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Admission
#00
이제 권도경은 죽을 때까지 아무도 못 만날 거야. 소현이니까 받아줬지, 어떤 제정신인 여자가 그 성격을 버텨? 자기도 알았으니까 계속 소현이 붙들고 있었던 거지.
나도 걔들 헤어졌던 건 알아. 한두 번이야? 원래 그랬잖아. 오늘 헤어지고 내일 다시 사귀고 내일모레 또 헤어지고. 일 년? 그렇게 길게 헤어졌었나? 그럼 사고 안 났어도 어차피 끝이었네. 그래, 나도 소현이한테 새 남자 생겼다는 소문 듣긴 했어. 사실 근데 남들 보라고 소현이가 다른 남자 데려왔던 게 한두 번은 아니었으니까.
그때 기억나? 빌딩 몇 개 있는 집 아들 데려와서 결혼할 거라고 했을 때. 말만 안 했지 권도경이 테이블 엎을까 봐 얼마나 속으로 긴장했었는데. 나만 그랬어? 거봐. 다들 그랬지.
이건 절대, 절대로 내가 권도경 편을 드는 게 아니야. 그때 그 상황은 걔 아니라 누구라도 참기 힘들었을걸. 상상을 해봐라, 야. 나랑 결혼하기로 했던 애가 그렇게 수준 떨어지는 거 옆에 끼고 오면 그런 애랑 만났던 내 수준까지 떨어지는 거 아니야?
아, 물론. 소현이는 그걸 노리고 그런 거겠지. 권도경 거품 물라고. 진짜 보통 놈이 아니야. 어쩜 그렇게 표정 하나 안 변하고 끝까지 앉아서 그 꼴을 다 보고 가냐.
그래서 새 남자는 뭐 하는 애였대? 일 년 만났으면 뭐라도 있는 애였을 거 아냐. 잘생겼다고? 이 나이 먹고도 얼굴 따지고 싶어? 권도경을 봐. 그냥 정신병자잖아. 여기서 누구 권도경이 남편감으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 얼굴도 적당히 미쳐야 보이지.
뭐? 배우 지망생? 소현이가 일 년 넘게 만난 남자가? 배우도 아니고 지망생? 그거 연습생 같은 거 아냐? 진짜라고? 이거 권도경도 알아? 하긴, 알면 지금까지 여기가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겠지.
이 얘기 퍼지면 소현이 입관하기 전에 권도경이 먼저 머리 뚜껑 터져서 실려 나간다. 아무리 걔 머리 뚜껑 터지는 거 보고 싶어도 지금은 안 돼. 망자한테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자고.
그나저나 권도경은 아직 안 왔어? 안 보인다? 소현이 새 남자는? 어째 남자들이 우리보다 늦게 와. 아…… 그래. 차라리 권도경이 약 먹고 기절해있는 게 나아. 둘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우, 상상도 하기 싫다. 그런 소리 농담으로도 하지 마. 권도경은 진짜로 죽일 것 같단 말이야. 소현이를 위해서라도 우리 다 같이 입 닥치자.
살 때 조용하게 못 살았으니까 가는 길이라도 평화롭게.
#01
죽음에도 계급이 있다.
두껍고 높은 기둥과 넓고 반짝이는 창문들이 양옆으로 늘어선 건물 중심부에는 창문들과 똑같이 생긴 아치형 입구가 나있었다. 쉴 틈 없이 사람들에게 밀려나고 당겨지는 유리문은 놀랍게도 창문들에 뒤지지 않는 선명도로 주변을 비췄다.
기다란 삼각형. 생일 주인공에게 씌워주는 고깔모자처럼 생겼다. 그러나 유리에 비친 초록색 물체의 정체는 손질된 티를 물씬 풍기는 나무였다. 지한은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건물이라 해도 그 위에 붙은 글자들은 바뀌지 않았다. ‘장례식장’.
색만 다르고 딱 이렇게 생긴 궁전을 분명히 본 적 있었다. 영화 속에서. 누구는 1인실에서 태어나고 누구는 6인실에서 태어났다. 오는 장소가 아름다웠으면 가는 장소도 아름다운 곳으로 고를 수 있을 확률이 높았다. 길바닥에서 왔으면 그대로 길바닥에서 가버려도 아무 일 없었다. 그냥 끝이었다.
