러로 집어 놓은 종이뭉치 등이 들쑥날쑥하게 꽂혀있었다.
파일이 여럿 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서만 밖으로 나와있는 종이가 도경의 이목을 잡아챘다. 두께가 석사 논문 뺨쳤다. 영어는 영어끼리, 한국어는 한국어끼리, 파일은 파일끼리 노트는 노트끼리 모든 문서가 분류되어 있는 책장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A4 종이 묶음의 정체는 무엇인가.
도경은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던 숨을 배출했다. 느리게, 아주 느려서 등 뒤의 기현이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조용하게.
#04
시침과 분침이 사이좋게 뾰족한 끝을 같은 방향으로 겨누고 있었다. 12. 하늘 한가운데 떠있을 해가 먼지에 가려 빛을 발하지 못했다. 바깥 공기가 어떻든지 간에 평소대로라면 집 안에서만큼은 평화로워야 할 시간이었다. 늦은 오후에 출근하는 시우가 깊은 잠에 빠져있고 지한은 점심 메뉴를 고민하는, 일상적이고 단조로운 한때.
분침이 1로 이동했다. 열두 시 일 분.
지한의 기분은 일상적이지도, 단조롭지도 못했다.
발단은 액자였다. 어젯밤에는 잠을 설쳤다. 깼다 잠들었다 하는 과정을 수십 번 반복하다 아침이 다 되어서야 기절하듯 눈을 감았다. 24시간 내내 누워있었던 것처럼 무거운 통증을 머리에 이고 나온 거실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첫눈엔 낯선 물건인 줄 알았다. 몇 초도 되지 않아 정체를 파악했다. 액자.
까만 틀 안에 담긴 것은 10년도 더 전에 찍힌 과거의 사진이었다. 사진에 나온 인물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보육원 출신들이었다. 제각기 다른 포즈를 취한 청소년들의 얼굴엔 팔자 좋은 웃음이 퍼져 있었다. 당시엔 얼마나 거지 같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선생들을 기겁하게 만들곤 했던 화려한 머리 색깔을 가진 사내 녀석들 사이에서 상석이나 다름없는 가운데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열네 살 때 이미 주먹으로 중3 선배까지 때려눕혔던 지한이 아닌, 그때나 지금이나 몸싸움엔 큰 소질이 없는 시우였다.
늘 그랬다. 시우는 싸움도 잘할 줄 모르고 공부도 보육원 애들 사이에서나 상위권이었지 학교에선 중간 턱걸이나 하면 다행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둘 이상 모이는 자리만 조성되면 거의 100프로 확률로 중심이 됐다. 가장 사랑받았다. 원장의 사랑. 원장 사모의 사랑. 선배들의, 후배들의 그리고 동급생들의 사랑. 사랑, 사랑…… 사랑?
다 부질없었다. 거지새끼들 사이에서 제일가 봤자 일반인들 발끝에도 못 미쳤다.
거슬리기 시작한 지는 오래고, 이제는 저것을 어떻게 없애버릴지 결단만 내리면 되는 단계였다. 참을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아예 기억에서 도려내고 싶었다. 액자를, 그 안에 든 사진을, 더 정확히는 그 사진 안에서 웃고 있는 새끼들을 모조리 다.
일차원적 충동이 지한을 사로잡았다. 사진을 빼야 한다. 솔직한 심정으론 액자와 함께 사진도 없애버리고 싶지만 남자 둘이 사는 24평짜리 아파트를 차지하는 집기 대부분이 시우의 소유였다. 사진도 당연히 시우의 것이었다. 그러니 일단 사진만 뺀다. 빼서 넘겨준다. 어디다 처박아 놓든 상관없으니 지한의 눈에 띄지만 않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 된다. 문제없다.
