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내게 당면한 과제만 없었다면 그와 같이 데이타스의 위대함을 찬양했을 텐데.
시계를 보니 벌써 7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제이든은 무조건 조사를 진행할 거라 말했고, 나는 그가 반역자라 의심되는 사람을 젠틀하게 수사할 거라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다.
할 일이 수두룩했다. 나는 이불을 털고 일어났다. 할리는 어느새 웃음을 그치고 말없이 내 손끝을 응시했다. 나는 축 처진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가 아로네한테 연락했지? 덕분에 빨리 나왔다. 고마워.”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뭐라고 답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 숨이 턱 막혔다. 머릿속에서 떠돌아다니는 계획들 사이에서 길을 잃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내가 당장 누굴 찾아가야 하는 지만큼은 명확했다. 나는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나 살핀 후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증거를 모을 거야. 레이는 티 한 점 없이 결백한 사람이지만, 게일이 상종도 못 할 인간쓰레기라는 증거.”
“……너, 설마.”
할리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인상을 썼다. 나는 사악하게 웃었다. 절망스러운 상황임에도 일순 희열감이 들었다. 아, 난 미친 짓을 할 때가 가장 신나더라.
“맞아. 난 대규모 사기극을 벌일 거야. 성공한다면 레이는 풀려나고, 게일은 감옥에 가겠지.”
“하지만 혼자서 어떻게? 물론 나도 최선을 다해 도와주긴 하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아?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그리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머리를 질끈 동여매며 말했다.
“둘이라면 불가능하겠지. 근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날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너만이 아니더라고.”
나는 신발을 고쳐 신고 할리를 바라보았다. 할리에게 내 결심을 늘어놓을수록 어쩐지 해낼 수 있으리란 자신감이 생겼다.
“빠져도 돼. 넌 충분히 날 도와줬어. 네 선택에 관계없이 우리 관계는 그대로일 거야.”
진심이었다. 할리의 도움이 간절한 것은 사실이나 그는 여전히 내 소중한 친구였고, 친구를 폭풍의 눈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우정이 아니었다.
할리는 잠시 고민하더니 결연하게 눈을 빛내었다. 그가 내 두 손을 힘주어 잡았다.
“돕게 해 줘. 최선을 다할게.”
“약속하면 도망 못 가는 거 알지?”
“당연하지.”
언제나 안전한 길을 추구하던 할리가 기꺼이 위험을 택하다니. 그가 얼마나 새가슴인지 아는 사람으로서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고맙다는 의미로 그와 가볍게 포옹했다.
할리가 비장하게 물었다.
“내가 뭘 하면 돼?”
“그 전에 이거 하나 묻자. 혹시 제이든이 나한테 미행 붙였어?”
할리가 소름 끼쳤다는 듯 팔을 쓸어내렸다.
“어떻게 알았어?”
“그냥. 내가 제이든이라면 그랬을 것 같아서.”
“……너랑 같은 편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갑자기 드네.”
그거야 당연하지. 날 적으로 둬서 좋은 꼴 본 사람 한 명도 없다. 나는 상자를 뒤지며 할리에게 말했다.
“스칼렛이 날 도와줄 거야. 나한테 빚진 게 있거든. 넌 비교적 거동에 제약이 없으니까 스칼렛 좀 불러내 줘. 흔들 그네 있는 곳 알지? 거기로 나오라고 하면 부탁은 내가 직접 할게.”
“미행 붙었는데 어떻게?”
나는 잠시만 기다리라는 듯 왼손을 들어 올렸다. 망할 상자는 공간 확장 마법이 걸려 있어서 물건 하나 찾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래서 에단이 정리하기 쉬우라고 선반도 만들어 줬지만 내 병적인 게으름이 정리를 소홀히 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다음부턴 제때제때 정리해야겠어.
나는 팔을 쑥 집어넣은 후에야 찾던 물건을 손에 쥐었다. 나는 자랑스레 마법 약을 흔들었다.
“에단한테 받은 투명 물약이 있거든. 스칼렛을 만나고 황궁을 빠져나갈 때까지 지속될 거야.”
할리가 열망 어린 눈으로 물약을 바라봤다. 그는 전부터 에단과 친분 있는 나를 부러워했다. 나는 인심 쓰듯 말했다.
“이번 일 잘 끝나면 얻어다 줄게.”
“내가 뭐 더 할 일 없어?”
갑자기 의욕 넘치는 할리의 의도가 너무 투명해서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곤두선 신경이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아로네한테 편지 좀 전해 줘. 난 멀쩡하고 이따 가게에 가겠다고, 그리고 에단 좀 불러 달라고,”
“알았어.”
“그럼 부탁할게.”
우리는 서로의 행운을 빌어 준 뒤 헤어졌다. 할리는 정상적인 문을 통해 나갔고, 나는 물약을 마신 뒤 창문을 넘었다. 다행히 1층이라서 다리는 부러지지 않았다.
나는 휙 주변을 둘러본 뒤 쏜살같이 달렸다.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다시금 결의를 일깨웠다. 레이가 날 속였든 말았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건 부모님으로도 충분하다. 더는 잃을 수 없다.
***
카이사르 28년 1월 1일 오전 8시 3분.