그러므로 소현과 지한은 둘 다 확률을 깬 자들이었다. 하루 입원비가 백만 원을 넘기는 병실 안에서 최고의 인력들에 둘러싸여 태어났을 소현은 자신의 마지막 가는 길이 펼쳐질 곳을 택하지 못하고 죽었다. 유럽 어딘가의 성을 연상시키는 2층짜리 건물은 살아생전 소현의 취향에 비해 너무 고풍스럽고 으리으리했다.
물론 그녀의 취향은 더 이상 중요한 것이 못 됐다. 요점은 그녀가 죽었다는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숨이 끊어졌어도 문제없었을 지한은 아직 살아있는데. 죽을 때까지 버림받을 일 없었을 소현이 먼저 마지막 길 위에 올랐다. 살아있었다면 좋아하기는커녕 촌스럽다고 질색했을 법한 곳에서.
“어떻게 오셨어요?”
코끝을 찡그린 지한은 고민했다. 그러게. 내가 여기 어떻게 왔을까. 소현과 지한은 단 한 번도 연인이었던 적 없다. 마음 통하는 친구였던 적 또한 없다.
“일 때문에 알고 지냈었습니다.”
“아아.”
궁금해서 물은 것이 아니란 듯 건성으로 끄덕인 남자가 종이를 넘겼다. 먼저 온 조문객들의 이름으로 가득 찬 페이지가 사라지며 깨끗한 페이지가 펼쳐졌다. 이름을 꼭 써야 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당황스러웠다. 지한에게 조문 예절을 알려준 이가 틀렸을 수도 있다. 지한과 그의 주변 인물들은 아직 장례식에 익숙한 나이가 아니었다.
고민이 길어지면 의심을 살 것이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남의 이름을 두 글자까지 적었다가, 세 번째 글자를 다르게 바꾸었다. 부의함과 방명록을 지키고 서있는 남자의 시선이 종이 위에 세로로 쓰인 세 글자를 빠르게 훑었다.
남자가 지한을 쳐다보았다. 아주 짧게, 지한은 남자의 눈에서 따가운 빛이 난다고 생각했다. 찰나에 불과했다. 다음 순간 남자는 처음의 성의 없는 모습으로 돌아갔다. 곤두선 신경이 불러일으킨 망상이었으리라고 넘겨짚었다.
샹들리에가 달린 로비에서부터 예상은 했지만, 방이 몇 개인지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빈소의 크기는 발걸음을 절로 처지게 했다. ‘입식 접객실’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방에서 여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방의 이름을 확인하고 눈을 내린 지한은 그에게 집중된 이목과 맞닥뜨렸다. 제일 가까이에 서있던 여자가 퍼뜩 정신을 차린 후 짧게 묵례하고 돌아섰다. 나머지 여자들도 따라 사라졌다.
소현의 영정이 있는 분향소 문턱을 넘기까지 지한은 몇 번 더 같은 경험을 했다. 그를 발견함과 동시에 하던 것을 멈추고 필요 이상의 시선을 주는 이들은 하나같이 여자들이었다. 소현 또래의.
바보가 아닌 이상 지한도 자신이 튀는 외모를 가졌다는 것은 알았다. 그런데 소현 또래의 여자 조문객들에게선 지한을 향한 이성적 호기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일단 장례식에서 번호를 물어볼 조문객은 드물었다.
오지 말았어야 할 자리일지도 모르겠다.
분향을 마친 지한에게 상주가 맞절했다. 팔뚝에 완장을 찬 상주의 얼굴이 앳됐다. 상주는 지한을 모르지만 지한은 상주를 알고 있었다.
공부에도 소질이 없고 야망도 없어서 계열사나 물려받으면 다행이라던 소현의 남동생. 눈이 퉁퉁 부었다. 누나가 자길 어떻게 평가했는지 알면 눈물이 쏙 들어갈 텐데.
못된 마음은 상상을 끝으로 접었다. 평가는 그렇게 했어도 동생의 시험일이며 생일을 빠트리지 않고 챙겼던 소현이다. 저런 인간도 핏줄은 아끼나 보구나, 그게 그렇게 신기했었다. 어린 상주는 난생처음 보는 지한에게 누구냐고 묻는 대신 눈을 내리깔았다. 지친 기색이었다.
