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동이 떠오르자마자 내가 쓴 편파적인 기사가 거리에 흩뿌려질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랬듯 흥미롭게 기사를 읽고, 반인륜적 짓을 저지른 게일에 분노하겠지.
만약 황제가 게일의 주장을 의심하고 있는 상황에서 민중들이 단결하여 레이를 지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어떨까?
그의 권력이 얼마나 강하든 결국엔 백성이 존재하기에 그 권력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황제는 절대 여론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양피지에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굵은 선은 낯선 필체를 그렸다.
「이 글을 믿고 말고는 황제 폐하께 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장담합니다. 이 글을 게일 브라운이 읽는다면 분명 당황할 거예요. 그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나는 양피지를 고이 말아 손에 쥐었다. 이제 남은 것은 에단에게 배달을 부탁하는 것뿐이다.
***
카이사르 28년 1월 1일 오후 10시 정각.
안타레스가 로브를 빌려준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에 띄지 않고 무사히 시내 중심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담벼락에 몸을 숨기고 둘러보니 역시나 시내 곳곳에 제이든의 수하처럼 보이는 남자들이 퍼져 있었다. 내가 아로네의 가게로 올 걸 미리 예상하고 잠복하는 것이다.
근데 그럼 뭐 해. 아무리 그들이라도 의상점 안까지는 못 들어온다. 무죄로 판명 난 사람 뒤를 쫓는 것도 딱히 합법적이지 않은데 정당한 구실도 없이 의상점을 쳐들어올 수 있을 리가.
나는 일반 시민인 척 과일을 둘러보는 남자에게 몰래 혀를 내밀곤 뒷문을 통해 가게로 올라갔다. 문을 열자 땡그랑 풍경 소리가 울렸다. 나는 로브를 벗으며 반갑게 인사했다.
“나 왔다!”
아로네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내 몰골을 보고 너무 놀라서 굳었다. 평소 표정 변화가 드문 에단조차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직 아무 말도 안 들었는데 벌써 넘치는 걱정을 받은 것 같았다. 하긴, 피로 얼룩진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으니 놀랄 만도 했다. 나는 분위기가 심각해지는 게 싫어서 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 약간 전쟁에서 겨우 빠져나온 공주 같지 않아?”
아로네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달려왔다. 그는 내 몸 이곳저곳을 샅샅이 살피며 횡설수설했다.
“……이게 다 네 피야? 무슨 피가 이렇게 많이, 아니, 그보다 빨리 의원을……!”
나는 아로네의 어깨를 붙들었다. 이렇게까지 허둥지둥하는 아로네는 처음 봐서 신기하면서도 조금 감동이었다.
“할리가 말 안 해 줬어? 나 데이타스 약초 먹고 다 나았는데?”
아로네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걱정스러운 눈길은 여전히 검게 굳은 핏자국에 머물렀다.
“정말 다 나은 거 맞아?”
나는 드레스를 벗는 시늉을 했다.
“직접 볼래?”
에단이 오만상을 찡그리며 다가왔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모습이 아주 건방졌다.
“괜찮다는데 왜 자꾸 그래? 딱 봐도 멀쩡하구만.”
그는 평소처럼 툴툴거리면서도 내 몸을 위아래로 쭉 훑었다. 내 말이 진실이라고 확신한 그의 눈동자에 희미한 안도감이 떠올랐다. 참나, 이런 흥헤롱을 다 봤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에단을 놀려 주려다가 관두었다. 괜히 골렸다가 부탁을 안 들어주면 낭패다.
그때 아로네가 내 손을 잡고 계단으로 끌었다.
“그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지? 일단 씻고 와. 따뜻한 수프 준비해 줄게.”
“잠깐만. 그 전에 부탁 먼저 하고.”
두 쌍의 눈이 어리둥절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에단과 눈을 맞추고 비장하게 말했다. 심각한 분위기에 에단이 그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했다.
“아무도 모르게 편지 좀 전해 줄 수 있어? 총 두 명이야.”
“그게 누군데.”
나는 로브 안주머니에서 양피지 두루마리 두 개를 꺼냈다.
“파란색 리본은 황제, 빨간색 리본은 에이미 로벤스야.”
“뭐?”
에단이 죽다 살아나더니 정녕 미쳤냐는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아로네도 우려를 표했다.
“황제한테 편지라니. 무슨 일이야? 로벤스는 또 어떻게 알고.”
나는 시계를 봤다. 벌써 10시의 절반이 지나가 있었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났지?
문득 거대한 회중시계가 고막 바로 앞에서 째깍거리는 듯한 환청이 울렸다.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처음부터 설명하자면 길어. 핵심만 말하자면 그 두 개의 편지가 레이의 무죄 선고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들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하지만 양피지에 담긴 긴 스토리는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 들려줘도 충분할 테다. 나는 에단에게 두루마리를 떠넘기듯 쥐어 줬다.
“안 들킬 자신 있지?”
