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7/138)

<137화>

무거운 사슬은 온몸을 칭칭 감고 끝없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암석 같은 수갑은 손목을 절단할 것 같았다.

레이는 겨우 눈만 깜박이며 점멸하는 전등을 바라보았다. 사실 정말 점멸하는 건 전등이 아니라 그의 의식일 지도 몰랐다.

사실 이렇게 질질 끌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브라운이 확신을 갖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의 운명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최초의 불행을 꾸며 낸 인물이 마지막 불행도 초래했다는 사실이 허탈하고 증오스러웠지만, 그보다 더 큰 슬픔이 분노를 덮어 버렸다.

‘내 필연적인 불행이 혜라를 끌어들였구나. 이제 더 이상 그 애의 미소를 못 보겠구나.’

무슨 수를 써서든 최악을 막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래서 가능한 위험 요소를 기를 쓰고 제거했다. 혹여나 ‘프레이야 멜러니’의 초상화가 남아 있지 않을까 수색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레이몬드’의 거짓 인연을 만들기까지.

레이는 불행을 피하고자 발버둥 쳤다. 그러나 그의 노력이 우습게도 재난은 예고 없이 들이닥쳤고, 기어코 그의 유일한 행복마저 빼앗아 가려고 했다.

취조관은 계속해서 물었다. 네가 정말 프레이야 멜러니가 맞느냐고. 레이는 담담히 인정하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혜라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운 나쁘게 엮인 혜라를 위해서라면 그가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죽는 게 차라리 깔끔했다. 그러나 혜라의 마지막 말이 그의 결심을 자꾸 주저시켰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혜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의 오랜 거짓말을 알아차렸음에도 끝까지 그를 놓지 않았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혜라는 날 포기하지 않았는데, 내가 감히 그 애를 포기해도 되는 걸까?’

사실 레이는 절실하게 살고 싶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혜라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널 속여서 미안하다고, 불행으로 얼룩진 과거로부터 벗어나 ‘레이’로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고, 널 만나서 참 행복했다고.

그래서 레이는 모진 고문을 버티며 말했다.

“전 프레이야 멜러니가 아닙니다.”

거짓말의 대가는 가혹했다. 장기가 뒤틀리는 듯한 고통이 쉴 새 없이 밀려왔고, 그는 신음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고문관은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을 때마다 주먹을 휘둘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고문실은 무력하게 흘러내린 선혈과 분노 어린 식은땀으로 더럽혀졌다.

무차별적인 공격은 한참 이어졌다. 레이는 피를 토해 내면서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신을 부르짖는 대신 혜라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렇게 레이는 하루를 버텼다. 고문관은 지쳤는지 한참 전에 나가 들어오지 않았다.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작정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감각이 마비되어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던 고문관이 벌컥 문을 열고 딱딱거렸다.

“나가도 좋다. 석방이다.”

뜻밖의 소식이었다. 레이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묻고 싶었지만, 고문관은 아무 말 없이 그를 건물 밖으로 밀었다.

24시간도 더 지나서 보는 햇살은 유난히 따갑고 부드러웠다. 레이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고문실의 잔상을 떨쳐 냈다.

마침내 시야가 또렷해졌고, 레이는 그를 향해 달려오는 혜라를 보았다. 혜라가 어떻게 알고 왔는지 의문할 찰나도 없었다.

혜라는 피투성이인 그의 몰골을 조금도 꺼리지 않고 숨이 막히도록 껴안았다. 고통은커녕 머릿속이 새하얘지도록 행복했다. 거친 욕설마저 달콤하게 들렸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러나 말간 고동색 눈동자를 보니 그도 모르게 가장 깊은 진심이 튀어 나갔다. 두려움이라 읽기도 하는 감정이었다.

“……아직도 날 좋아해?”

혜라는 웃었고.

“그래, 이 바보야. 널 사랑하지 않았으면 이 미친 짓을 벌였겠어?”

레이는 울었다.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곁에 남겠다고 선택한 연인이 신이 내려 준 최초이자 최후의 선물 같았다. 그의 세상은 바로 지금 눈앞에 있었다.

***

카이사르 28년 1월 2일 오후 2시 43분.

“일단 씻고 나와. 그리고 얘기하자.”

나는 레이를 화장실 쪽으로 밀었다. 별로 힘을 주지 않기도 했지만 평소라면 기꺼이 떠밀려 줬을 레이가 웬일로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피로 온몸을 칠갑하고 있는 와중에도 눈동자만큼은 여전히 맑았다. 나는 피투성이인 얼굴이 보기 힘들어 고개를 돌렸다.

“……여기 계속 있을 거지?”

보지 않아도 레이의 얼굴이 불안감으로 가득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감정을 가다듬고 말했다.

“당연하지.”

화장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릎에 이마를 묻자 몇 시간 전의 일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레이는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언젠가 그 애가 나한테 맡겼던 손수건을 돌려줬을 때 얼마나 서럽게 울던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멈춰 서서 우리를 빤히 쳐다볼 정도였다.