분향소를 빠져나온 지한은 복도에서 서성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가버리기엔 그래도 사람이 죽었는데 너무 성의 없나 싶고, 그렇다고 한없이 머물기엔 처지가 마땅찮았다.
만일 누가 소현과 정확히 어떤 관계였냐고 물어보기라도 한다면? 준비한 거짓말이 생각보다 훌륭하게 나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애초부터 없었던 부모는 제쳐두고, 매니저 비슷한 것이라도 있었다면 물어봤을 것이다. 스폰서 장례식에 가는 짓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간다면 얼마나 있다 와야 적당한지. 하지만 그런 질문을 하려 주위를 돌아보니 마땅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놀랍진 않았다. 지한의 삶엔 멀쩡한 어른이 있었던 적 없다.
복도로 작은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한과 눈도 마주치지 않던 상주가 마침내 우는 모양이었다. 고등학생의 울음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문득 궁금해졌다. 소현이 물처럼 흘려보내던 돈이, 장난감처럼 휘두르던 아랫사람들이, 게임 보드 위의 가짜 땅처럼 쉽게 사들였던 부동산이 다 어디로 날아갈지. 큰돈 만지고 싶으면 일단 유명해지고 봐야 한다고 했던 소현이 죽어버린 지금, 지한이 예정대로 스크린 데뷔를 할 수 있을지. 스폰서를 잃은 무명에게도 과연 줄이 남아있을지.
바지 뒷주머니 안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지한은 바로 전화를 받지 않고 화면에 뜬 이름을 바라보았다. 이시우. 방명록에 앞 두 글자를 빌려 적은 이름.
“어.”
―어디야? 일어났는데 집에 없어서.
매일같이 반복하는 내용을 읊는 목소리가 차분했다. 지한은 몸을 돌렸다. 분향소가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상주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간 시우의 의심을 사기 쉬웠다.
“일이 생겨서 잠깐 나왔어.”
―일? 무슨 일?
“체육관 애들이 만나자 해서.”
―걔네가 갑자기 왜? 연말도 아닌데.
툭하면 패기가 없다고 욕하면서도 동생을 챙기는 소현이 신기할지언정 가식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지한에게도 그런 상대가 하나 있기 때문이었다.
소현이 같은 배에서 태어난 혈육을 챙겼던 것처럼 지한을 챙기는 사람. 피 한 방울 안 섞인 시우가 지한에게 그만큼 헌신적일 수 있다면 피가 섞인 사이엔 얼마든지 더 사랑할 수 있으리라. 지한으로선 평생 추측밖에 할 수 없는 관계지만.
“내가 어떻게 알아.”
―그래도 만나자고 하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글쎄 그걸 내가.”
비명에 가까운 울음소리가 터졌다. 급히 휴대폰을 아래로 내려 봐도 이미 늦었다. 일단 종료 버튼을 눌렀다. 장례식장에서 나는 소리를 계속 듣게 하느니 차라리 실수로 껐다고 하는 편이 더 나았다.
어린 상주가 엎드려 울고 있었다. 어른 몇이 붙어 달래보지만 그럴수록 울음소리는 커질 뿐이었다. 무너진 상주의 앞에는 그와 상반되는 꼿꼿한 자세의 조문객이 서있었다.
부모는 당연히 아니고, 집안 어른이라고 보기에도 너무 젊었다. 사촌? 친척? 소현과의 관계를 짐작하기 어려운 남성은 미동 없이 상주를 내려다보았다. 그 기이한 광경이 지한의 시선을 앗아갔다.
“들어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쟤 괜찮은, 어머. 왔어.”
“진짜 왔어? 어. 진짜다. 왔어.”
“마주치기 전에 나가 있을래, 우리?”
젊은 여자들의 말소리가 지한을 일깨웠다. 더 많은 사람 눈에 띄기 전에 나가야 했다. 가르쳐주는 어른 없어도 그 정도는 스스로 깨우칠 수 있었다.
빈소를 완전히 빠져나온 지한은 로비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확인했다. 메시지가 와 있었다.
[전화가 갑자기 끊겨서 다시 걸었는데 안 받네. 내 폰이 이상한가 봐 네가 전화해줘]
시우의 휴대폰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지한이 누굴 때리고 들어와도, 뼈가 부러진 피해자에게 줄 합의금이 없어 빚을 져도, 심지어는 얼마 없는 집기를 다 부숴 먹어도 똑같이 말했다. 그 사람이 술에 많이 취했었나 봐, 네가 많이 힘들었나 봐, 내가 말을 잘못했나 봐.
