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5화 (135/138)

<135화>

아로네가 보면 기절하는 거 아니야?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느 정도는요.”

안타레스가 분명 환상적이었을 드레스를 안타깝다는 듯 응시했다. 그가 혀를 차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천이 떨어진 거면 고쳐 줄 수 있는데 아예 타 버린 거라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네. 음…… 대신 자기 의뢰, 무상으로 해 줄게.”

“……네?”

언제부터 길드가 자선 사업을 했지?

갑자기 베푸는 호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설명을 요구하듯 안타레스를 바라봤다. 그가 오른쪽 눈을 찡그리며 아까워했다.

“이런.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네.”

“뭐예요 자꾸? 아니, 제 의뢰 들어 보지도 않았잖아요.”

안타레스가 능청스레 대꾸했다.

“꼭 들어야 아나? 반란죄로 잡혀 들어간 애인 때문에 온 거 아니야?”

어떻게 안 거지? 불과 12시간도 안 지난 일이다. 위쪽에서 압력이 들어온 덕분에 반란 분자에 대한 이야기는 철저하게 입막음이 되었다. 심지어 기숙사 화재가 기사화된 것도 고작 2시간 전이다.

“그런 정보는 도대체 어디서 물어오는 거예요?”

안타레스가 입술 앞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선혈처럼 붉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쉿. 그건 영업 비밀이야.”

“그럼 잘 모르는 사람 도와주는 거는요? 이것도 영업 비밀이에요?”

“글쎄? 엄밀히 말하자면 모르는 사람은 아니야. 9년째 알고 지내는 사이니까.”

어쩐지 저번에 레이랑 묘하게 친분이 있어 보이더라니.

“레이랑 아는 사이예요?”

“빙고!”

안타레스가 속이 다 시원하다며 깔깔 웃었다. 또 하나의 비밀을 알게 된 나는 마냥 웃을 수 없었다. 그동안 둘이서 날 잘도 속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로써 레이가 반드시 출소해야 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늘었다. 나오기만 해 봐. 그동안 숨긴 게 또 뭐 있냐고 탈탈 털어 줄 거다.

안타레스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뚝 웃음을 그쳤다. 경박한 웃음소리가 사라진 공간은 순식간에 침묵으로 얼어붙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말했다.

“게일을 무너뜨릴 계획이지?”

“와…….”

방금 처음으로 할리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침묵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능력을 직접 경험하니 조금 소름 끼쳤다.

“어떻게 알았어요?”

안타레스는 날 조금도 모르면서도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정보력이 어디까지일까 일순 두려워졌다. 정리된 글만 보고 타인의 사고를 유추하는 게 가능한 일이냐고.

“자기 같은 사람을 알거든. 과감하고 자신감 넘치고 무모한.”

“누구요?”

안타레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나.”

나는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입술만 달싹였다. 너 같은 애는 처음 본다는 얘기는 귀가 닳도록 들었는데 그 반대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안타레스가 얼핏 따뜻한 눈빛을 띠었다.

“자기가 올 거라 확신하자마자 애들한테 조사하라고 했어.”

안타레스가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숫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달의 위상이 순서대로 그려져 있었다. 유일한 선이 그믐달을 향해 달려갔다.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시계를 넣었다.

“2시간이면 오겠네. 그럼 그동안 레이 얘기 좀 해 볼까?”

안타레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서 유리잔 두 개와 비싸 보이는 양주가 나타났다. 그가 유리잔에 술을 따라 건넸다. 나는 한 번에 술을 털어 넣고 안타레스를 직시했다.

“알려 주세요. 하나도 빠짐없이 다.”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신화와 달리 내 세상은 재앙으로 물들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

카이사르 28년 1월 1일 오전 11시 18분.

안타레스가 이야기해 준 레이의 인생은 놀랍다 못해 참혹했다. 내가 레이였다면 결코 버티지 못했을 인생이었다.

레이는 말도 제대로 못 했을 시절부터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그들은 레이를 예언의 아이라고 추켜세우며 약한 나라를 구원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들은 레이가 왕족이기 전에 어린애라는 걸 유의했어야 했다. 열 살도 안 된 애를 세상 밖으로 보내 비를 내리게 하는 것은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라 착취였다.

바보같이 착한 레이. 그 애는 너무 빨리 철이 들어서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 충성의 대가가 배신과 모함이라는 걸 진작 알았다면 일찌감치 의무로부터 벗어나 평범한 아이처럼 자랄 수 있었을까? 찬사를 보내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돌변해 돌멩이를 던졌을 때, 그 괴로운 간극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순식간에 떨어진 평판과 더럽혀진 명예,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연이은 죽음. 레이가 모든 불행을 복수심이라는 달콤한 천으로 덮어 버렸을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신시아’가 유년기의 단편을 이야기했던 날을 기억한다. 마냥 순수하다 생각했던 눈동자에 떠올랐던 살의란.

내가 그였어도 모든 걸 망쳐 버린 제국에 복수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이는 내 미래에 자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하나 때문에 복수를 포기했다. 그래, 고작 그것 때문에.