액자를 뒤집은 지한은 난관에 부딪혔다. 나무로 된 프레임 양쪽에 못으로 박아놓은 고리가 달려있었다. 고리를 제거하지 않고는 사진을 뺄 수 없었다. 고리. 못. 망치. 뭔가에 씐 듯 일어나 베란다 창고로 나갈 때까지도 자신이 제대로 된 망치질을 해본 적 없단 점은 전혀 지한을 멈추지 못했다. 망치를 가지고 거실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그에게는 오로지 하나의 목표만이 중요했다. 망할 놈의 사진을 얼른 꺼낸 뒤 액자를 부숴야 했다. 그렇지 않고선 눈에 걸리는 족족 다 으깨어놓고 싶어질 테니까. 그게 물건이든, 사람이든.
“뭐 해?”
머리통에 몰려있던 피가 마른 종이 위에 쏟아진 물처럼 전신으로 퍼졌다. 올라가 있던 어깨가 늘어지며 손에서 힘이 풀렸다. 자칫 놓칠 뻔한 망치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돌아섰다. 절대로 자신의 표정이 액자를 부수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리고 있었던 사람처럼만은 보이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거, 사진. 이게 왜 여기 나와 있어?”
나와 있어서 봤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고 변명하는 의미로 액자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망치는 여전히 손에 쥔 상태였다. 이미 시우는 지한의 손에 들린 망치를 봤다. 그래도 망치질을 시작한 뒤에 들킨 것보다야 열 배 나았다. 액자와 망치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있었다는 것만으론 지한의 의도를 의심할 수 없었다.
“아까 앨범 정리하다 찾았어. 밑에 깔려 있더라고.”
소파에 원상태로 눕혀진 액자와 지한의 손에 들린 망치를 차례로 훑은 시우의 시선이 들렸다. 지한도 피하지 않았다. 눈을 피하는 것은 발 저린 도둑놈이나 할 짓이었다.
“어디 걸어놓을 만한 데 있나 보려고 가지고 나왔다가 깜박 잊어버렸네.”
지한은 깜박이지 않는 시우의 눈을 쳐다보았다. 아주 얇아 주의 깊게 살펴봐야만 그 존재를 알 수 있는 쌍꺼풀. 연한 갈색 눈동자. 끝이 처진 눈매. 그리 생긴 눈은 언제든 다른 데서도 찾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 눈 덕분에 살던 날들이 있었다. 못나지도 잘나지도 않게 생긴 그 눈과 하루라도 마주치지 못하면 죽을 것 같다 느끼던 날들이 분명 있었는데.
“근데, 손에 그건 왜 들고 있어?”
벽에 몸을 기대고 비스듬히 선 시우가 턱으로 망치를 가리켰다.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사진을 보고 수가 틀려 망치를 꺼내 왔다. 시우라면 그쯤은 추측하고도 남았다. 그리고 딱 거기까지만 추측했을 것이다.
그게 늘 사태를 악화시키는 요인이었다. 스무 해를 서로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거기까지밖에 몰라서. 시우는 화난 지한이 무슨 짓을 할지는 눈 감고도 그릴 줄 알았으나 대체 왜 그렇게까지 화가 났는지는 몰랐다. 5년도 아니고, 10년도 아니고 무려 20년을 함께 한 뒤에도.
“내가 여기저기 좀 물어봤는데.”
시우는 대답하지 않는 지한에게 굳이 왜 망치를 손에 들고 있느냐고 재차 묻지 않았다. 대신 애초에 하고 싶었을 말을 꺼냈다.
“상담받는 거, 생각보다 안 비싸대. 초반에만 매주 나가고 나아지면 나중엔 약만 타러 다녀도 되고.”
상대를 설득시키기 위해 과장된 표정을 짓거나 물리적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방법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효과적으로 먹히는지 몰라도, 시우와 지한이 함께 사는 집 안에선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수중에 뭔가가 들려있는 상태의 지한과는 일정 간격을 유지해야 좋다는 것을 시우가 너무 잘 알아서였다. 지한에게 시우를 공격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고 없고는 중요치 않았다. 뭐가 어찌 됐든 지한은 무섭고 위험한 놈이니까.