지한이 네 잘못이 아니야. 너는 아픈 거야. 치료할 수 있어.
숨이 약간 가빠졌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지한은 공기를 최대한 깊이 들이마셨다. 종종 겪는 현상이었다. 시간이 최고의 약이란 것은 경험을 통해 배웠다. 없는 인내심이라도 쥐어짜지 않으면 꼭 사고가 터졌다.
숨을 마시고 뱉는 간격이 정상으로 돌아온 그는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시끄러운 공간에 앉아서 안정을 찾으려 했는지 깨달았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 나가는 사람들, 길 잃은 조문객들을 안내하는 직원들 등 온갖 이들과 그들이 내는 소리로 뒤덮인 로비에서 특정 소리를 구분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런데 자꾸 어떤 소리가 귓가를 비집고 들어왔다.
지한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눈앞이 보이면 사라질 환청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눈을 떠도 그 소리는 멎지 않았다. 그의 귀는 잘못되지 않았다. 한 시간에도 수십 수백 쌍의 신발을 받아낼 바닥이 유독 힘겹게 튕겨내는 구두 굽이 있었다.
그 많은 소음을 뚫고 나와 혼자서만 도드라지는 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고개를 들었다. 오른쪽. 소리는 오른쪽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지한도 오른쪽에서 나왔다. 소현의 빈소가 있는 쪽.
남자를 발견했다. 첫눈에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났다. 두 다리를 움직여 멀쩡히 걷고 있는 남자의 어디가 그리 자연스럽지 못한지를 지한은 곧 알아차렸다.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동하느라 주위에 관심을 줄 여력이 없어 보이는 남자가 누굴 상기시키는지도.
조문객답게 시커먼 옷으로 도배를 하고 오면서도 머리 세팅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을 몇 시간 전이 눈앞에 그려지는 남자는 소현을 닮았다. 언제 어디서든 머리부터 발끝까지 깔끔하게 완성된 모습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강박의 향기.
소현과 남자의 공통점은 또 있었다. 체취마저 감미로우리라 지레짐작하게 되는 겉모양새. 아름답다.
눈이 마주친다.
그제야 지한은 남자를 알아보았다. 그 남자였다. 몸을 웅크리며 오열하는 상주 앞에서 끝까지 목을 빳빳하게 펴고 있던 조문객. 끝이 길게 찢어진 눈에서는 놀랍도록 아무런 기운도 풍겨나지 않았다.
차갑다, 따듯하다, 슬프다, 힘들다 하다못해 짜증 난다는 빛조차 없었다. 오래 마주치고 싶은 눈빛이 아니라 느끼는 순간 남자의 눈이 앞을 보았다. 몇 초로 끝난 시선의 교환을 통해 지한은 남자가 자신을 한 사람이 아닌, 로비라는 풍경 속 사물 중 하나쯤으로 인식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지나친 비약이었다. 그는 꽤 자주 타인의 의도를 넘겨짚었다.
빠르고 일정한 보폭으로 목적지까지 걸어 나가는 남자의 낮은 구두 굽이 만들어내는 둔탁한 소음에마저 규칙적인 박자가 있었다. 문이 열렸다. 남자는 밖으로 나가서도 속도를 유지하며 걸었다. 지한은 눈을 감았다.
숨이 또 가빠졌다.
#02
현관이 완전히 닫혔음을 알리는 전자음이 멎어들 때까지 기다린 도경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집 아닌 곳에서 이틀을 내리 잔 여파로 목과 어깨가 쑤셨다. 양옆으로 목을 꺾는 시늉이라도 하고 싶지만 참았다. 아직은 온전한 자유의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천장에 달린 CCTV를 노려보았다. 아파트 내에 카메라가 달린 구역은 신발장 딱 한 군데였다. 그곳을 벗어날 때까지는 숨도 함부로 쉬지 않는 것이 그만의 규칙이었다.
타이와 재킷을 벗어 드라이클리닝용 바구니에 넣고 거실로 돌아와 집을 비운 3일간 달라진 것은 없는지 확인했다. TV도 그대로, 소파도 그대로, 커피테이블도 그대로, 그 위의 리모컨 둘도 그대로. 방심은 일렀다.