에단은 왈칵 얼굴을 찌푸렸다. 그가 화를 내려다가 내 손끝이 떨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곧 마탑주가 될 사람을 배달원으로 부리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다.”
에단이 눈을 맞추고 안심해도 된다는 눈빛을 보냈다. 사뭇 풀어진 입가는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해 보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다니. 내가 초조하긴 한가 보다.
나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의 실력은 내가 제일 잘 알았다. 쟤 덕분에 미행 따돌리고 여기까지 온 건데 당연하지.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믿을게.”
에단이 내 얼굴을 주의 깊게 살피더니 혀를 쯧 찼다.
“이제야 평소 같네. 쓸데없이 쫄기나 하고. 아무튼 난 간다.”
곧 다가올 미풍에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에단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음에도 여전히 마음이 찝찝했다.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은 역시 별로라고 생각했다.
***
카이사르 28년 1월 2일 오전 9시 35분.
황제는 산등성이에 걸린 태양을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지켜봤다. 그는 보좌관이 전하고 간 소식 때문에 심란한 상태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심란함은 어젯밤 발견한 의문의 양피지 두루마리 이후로 계속 이어졌다.
파란색 리본으로 묶인 그것은 건방지게도 침대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마치 ‘여기에 두면 못 보고 넘어가진 않겠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의 장난이라 치부하기엔 황제의 침소는 엄중한 경비로 보호받고 있었고, 강력한 결계가 둘려 있어서 아무나 침입할 수 없었다.
암살 시도로 보기도 어려웠다. 믿을 만한 수하를 불러 조사하라 시켰지만 그들은 양피지에서 어떤 위해 요소도 찾아내지 못했다. 적어도 겉은 안전했다.
황제는 고민 끝에 양피지를 펼쳤다. 물론 혹시 모를 함정을 대비해 주위에는 마법사와 의원이 상주한 채였다.
그의 주위를 빙 둘러선 사람들이 무안하게도 황제는 첫 문장을 읽자마자 모든 사람을 물렸다. 이 글은 혼자 읽어야 한다는 감이 왔다.
익명의 글쓴이는 본인을 정의의 사도라 소개하며 화제의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싶다고 말했다. 망상증을 앓던 게일이 평소 미워하던 한 연인을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턱도 없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망상증 환자는 게일이 아니라 익명의 글쓴이인 것 같다고 코웃음 치기도 했다. 그러나 양피지를 넘길수록 황제의 얼굴은 여유로움을 잃고 점점 굳어갔다.
익명의 글쓴이는 꼼꼼하고 치밀하게 게일의 유죄를 주장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게일을 짓밟기 위해 기다려 온 사람 같았다. 부정할 여지가 없는 증거들을 보며 황제는 이 고발을 그냥 넘길 순 없겠다고 생각했다.
여태껏 그는 게일의 주장을 전적으로 신뢰했었다. 칼리아가 도움 되지 않는 상황에서 믿을 거라곤 어린 멜러니를 봤다는 게일밖에 없었다.
그러나 의사 소견서는 너무나도 명백했다. 더군다나 멜러니가 계속 애매한 답을 늘어놓으면서 수사는 미궁에 빠졌다.
황제는 하룻밤 더 지켜보기로 했었다.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전달받은 소식이 제국 전역으로 퍼진 게일의 부도덕함과 멜러니의 무고함이었다.
보좌관은 백성들이 입을 모아 게일을 비난하고 있다고 말했다. 황제는 필시 익명의 글쓴이가 뒤로 손을 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떤 목적으로?”
황제는 미간을 좁히고 이미 수십 번 들여다보았던 양피지를 응시했다. 도대체 어떤 간 큰 이가 이런 짓을 벌였을까 생각하니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눈에 띄었다.
「이 글을 믿고 말고는 황제 폐하께 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장담합니다. 이 글을 게일 브라운이 읽는다면 분명 당황할 거예요. 그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황제는 이제야 눈치챈 것이 어이없어 실소했다. 자기 편의대로 바뀌는 저 말투를 분명 들어 본 적 있었다.
“허! 무죄로 풀려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 여자 보좌관이 자신만만하게 웃는 모습이 환영처럼 보였다. 하나 범인을 알아서 무엇 하나.
황제의 처소에 무단 침입을 하고, 국가의 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죄를 들먹이고 싶어도 심증뿐이었기에 마땅한 처벌을 가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황제는 새파랗게 어린 여자 보좌관에게 놀아났다고 할 수 있었다.
황제는 분노일지 감탄일지 모를 감정을 느끼며 보좌관을 불렀다. 격변한 상황 속에서 그가 내릴 수 있는 결정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는 단호히 명령했다.
“게일을 잡아들여라.”
***
카이사르 28년 1월 2일 오전 11시 11분.
레이는 초주검 꼴이 되어 의자에 널브러져 있었다.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흘러 더 적실 것도 없는 옷을 물들였다. 그는 한계를 절감했다. 고문과 진실 물약의 부작용을 동시에 견디려니 힘이 배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