“그 얘기가 왜 또 나와?”
지한은 언성을 높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시우의 예상을 빗나가게 해주려면 인내해야 했다. 네가 아무리 날 미친놈 취급해도 난 미치지 않았다고 증명하기 위해서는 소리 지르지 말아야 했다. 날뛰지 말아야 했다.
“또 나오는 게 아니라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 뼈 부러지면 외과 가고 감기 걸리면 내과 가는 것처럼 이것도 그냥 병 고치러 가는 거잖아.”
고작 이해받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고통스러워하지 말아야 했다.
지한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내가 이걸로 너 내려찍을까 봐?”
망치가 거실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제법 큰 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시우는 꼼짝하지 않았다. 속으론 어쨌는지 몰라도 겉으론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서있었다.
“지한아.”
순한 눈매와 살가운 말투로 남녀노소에게 전부 호감을 사는 시우가 실은 자신보다 훨씬 더 미친 것 같다고, 지한은 이따금 느꼈다.
“너 그러다 밖에서 칼 맞고 들어오면 나는 어떡하라고.”
“아 나 진짜 돌아버리겠네.”
결국 또 지고 말았다. 미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싶어 죽겠으면서 입으론 거친 말을 뱉고 몸은 머리보다 먼저 움직였다. 몇 평 되지도 않는 거실을 가로질러 시우의 바로 앞까지 온 지한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반 발짝만 더 다가서면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맞대게 될 것이다.
시우의 기대에 맞춰주고픈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지한은 손발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는 짐승이 아니었다. 손에 뭐만 들려주면 상대를 내려치도록 입력된 살상기계도 아니었다. 외부로부터 자극이 오면 참을성을 잃을 때가 있는, 계속해서 구석으로 몰리다 보면 감정에 이성을 빼앗길 때가 있는 인간일 뿐이었다.
“내가 칼 맞을까 봐 걱정돼? 칼은 이러다 맞는 거야.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너처럼 시비 털다가. 정신병원이 그렇게 좋으면 너나 가라, 어? 가서 네 머리에 어디가 망가졌길래 사람 말귀를 이렇게 못 알아듣는지 좀 알려달라고 해.”
말들은 입 밖으로 잘도 빠져나왔다. 수백 번 연습한 대사처럼. 시우가 눈을 내리깔았다. 툭하면 이미 했던 말을 또 해 지한의 성질을 건드리는 시우지만 닥쳐야 할 때는 귀신같이 구분했다.
지한도 알았다. 시우는 눈치 없지 않았다. 눈치 없인 5성급 호텔 바텐더 자리를 유지할 수도, 고객들의 선호도를 가질 수도 없었다.
미동 없이 한 자리에 서있는 시우를 그대로 지나쳤다.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은 후에야 지한은 약간씩 후회했다. 말이 지나쳤다. 그가 뱉는 말은 십중팔구 지나쳤다. 안다. 아는 것투성이다. 몰라서 실수하고 죄짓는 것이 아니었다. 힘들어서. 급해서. 억울해서. 분해서.
결국 다시 뒤돌아 문고리 위에 손을 얹었다. 사과해야 했다. 내일 또 싸우더라도 오늘은 미안하다고 하고 보는 것이었다. 매일 한 지붕 아래에서 몇 번이고 마주치는 사이에 이 이상 쌓아두는 것이 있어선 안 됐다. 어차피 지한의 속에는 새로운 감정을 욱여넣을 공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시우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한참 망설인 끝에 문고리를 막 잡아 눌렀을 때였다. 전화가 왔다. 문고리를 느슨히 잡고 있던 손이 자연스레 허공으로 떨어졌다. 광고 전화면 곱게 끊어주지 않겠다는 의지에 불타올라 확인한 화면에 떠있는 것은 통화가 아닌 메시지였다. 여러 개가 연달아 오는 바람에 휴대폰이 연속으로 진동했던 것이다.