다섯 개의 방과 두 개의 욕실이 남아있었다. 습관대로라면 어딘가에 엉덩이를 붙이기 전 집 안의 모든 공간이 원상태를 유지하고 있는지 직접 두 눈으로 마땅하나, 며칠간 쌓인 피로가 자꾸 발목에 감겨들었다.
결국 소파에 걸터앉았다. 잠시 쉬기로 했다. 에너지가 보충될 정도로만. 아주 조금만.
몸에게 짧은 휴식을 주기로 한 대신, 도경은 머리를 작동시키기 시작했다. 타고나길 평온이나 안식에 적합한 유전자가 못 되었다. 한시라도 무엇인가를 하고 있지 않으면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설계되었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움직이는 행위가 그를 살렸다.
하여 움직이지 않는 상태의 그는 생각했다. 일 년 만에 시체가 되어 나타난 소현을. 아마 아는 이가 없을 텐데, 며칠 뒤면 그들이 헤어진 지 정확히 일 년이 되는 날이었다. 트럭 운전사가 며칠만 더 늦게 소현의 뒤에서 졸음운전을 했다면 정말로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이별 일주년을 맞이해 시체로 돌아오는 옛 연인. 그런 종류의 극적이고 기괴한 재회.
어찌 되었든.
시체에는 관심 없었다. 죽은 소현은 도경에게 잘못했다고 무릎 꿇고 빌 수 없었다. 사죄의 의미로 도경이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을 사다 바칠 수도 없고 양가 어른들과 지인들에게 떠벌려놓은 대로 당당히 결혼식을 올릴 수도 없었다. 죽었으니까.
따라서 도경의 관심은 살아있는 쪽으로 갔다.
헤어진 상태로 보낸 일 년. 도경은 일 년이 길었다고 여기지 않았다. 소현과 도경에게는 10년을 훌쩍 뛰어넘는 역사가 있었다. 10년? 그들은 다섯 살 때부터 한 유치원을 다녔다. 벌써 서른이었다. 다시. 그들에겐 25년의 역사가 있었다. 10년은 그 역사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일 년은 그들 알고 지낸 세월을 절반으로 나눈 다음 다시 열로 나눈 것 중 하나에 불과한 조각이었다. 고작 그만큼을 이별해 있었다고 해서 결혼하지 못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 도경 본인을 포함한 모두가.
그런 줄 알았다.
소현은 써먹을 데 없는 인기가 많았다. 초등학생 때부터 남자애들보단 여자애들이 훨씬 더 많이 꼬이는 희한한 타입이었다. 그 성가시기만 하고 써먹을 데 없는 인기를 소현은 자신의 성격이 좋다는 증거쯤으로 여겼다.
짧지 않은 세월이 지나는 내내 도경은 줄곧 그 모든 인연들이 철저히 비즈니스라 믿어왔다. 그의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주제에 소현만 보면 멋지다고 추켜세우는 척하던 인간들은 그녀의 시체가 누워있는 장례식장까지 와서도 쓸데없는 소리만 지껄이다 갔다.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다. 이전부터 소현은 도경과 헤어지면 얌전히 돌아오는 법이 없었다. 매번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여줘 도경의 귀에까지 그 소식이 전해지게 하는 의식 없인 돌아오지 않았다.
도경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단 메시지였겠지만 솔직히 효과는 미비했다. 어디서 그런 수준 떨어지는 등급들로만 골라 오는지, 도경을 도발하려 일부러 벌이는 짓거리란 것이 너무 노골적이라 별로 화도 나지 않았다. 나중에는 꾸준히 2, 3등급들만 감별하는 솜씨에 박수를 쳐주고 싶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아까 보고 나 깜짝 놀랐잖아. 왜 아직까지 데뷔를 못 한 거래? 어쩜 그렇게 생겼어. 사람 같지도 않더라.
소현이 도경에게 남기고 간 유산은 고약하기 짝이 없었다. 죽을 줄 몰랐겠지. 분명 몰라서 그랬을 것이다. 알았다면 기어서라도 도경에게 돌아와 쥐어짠 마지막 힘으로 빌었어야 한다.
미안해, 세상 다 뒤져도 너보다 나랑 격이 맞는 남자는 없더라, 내가 멍청했어. 나를 용서해줄 거지, 도경아?