그는 고통에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사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마치 고문을 버틴 이유가 오직 거기에 있다는 것처럼.

온몸으로 용서를 구하고 있는 애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레이의 상처가 너무 심각해 보여 남은 데이타스 약초를 먹이고 그를 가장 가까운 여관으로 데려왔다.

나는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한 바닥을 손끝으로 쓸었다. 매끈한 감각은 생생한데 아직도 내게 벌어진 일이 믿기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지난 하루를 보낸 건지 모르겠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은 건 레이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독보적으로 강한 덕분이었다. 아마 레이도 같은 생각을 했겠지.

쉴 새 없이 쏟아지던 물소리가 뚝 그쳤다. 나는 왠지 모를 긴장감으로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까. 그리 고민하던 순간에 먹먹한 미성이 울렸다.

“혜라.”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말끔해진 얼굴이 보였다. 복잡한 심경으로 그를 살피자 이번에는 레이가 시선을 피했다.

그의 손가락이 내 손끝 바로 앞에서 멈추곤 망설이듯 꿈틀거렸다. 나는 다 괜찮다는 의미로 그의 손등을 토닥였다.

“왜 그렇게 불안해해? 말했잖아. 널 떠나지 않을 거라고, 널 사랑한다고.”

나는 평소 레이가 그랬듯 다정하게 그와 눈을 맞췄다.

“내가 한 짓을 알아서 그래. 나 때문에 네가 겪지 않아도 되는…….”

레이가 입술을 깨물고 온 힘을 다해 울음을 참았다. 나는 그 입술에 상처가 생길까 싶어 레이의 뺨을 감쌌다. 이 상황에서도 그는 습관적으로 온기를 갈구했다.

“맞아, 즐거운 시간은 아니었지. 솔직히 네 원망을 조금도 안 한 건 아니야. 근데 네가 왜 아무 말도 안 했을까 고민하고, 안타레스한테 네 이야기를 듣고, 네가 어떤 마음으로 고문을 버텼을까 생각하니까…….”

나는 목이 메서 한 박자 쉬고 이어 말했다.

“네가 조금 이해되더라. ……어떻게 버텼어? 그 지옥 같은 시간을 어떻게 견뎠어?”

적막 속에 내쉰 그의 숨소리가 잔물결처럼 떨렸다. 그가 절절하게 고백했다.

“살아야만 했어. 버틸 수밖에 없었지.”

“…….”

“그런데 너랑 있으면 행복해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걱정마저 사라져서……. 그래서 프레이야가 아닌 레이로 살고 싶었어. ……혜라, 네 덕분에 지옥을 벗어난 거야.”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필사적으로 감정을 눌렀건만, 끝끝내 눈물이 그의 창백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네가 좋은 것만 보고 들었으면 해서 말하지 않았어. 이제 보니 다 내 욕심이었나 봐.”

“욕심 아니야.”

“아니야?”

진심이냐고 묻는 듯한 눈동자가 날 직시했다. 불행이 본인에게서 기인했다 믿는 그 애는 내가 달콤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진심이길 간절히 바랐다.

나는 한숨 쉬듯 웃었다. 레이 넌 정말 끝까지 미련하구나.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아직도 확신하지 못하다니. 그건 네가 날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겠지?

“내가 어떤 일을 겪었든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정말 잘못한 건 게일이지. 그러니까 자책 좀 그만하고 널 빼내느라 고생한 나 좀 안아 줘. 난 그거면 충분해.”

나는 활짝 웃으며 팔을 벌렸다. 레이는 말없이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울듯이 웃으며 나를 꽉 끌어안았다. 그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다시는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겠다고.

나는 그저 웃음을 흘리며 그의 등 뒤로 두른 팔에 힘을 줬다. 되찾은 평화와 맞닿은 심장,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은 포근한 체향. 이 정도면 근사한 결말이라고 생각했다.

***

영원할 것 같았던 태풍도 언젠간 잦아들기 마련이다. 나와 레이가 강제 휴가를 즐기는 사이, 제국을 뒤흔들었던 사건은 하나씩 해결되기 시작했다.

우선 엘리는 방화와 이단을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자세히 듣자니, 매일 밤 들려오던 소리가 사실은 유령을 불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그가 믿는 신을 영접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로비에서 우연히 봤던 펜던트가 수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하니 이단일 줄이야. 기사단에게 끌려가며 내 이름을 부르짖었다고 하던데, 딱히 무섭지는 않았다.

물론 미쳐 버린 엘리야 한밤중에 날 몰래 찾아오고 싶겠지. 그러나 이번 사건을 계기로 경비가 더욱 강화된 덕분에 그가 탈옥할 가능성은 내가 제이든한테 거짓말했다며 자백할 확률보다 낮았다.

반란 스캔들 또한 게일의 유죄로 막을 내렸다. 안타레스가 말해 주기론, 갑자기 불려 온 게일은 눈물을 쏟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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