[우지한 씨 번호 맞나요?] [지금 통화 가능하신가요] [제가 전화 드릴게요]
아무리 봐도 광고성 문자는 아니었다. 존댓말을 써가며 통화가 가능한 시간을 따질 만한 인물. 지한의 주변엔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의 연락처를 아는 사람 중 보육원 시절부터 알고 지내지 않은 이는 소현이나 그녀의 소개로 통성명을 한 영화업계 종사자 몇 명이 전부였다. 그녀가 죽은 마당에 대체 누가 예의를 갖춰 지한과 연락하려 드는 것인지 도통 짐작하기 힘들었다.
예고 없이 바뀐 화면이 생각에 잠겨있던 지한의 어깨를 들썩이게 했다. 까만 배경에 저장되지 않은 열한 자리 숫자가 떴다. 보통 그런 화면은 통화 종료를 누르게 하는 신호이지만 오늘은 달랐다. 발신자가 예의 있게 굴어서라기보다는,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여보세요.”
―우지한 씨?
여자였다. 그것도 젊은.
“누구세요.”
―저는 소현이 친구예요.
속 시원히 열리지 못하고 조금씩 틈만 늘려가던 문이 어느새 사람 하나는 거뜬히 통과시킬 만큼 벌어져 있었다. 벌어진 문틈으로 방 가까이에서 더 다가오지 못하고 멈춰있는 두 다리가 보였다. 통화 소리를 들으려고 온 것인지, 아니면 빌어먹을 정신병자 취급을 더 하려고 온 것인지 모를 시우가 지한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대꾸를 기다리던 여자가 다시 물었다. 이거 우지한 씨 번호 맞죠?
“네. 맞는데요.”
시우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찔댔다. 지한은 문고리를 잡아 앞으로 밀었다. 문이 닫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밖에서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05
졸지에 수능생의 방을 차지하게 된 도경은 소파에 앉아 벽에 붙은 전자시계를 보았다. ‘오전’이라고 쓰인 칸 옆에 숫자가 떠있었다. 02:00. 마지막으로 1층 기척을 살핀 것이 한 시간 전. 그때도 도경이 있는 기현의 방을 제외하곤 집 안 내 모든 불이 다 꺼진 후였다. 그래도 만일에 대비해 한 시간을 더 기다렸다. 다음날 학교에 가야 하는 기현이 도저히 자지 않고는 버틸 수 없을 시간까지.
물론 도경의 예측에 불과했다. 실상은 기현이 아침까지 뜬눈으로 밤을 새울 수도 있었다. 장 회장 부부가 기현을 임상심리사에게 보냈다는 이야기는 이안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도경을 소현의 방에 혼자 남겨두고 후다닥 사라지던 모습은 확실히 불안정했다.
기현이 조언을 구한다면 도경은 기꺼이 도와줄 용의가 있었다. 두뇌 회전하는 속도가 유인원보다 못한 놈이긴 해도 도경에게는 상당히 유용한 멍청이니까. 심리상담에서 정신과로 옮겨가게 된다면 병원에 빠지지 말라는 말부터 해주고 싶었다. 의사를 신뢰할 수 없을수록, 저 새끼 정신병원 다니는 미친놈이라고 수군대는 사람들이 싫을수록 꼬박꼬박 나가야 했다. 도경은 그렇게 했다.
의사에게 말 잘 듣는 환자란 인상을 심어주는 편이 유리했다. 그래야 약도 쉽게 탈 수 있었다. 그래야, 진단은 해도 수술은 못 해주는 의사를 기분 내키는 대로 이용하는 기분이 얼마나 즐거운지 알 수 있었다. 알아야 했다. 상대를. 상대의 강점과 한계를. 아는 자만이 이용할 수 있었다.