그러나 소현은 교통사고로 횡사할 스스로의 운명을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에 도경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했기에 늙으면 다 쭈그러들 겉가죽 말곤 내세울 것 없는 싸구려를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갔다. 따질 필요도 없었다. 소현의 죄질이 가장 나빴다.
부모님한테 인사시키려고 했다는 게 진짜야? 설마. 권도경 놔두고?
왜 하필 골라도 마지막에 제일 질 떨어지는 걸 골라서.
아니, 아니, 아니. 아무리 혼잣말일지라도, 도경은 자신이 방금 머릿속에 새겼던 문장을 지웠다. 이미 아는 바를 묻는 짓만큼 시간 낭비도 없었다. 소현은 일부러 어처구니없는 남자를 고른 것이었다. 도경의 자존심을 너덜거리게 만들어 절로 찢어지게 만들려고.
도경에게 자존심은 방치해도 알아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발버둥 치고, 발악하고, 때로는 발작까지 해가며 키우고 지켜내야 하는 대상이었다. 25년간의 역사를 공유해온 소현이 제일 잘 알던 바였다. 그래서 일부러 벌인 짓이었다. 안 그래도 튼튼하지 못한 도경의 성벽을 무너트려 놓으려고.
하긴. 나 같아도 돈 많은 미친놈보단 예쁜 무능력자가 낫겠다. 말도 잘 들을 거 아냐. 돈이야 내가 주면 되지.
다 찢어서 죽여 버리고 싶다. 한 치의 과장 없이 진실만을 담아 도경은 염원했다. 이년 저년 이 새끼 저 새끼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새로 생긴 남자를 자랑하고 다닌 소현과 주제 파악 못 하고 데리고 다니는 대로 끌려다닌 싸구려. 둘 다 죽이고 싶긴 마찬가지지만 이왕이면 소현을 더 오래 살려두고 싶었다.
트로피로 데리고 다니던 새끼 얼굴을 곤죽으로 만들어서 앞에 던져주는 것이다. 나 거품 물라고 이 새끼 얼굴 자랑하고 다니니까 좋든, 소현아? 거품은 네가 물고 있네.
그쯤만 해둔 뒤 시체와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라고 놔두면 알아서 심장마비로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된다면야 금상첨화였다. 손 안 더럽히고 좋잖아……. 도경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이미 죽었지 참.
피투성이로 쓰러진 남자와 그 앞에서 거품을 문 소현이 담배 연기보다 더 허무하게 증발했다. 한 번 죽은 인간을 또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실현 불가능한 상상은 길게 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실행할 수 있는 상상만 하기에도 시간은 촉박했다.
도경은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외면했던 휴대폰을 꺼냈다. 안 읽은 메시지들을 무시하고 쭉 올라가 맨 위에 뜬 대화창을 눌렀다.
[형 어디야?] [갔어?] [커피 마시고 같이 올라가자 할라 그랬는데] [집 도착했어?] [자?]
답 없는 상대에게 보낸 것치곤 일관되게 씩씩한 메시지들을 짧게 훑은 뒤 전화를 걸었다. 경쾌한 무곡은 5초를 넘기지 못하고 끊겼다.
―어, 형. 안 잤어?
“어디야.”
―지금 막 서울 올라왔어. 왜? 형은 어딘데?
쓸 데 있는 고민. 즉 계산이다.
후보 1. 도경이 주는 돈으로 먹고사는 동안만큼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충성을 유지할 부하 직원.
후보 2. 받는 것 없이 평생 도경의 반경 안에서 얼쩡거려온, 피로도 돈으로도 엮이지 않은 남의 자식.
둘 중 어느 쪽이 더 안전한가.
계산은 싱겁게 끝났다. 물질을 주는 대가로 얻는 충성은 조건부였다.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는 자가 나타나는 순간 소멸할 운명이었다.
“네가 계속 조의금 받았어?”
무조건적으로 매달리는 상대는 눈이 뒤집히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불안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이 케이스는 약간 달랐다. 알고 지낸 25년 동안 소현이 한결같이 악의에 가득 차 있었다면 이안은 꾸준히 아무 생각도 없었다. 어떻게 봐도 명석하진 않았다. 멍청할수록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어?
꾸물거리는 이안의 태도에 도경은 잠시 후회했다. 지금은 구슬릴 때지 다그칠 때가 아니었다.