……아니 그럼 도망을 치든가 해야지, 왜 순순히 잡혀 줘?

“왜 그랬을까요?”

뜬금없는 물음에 안타레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나를 도와 재정부에서 가져온 자료를 훑어보고 있던 중이었다.

“뭐가?”

“레이 말이에요. 저는 어련히 잘 빠져나올 텐데 정작 가장 위험한 본인은 왜 도망치지 않은 걸까요? 정말 처형당하면 어떡하려고.”

“어머, 정말 모르겠어?”

안타레스가 흥미롭다는 듯 턱을 괴었다. 휘어진 붉은 입술이 의미심장했다.

“왜겠어. 레이가 도망치면 자기는 평생 황궁의 감시를 받을 거야. 둘 사이가 워낙 평범했어야지. 자기를 영영 못 보는데 피해까지 주면 그 애 정신이 남아나겠어? 걔는 그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어. 그러니 차라리 죽어서 후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설마요. 아무리 레이라도 그렇게까지 미련할 리 없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레이가 자기 자신을 갉으면서 사랑하는 타입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데 어떻게 모른 척하겠는가.

다만 나는 레이가 은연중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화나고, 서럽고, 애틋해서 한참 동안 침묵했다. 안타레스는 입술을 깨문 날 흘깃 보곤 말없이 술을 따라 줬다.

그때였다. 장식인 줄 알았던 벽난로에 갑자기 보라색 불이 타올랐다. 뜬금없는 발화 덕분에 눈물이 쏙 들어갔다.

안타레스를 쳐다보자 그는 반색하며 벽난로로 머리를 숙였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그의 뒷덜미를 끌어당겼다.

“미쳤어요?”

안타레스는 어리둥절하게 내 경악 어린 표정을 보더니 이내 깨달음의 탄식을 뱉었다. 그가 즐거워하며 말했다.

“이거 진짜 불 아니고 마법이야. 봐.”

안타레스가 벽난로 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심장을 부여잡고 고개를 내리자 한눈에 봐도 상당한 양의 양피지 더미가 쌓여 있었다. 왠지 마음이 더 착잡해지는 것 같았다.

안타레스는 손짓 한 번으로 그 무거운 더미를 들어 올렸다. 그가 쾌활하게 외쳤다.

“그럼 시작해 볼까?”

나는 머리를 고쳐 묶고 가장 앞에 있는 양피지 묶음을 집어 들었다. 첫 번째로 읽은 문장이 아주 흥미로웠다. 아무래도 게일이 꽤나 화려한 삶을 살아왔나 보다. 오랫동안 길드에 머무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카이사르 28년 1월 1일 오후 8시 49분.

게일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온갖 범죄를 저질렀다. 다른 악행에 비하면 횡령은 어린애들 장난 수준이었다.

게일 브라운은 별것도 아닌 이유로 시종을 구타하고 끔찍한 형벌을 내린다는 악명으로 자자했다. 그의 저택에서 죽어 나간 시종의 수로 기사단을 이룰 수 있을 거라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다.

그가 어린 하녀들에게 했던 짓은 입에 담기도 싫다. 그는 내가 본 인간 중 최악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게일은 그가 지지하는 제 1왕자의 성공적인 즉위를 위해 인간이 해선 안 되는 짓을 저질렀다.

반대 세력을 차근차근 무너뜨리며 화목한 일가족을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았고, 교묘한 모함으로 레이를 악마로 매도했다.

게일은 살아 있어선 안 되는 사회악이었다. 그러나 그 점만으로는 부족했다. 게일은 프레이야의 얼굴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고, 그 점은 끔찍한 인간성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강력했다.

칼리아 황후? 안타레스가 말하기를, 칼리아는 글자를 떼자마자 이웃 대륙으로 유학 갔기 때문에 프레이야의 얼굴을 직접 본 적 없었다.

게일은 최초 고발자이자 중요 참고인이었다. 지금 내가 가진 정보로 그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하지만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 낸다면 말이 달라지지.’

나는 그럴듯한 거짓말을 꾸며 내 진실과 섞었다. 만약 게일의 잔인한 행동이 불안한 정신에서 비롯된 거라면? 그가 분노 조절 장애와 도착증, 그리고 망상증을 앓고 있다면? 그를 진찰했다는 의사의 소견서를 동봉한다면?

나는 다분히 악의적인 고발을 하려 한다. 황제가 이 글을 다 읽었을 즈음이면 《귀족의 모든 것》도 새 기사를 내보낸 후겠지. 내가 에이미 로벤스의 약점을 쥐고 있다는 게 신의 한 수였다.

제국 대다수의 사람이 《귀족의 모든 것》을 정기 구독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기사의 신빙성에 관해선 항상 말이 나왔지만 애초에 사람들은 정확성을 기대하고 기사를 읽지 않았다.

오락거리가 한정되어 있는 세계에서 자극적인 이야기만큼 재미있는 게 어디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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