알아야만 이긴다.
도경은 탁상에서 리모컨을 들어 버튼을 눌렀다. 불이 꺼졌다. 넓은 방 안을 암흑으로부터 지키는 것은 이제 탁상 위의 작은 스탠드 하나였다. 글자를 읽기엔 충분한 밝기였다. 리모컨과 헤어진 도경의 손이 그 옆의 종이 묶음을 집어 들었다.
가제만 정해진 대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소현의 필체로 적힌 메모와 O/X 표시였다. 메모 습관은 소현과 도경의 차이를 가장 극명히 드러내는 예시였다. 도경은 개인적 감상이 드러날 만한 사항이라면 웬만해선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사적인 용무는 통화로, 그리고 가능하다면 면대면 소통을 선호했다. 기록이 언제 어떻게 되돌아와 뒤통수를 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소현은 정반대였다. 뭐든 병적이다시피 지나치게 기록했다. 실제 있을 스케줄부터 잠시 떠오르는 단상까지 자신을 스쳐서라도 지나가는 것이라면 빠트리지 않고 싶어 했다. 시키지도 않은 자발적 기록이라니. 스스로의 속내를 남들 보기 쉽게 종이로 프린트해 뿌리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펼쳐본 뒤 자세를 바로잡고 첫 장부터 제대로 정독하기 시작했다. 실제 배우들에게 건네지는 대본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도경의 눈에도 소현의 책장에서 찾은 종이 묶음은 투자자가 읽기에 최적화된 문서로 보였다. 여러 페이지를 차지하는 시놉시스엔 제작 의도와 줄거리뿐 아니라 주요 등장인물들에 대한 소개까지 자세히 나와 있었다.
소현이 남겨둔 흔적 덕분에 자연스레 어느 부분을 봐야 할지 알 수 있었다. 제일 처음 도경의 눈길을 잡아끈 부분은 등장인물 소개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등장했다. 빨간 동그라미가 쳐진 역할은 주인공들을 지나고 열 명이 넘어가는 조연들도 다 지난 다음의 맨 끄트머리에 있는 캐릭터였다. 심지어 이름도 정해지지 않았다.
단역: 태어나자마자 보육원에 버려졌다. 고아. 키가 크고 잘생긴 20대 청년. 주먹을 함부로 휘둘러 자주 사건·사고에 휘말린다. 운동계 경력이 있다.
단역치곤 엄청난 정성이 들어간 설정이었다. 극본 작가가 몇 분 나오고 말 인물에도 공을 들이는 타입이라서? 혹은 그냥 시간이 남아돌아서?
감독과 작가는 이미 세 편의 영화를 줄지어 흥행시킨 프로들이었다. 중요치 않은 단역에 디테일을 주고 앉아있을 사람들은 아니었다. 도경은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겼다. 빨간색으로 표시된 것은 점부터 글자까지 빠짐없이 눈에 새겨 넣으면서.
드라마와 액션 요소가 가미된 영화의 내용 자체는 도경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그의 집중력은 오로지 소현의 흔적을 쫓는 데에만 사용되었다. ‘대사가 너무 짧음’ ‘대사 추가 요망’ ‘여자 주인공에게는 더 부드럽게 말할 것’ 등 그녀의 메모는 전부 ‘단역’에게 매력을 부가하려는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그저 지나가는 줄로만 알았던 단역의 도움으로 악역을 굴복시킨 주인공들이 불안한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마지막 페이지에는 앞서 본 것들보다 확연히 긴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과거를 극복하고 정의롭게 재탄생하는 캐릭터. 클라이맥스에서 짧고 굵은 한 방. 성장. 극복. 구원. 마지막 인상은 무조건 긍정적이어야 함.
도경은 대본을 덮었다. 전개는 뻔하지만 감독과 작가의 이름값과 합해지면 망하진 않을 것이다. 시장성이 있다고 판단했으니 소현도 지한을 끼워 팔려 욕심냈을 터.