“장례식에서. 네가 조의금 받았잖아. 누구랑 번갈아 가면서 했나 하고.”
―아. 아니, 나 혼자 했어.
“밤에도?”
―나 잠깐 자러 들어갔을 때만 형들이 번갈아 가면서 봐줬어. 새벽엔 사람 별로 안 왔다던데. 누나 대학 동기들이랑…….
소현의 동기들부터 회사 직원들까지, 필요 없는 이름들의 나열을 끝까지 들은 도경은 침착하게 물었다.
“그 남자는 언제 왔어?”
―뭐라고?
“장소현이 만나던 남자.”
이안이 뜸을 들였다. 짧은 침묵이었지만 분명했다. 그는 도경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건 형이잖아.
“우리 집 개도 안 믿을 소리를 왜 하는 거야?”
차분한 어투와 달리 과격해지는 내용에 도경의 심경을 눈치챈 이안이 작전을 변경했다.
―누나가 형 말고 누구 만났다고 해도 나는 잘 몰라. 내가 뭐 누나 친구도 아니고,
“이름 우지한.”
일 년간 소현이 마음껏 별 시답잖은 남자와 만나고 돌아다녔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도경이 아무것도 몰랐으리라 짐작하고 그를 등신 취급하는데, 그런 이들이야말로 싸울 줄 모르는 등신들이었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소현이 웬 데뷔도 못 한 놈을 유명 영화감독에게 인사시켰음은 물론이요, 제작비 150억짜리 차기작에 그 무명을 단역으로 출연시키려 한다는 소식까지도 남들보다 몇 발 앞서 들었다.
소현을 기쁘게 하지 않으려 모르는 척했을 뿐 도경은 한순간도 뒤처진 적 없었다. 그런데 고작 이름 석 자 좀 댔다고 놀라는 시늉이라니.
그는 가끔 세상이 다 하찮았다.
―그런 이름 못 본 것 같은데.
“와서 이름 적은 조문객들을 다 기억해? 거의 다 처음 보는 사람들 아니었어?”
―그렇지……?
“방명록 누가 가지고 있어?”
―그거, 어, 악. 저 박스 기현이 주는 거 깜박했다. 아 씨.
차량과 연결된 휴대폰을 통해 운전석에서 부산떠는 소리가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도경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같이 저녁이나 먹을까.”
―어? 어. 좋아. 언제 볼래. 토요일?
“오늘.”
―오늘? 지금?
“아. 네가 너무 피곤한가. 그러면 관둬.”
―아냐!
다급히 외친 이안이 얼른 못을 박았다. 갈게. 어디가 좋아? 뭐 먹을 건데? 도경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우리 집으로 와.”
그는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웃어 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방명록 가지고.”
이안을 기다리는 동안 도경은 아까 확인하지 못한 방들을 차례대로 돌았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섯 방과 두 욕실 전부 떠나기 직전 봤던 것 그대로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안도감이 몸과 마음을 진정시켰다.
벽 한 면을 다 뒤덮은 유리창에 빛을 잃어가는 하늘이 가득 들어찼다. 구름 위로 어떻게든 고개를 내밀고 있으려는 저녁 하늘의 해는 죽기 전 한 마디라도 더 남기려는 인간처럼 애처로운 면이 있었다. 망상이었다. 해는 다음 날 곧장 다시 살아나지만 인간은 천 년을 기다려도 부활하지 못했다. 인간이 훨씬 더 애처로웠다. 불쌍했다. 구질구질했다.
도경은 그저 몇 가지 질문이 있을 따름이었다. 소현이 혼자 죽어버리는 바람에 시체에다 대고 따져 물을 수도 없게 된 상황이니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둘 중 아직 살아있는 하나에게 궁금증을 푸는 수밖에.
도경이 가진 질문들은 대단히 어렵지 않았다. 실은 매우 쉬웠다.
언제부터 만났는지? 장소현이 나랑 만나는 동안에도 뒤에서 너와 바람을 피웠는지? 쓸데없는 인간들이 수군대는 것처럼 정말로 자기 부모한테 너를 소개시킬 계획이었는지? 평생 나와 장소현을 지켜봐온 인간들에게 내 체면은 뭐가 될 예정이었는지? 너는 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으로 장소현과 같이 안 죽고 살아있는지?
언제 죽을 계획인지?
고작 그런 것들이 궁금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