흔들 그네에 앉아 발을 구르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스칼렛이 나타났다. 그는 혹여나 지켜보는 눈이 있을까 봐 쉴 새 없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이미 내가 한차례 둘러보고 온 후라 딱히 걱정할 필요 없었다. 애초에 이렇게 구석진 곳까지 오는 사람이 극히 드물기도 하고.
나는 코앞에서 헤매고 있는 스칼렛의 어깨를 잡았다. 물론 내 몸은 여전히 투명했다. 스칼렛은 보이지 않는 손길을 느끼고 세상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그가 마구잡이로 내지른 주먹에 맞은 곳이 얼얼했다. 나는 황급히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팀장님! 저예요, 혜라! 제발 진정해 주세요!”
“어디 유령 따위가! ……어?”
스칼렛이 허공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혜라?”
“네. 유령 아니고 멀쩡히 살아 있는 저예요. 투명 물약 먹어서 모습이 안 보이는 거고요.”
할리가 투명 물약에 대해 일언반구도 안 한 게 분명하다. 나는 제대로 맞은 광대뼈를 살살 문질렀다. 스칼렛 저 사람, 보기보다 힘이 세다.
나는 아직도 얼빠진 스칼렛을 벤치로 끌어당겼다. 스칼렛은 얼떨떨해하며 내 옆에 주저앉았다. 나는 그의 고개가 나를 바라보도록 고정시켜 주고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잠깐의 침묵 동안 분위기는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그때 팀장님이 저한테 보낸 눈빛, 저는 믿음……으로 해석했어요. 맞나요?”
스칼렛의 동공이 정확히 날 찾았다. 분명 내 얼굴이 보일 리 없을 텐데도.
“맞아요. 공을 세워 승진한 혜라 씨가 반란 주동자일 리가 없잖아요.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공포에 눈이 멀어 그 명백한 사실을 떠올리지 못했지만요.”
“제 옆에 있던 애도 마찬가지예요. 전 그 애를 빼내 올 생각이고요.”
눈치가 없는 사람도 이 정도 노골적임이라면 모를 수 없을 것이다. 스칼렛이 한숨을 내쉬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한 대 펴도 되나요?”
“……네.”
언제부터 피기 시작한 거지? 나는 능숙하게 불을 붙이고 담배 연기를 힘껏 빨아들이는 스칼렛을 생경한 눈으로 쳐다봤다. 길게 뿜어진 연기에서 그의 착잡한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스칼렛이 담배꽁초를 발로 비벼 끄고 말했다.
“내가 혜라 씨한테 빚진 게 있긴 하죠. 이렇게 크게 돌아올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일단 한번 말해 봐요. 나한테 뭘 바라죠?”
“게일이라고 아세요? 황후 궁의 관리인인데, 그 사람의 비리를 캐야 해요.”
“깨끗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나는 순간 심각한 상황도 잊고 깔깔 웃었다. 게일이 깨끗할 거라 생각일랑 하지 않았지만, 설사 그렇다고 한들 비리야 만들어 내면 그만이다.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뭐든 밑져야 본전 아니겠어요?”
스칼렛은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 피웠다. 우수에 찬 눈빛이 고민 많아 보였다. 그가 마지막 연기를 뱉으며 말했다.
“난 오늘 여기서 혜라 씨 안 만난 거예요.”
나는 터져 나오려는 함성을 겨우 참았다.
“감사해요.”
스칼렛이 무언가를 가늠하듯 허공을 훑다가 내 어깨를 덥석 잡았다.
“이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도와주는 거예요. 날 실망시키지 않을 거죠?”
“당연한 말을 하시네요.”
우리는 사이좋게 재정부 건물로 향했다. 그러던 중 스칼렛이 내 투명화를 깜박하고 주절주절 떠들었다가 주위의 눈초리를 끌었다는 것만 빼면 아직까진 모든 게 순조로웠다.
***
카이사르 28년 1월 1일 오전 9시 35분.
나는 다소 긴장된 마음으로 남청색 문 앞에 섰다. 호기롭게 길드에 오긴 했는데 막상 불법을 저지른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신상 조사 의뢰하러 왔을 때? 그건 약과였다. 지금 난 사람 한 명의 인생을 짓밟을 각오로 이곳에 왔다. 아무리 게일이 밉다고 한들 남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래도 뭐 어떡해. 시작을 했으니 끝을 봐야지.”
나는 벌컥 문을 열었다. 안타레스는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양 태평하게 인사를 건넸다. 먼젓번과 달리 화려한 가면은 없었다. 그가 의자를 눈짓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네. 일단 앉아.”
끼익.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왼쪽 옆구리에는 보물 상자를, 오른쪽 옆구리에는 재정부에서 가져온 서류 봉투를 끼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안타레스가 빙긋 웃으며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차를 권했다. 은은한 향을 맡으니 한껏 긴장되었던 근육이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찻잔에 손을 대고 온기를 느꼈다. 이제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의뢰를 하려고 왔어요.”
“그 깜찍한 드레스랑 관련된 의뢰인가?”
나는 흘긋 아래를 내려다봤다. 분명 노출 하나 없던 드레스였는데 망할 화재 때문에 등허리를 비롯한 복부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