다만 의아한 부분은 이름도 정해지지 않은 단역의 설정이었다. 뭘 빼고 뭘 넣어달라는 식의 요구 사항만 잔뜩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탄생 자체를 소현이 시켰을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 없는데, 그녀가 만들었다는 전제를 충족시키기엔 너무 답지 않은 면이 많았다.
설정부터가 그랬다. 줄거리와 그다지 관련도 없는데 왜 굳이 고아로 설정해야 했을까. 순수 액션 영화도 아닌데 ‘운동계 경력’은 왜 넣었으며 ‘정의롭게 재탄생’해야 할 이유는 뭐란 말인가.
고작 단역 주제에. 가장 어처구니없는 대목은 소현이 대한민국 고아들의 복지에도, 불의를 참지 못하는 히어로 서사에도 전혀 관심 없는 여자였다는 점이다. 왜일까. 오래 숙이고 있었던 목이 뻐근했다.
대체 뭘 보고 영감을 받아와서 저딴 역할을 만들어냈지.
목을 양옆으로 한 번씩 꺾었다 폈다. 너무 오래 앉아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도경은 수십 번도 더 훑은 방 안을 다시 한번 훑었다. 침대. 소파. 탁상. 피아노. 벽장. 물건을 넣어둘 만한 공간은 벽장밖에 없었다.
나무로 된 문을 열자 도경의 옷장 절반도 안 되는 공간이 펼쳐졌다. 교복과 그리 다를 것 없이 생긴 셔츠들이 색깔별로 늘어져 있고, 안쪽으론 비닐에 감싸인 코트 몇 벌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공간을 만드느라 급히 내던진 흔적이 역력한 신발들 옆에는 박스가 쌓여 있었다. 하나도 아니고 세 개씩이나.
도경은 쭈그려 앉아 맨 밑 박스부터 살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글씨체로 ‘장례식장’이라고 쓰인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중간에 낀 박스에는 기현의 이름이, 맨 위의 박스에는 소현의 이름이 붙어있었다.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02:55. 박스 옆면을 잡고 살살 돌려 뺐다. 떨어져 큰 소리를 내는 일이 없도록.
박스를 열자 지갑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가방이 도경을 반겼다. 브랜드 로고가 낯익었다. 소현이 애용하던 브랜드였다. 앞면 뒷면 할 것 없이 가죽 표면 군데군데가 벗겨져 있었다. 누가 일부러 시멘트 바닥에 대고 간 것처럼. 비로소 박스에 붙어있는 스티커의 의미가 명백해졌다.
소현의 시신과 함께 수거된 물품들을 담아둔 박스였다. 당장에라도 손을 씻어야 할 것 같은 강박이 도경을 휘감았다. 참을 수 있었다. 그는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머지 물건들도 상태는 비슷비슷했다. 뭔가가 부서지면서 나온 가루 같은 것들이 묻어있거나 아예 찢어졌거나. 개중 자동차 리모컨은 모서리만 살짝 까지고 멀쩡했다. 피가 묻고 찢어져 집에 들일 상태가 못 되었을 옷가지는 보이지 않았다.
운전석만 뭉개졌다던 말이 사실이었던 듯 박스 바닥엔 조수석 글러브박스에서나 나왔을 물건들이 깔려 있었다. 알맹이는 온데간데없이 껍데기만 남은 선글라스 케이스와 보험 서류를 끝으로 박스가 비었다. 휴대폰은 나오지 않았다.
두 박스가 더 있었으나 그것들은 소현과 관련 없는 물건들로 찼을 확률이 높았다. 장례식장 박스는 장례식장에서 사용했거나 받은 것들로, 기현의 이름을 단 박스는 그의 소유물들로.
도경은 방바닥에 늘어놓은 물건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휴대폰을 찾지 못한다 해도 이상하게 여길 일은 아니었다. 사고 당시 산산조각 났을 수도 있고, 장례식이 끝난 뒤에 소현의 부모가 없앴을 수도 있다. 혹은 화물트럭이 운전석을 깔아뭉개던 순간 주인과 운명을 함께 했을지도.
「핸드폰은 잘 때 빼고 무조건 가방 안에 넣고 다녀야 속이 편해. 언제 어디서 떨어트릴 줄 알고?」
만인으로부터 너희 둘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결혼하겠다는 평을 듣기 위해선 상식을 뛰어넘는 공통분모가 필요했다. 불같은 사랑,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이해관계, 혹은 현대의학으로 완치시킬 수 없는 정신병. 도경과 소현은 같은 계열의 병을 공유하는 사이였다. 그렇기에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만큼은 그 어떤 변수 앞에서도 배신당하지 않을 줄 알았다.
사고 당시 얻은 가죽 표면의 흠집으로 잠시나마 도경을 소름 끼치게 했던 가방. 그는 브랜드 로고를 본뜬 금색 버클을 풀었다. 성인 남성의 손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가방이 직사각형 기기를 뱉어냈다.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너무 기대하지 말자고 최면을 걸며 휴대폰을 뒤집었다. 탄성이 나왔다. 소현의 휴대폰은 흠집 하나 나지 않은 멀쩡한 액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충전기에 연결한 휴대폰 옆의 버튼을 누르니 화면이 밝아졌다. 폐차 처리된 차 안에서 살아남은 휴대폰이 정상 작동했다. 기본 화면이 뜨길 기다리던 중 도경은 멈칫했다.
전원을 켜고 끄는 시간 또한 기록에 남았다. 누군가 파헤치고자 한다면 도경이 기현의 방에서 묵었던 날 소현의 휴대폰이 마지막으로 켜졌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과연 소현의 휴대폰 내부 폴더까지 뒤질 사람이 있을 것인가. 없다. 현재 기현의 상태라면 도경이 소현의 휴대폰을 유품으로 가지겠다고 해도 부모의 허락 없이 넘겨줄 태세였다.
무엇보다 소현은 교통사고로 죽었다. 유족이 휴대폰 전원 기록 따위에 관심을 가질 리 없었다.
상단에 통신사와 인터넷 연결이 뜬 화면은 도경에게 뜻밖의 복병을 소개했다. 비밀번호. 낙심할 거리야 되지 못했다. 지문 인식이었으면 시도 자체가 무용지물이었을 테니.
몸이 아닌 머리를 사용할 때였다. 마지막 순간에 소현의 곁을 지킨 물건들과 마주하고 앉아 도경은 생각에 잠겼다. 도경의 생년월일 네 자리. 스스로도 생각해놓고 헛웃음이 났다. 그딴 비밀번호는 중학생 때나 가능했던 이야기였다. 서른 살 먹은 소현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해야 도경을 최대한 요란스럽게 모욕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였다. 옛날 같았으면 인간 취급도 안 했을 길바닥 쓰레기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서까지. 그렇다면.
도경과 소현이 헤어진 날짜를 쳐보았다. 각 숫자 앞에 0을 붙여서. 실패.
그들이 헤어진 년도와 날짜를 쳐보았다. 두 자리씩 붙여서. 실패.
다시 생각해보았다. 날짜이긴 날짜일 것 같았다. 도경과 비밀번호를 공유했던 10대 시절엔 좋아하는 가수의 생년월일이 꼭 숫자로 들어갔었고 그 번호를 이안에게 들켰을 땐 숫자 부분이 애완견의 생년월일로 바뀌었었다. 20대가 되면서는 비밀번호를 공유하는 일이 없어졌지만 그 습관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몸을 일으킨 도경은 꺼냈던 물건들을 도로 박스에 집어넣었다. 맨 위에 가방까지 원래대로 올려놓은 다음 박스를 닫아 벽장 안에 되돌려놓은 다음,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밖으로 나갔다.
아침을 앞둔 겨울 새벽의 저택 안은 산속처럼 어둡고 고요했다. 반쯤 열어둔 기현의 방문 사이로 새어 나오는 스탠드 불빛을 라이트 삼아 낮에 들어갔던 소현의 방까지 살금살금 소리 없이, 잽싸게 들어갔다. 널따란 책상에 홀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달력을 손에 넣는 즉시 올 때와 같이 조용하고 신속히 방을 빠져나왔다. 저택은 여전히 산속 같았다.
기현의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나서도 도경의 심장박동은 한참을 비정상적인 속도로 뛰었다. 안정제를 먹은 지 채 여섯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지난 십 년간 목구멍 안으로 털어 넣은 약이 하도 많아 이젠 무슨 약을 먹어도 효과가 미미했다. 약은 무너진 근원을 복원시켜주지 않았다.
박동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도경은 소파에 앉아 달력을 넘겼다. 1월부터 12월까지 표시된 모든 날짜를 체크하다 보면 나오게 되어있었다. 소현이라면 분명히 표시해 놨다.
각종 경조사와 마감일, 페어, 회사 관련 기념일 등을 죄다 적어 넣은 박스들을 하나하나 다 읽는 일은 예상보다 더 높은 지구력을 요구했다. 5월에서 한 번, 10월에서 한 번.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에만 그쳤다. 도경은 포기하지 않았다. 우지한이란 세 글자를 찾으려 400개의 이름들이 적힌 방명록을 다 뒤졌을 때와 다르지 않은 의지가 도경을 12월까지 무사히 인도했다.
연말이라 유난히 빽빽한 달이었다. D미디어 미팅/무영 오빠 귀국/End of year party……. 지칠 줄 모르고 이어지는 스케줄의 행렬에 피로감이 느껴질 무렵, 도경은 눈을 번쩍 떴다.
일요일도 아니면서 빨간색으로 인쇄된 숫자. 25. 크리스마스라고 적힌 박스 안에 소현의 필체로 추가된 글자. JH 생일.
주머니에 재워뒀던 소현의 휴대폰을 꺼냈다. 비밀번호 네 자리의 입력을 요구하는 화면이 도경과 재회했다. 겨우 잠재워놓은 심장이 다시금 뛰는 속도를 높이려 들었다. 검지 끝을 신중히 액정에 가져다 댔다. JH란 이니셜이 적힌 날짜를 쳐보았다. 달과 함께 붙여서. 1, 2, 2, 5.
성공.
잠금이 해제되며 홈 화면이 떴다. 비밀번호를 풀었다는 만족감을 만끽할 새는 없었다. 도경은 몸을 밀착하고 선 남녀의 사진을 뚫어져라 보았다. 남자의 가슴팍에 기댄 소현은 살아있을 때 늘 그랬듯 화려하고 기운이 넘쳐 보였다.
소현의 풍성한 머리카락에 턱이 가려진 남자는 밝은 필터를 입혀도 소현보다 어두운 톤이 다 숨겨지지 않는 피부색을 가졌다. 패였다는 인상을 줄 정도로 짙은 쌍꺼풀도 그렇지만 그보다 더 눈길을 끌어당기는 부위는 코였다. 고개를 살짝 틀었을 뿐 완전한 옆모습도 아니건만 그 선이나 윤곽이 굉장히 뚜렷했다. 그만큼 높고 잘빠졌다. 활짝 웃고 있는 소현과 달리 남자는 이가 보이지 않는 정도의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것이 우지한이란 사실을 깨닫는 순간, 도경은 화면을 꺼버렸다. 죽은 약혼자의 휴대폰을 훔쳐보다 심장발작으로 쓰러진 채 발견되느니 혀를 깨무는 편이 나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