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그때였다. 칠판 긁히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지친 얼굴로 취조실로 들어오는 인영은 뜻밖에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니, 어쩌면 제이든이 오는 게 당연한 거려나?
이런 곳에서 제이든을 마주치게 되어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어떻게 물꼬를 틀까 고민하다가 그냥 멋쩍게 웃었다.
“새해 첫날부터 보네요.”
제이든은 화낼 기운도 없어 보였다. 그가 마른세수를 하며 뒤따라 들어온 기사들에게 말했다.
“심문은 나 혼자 한다. 진실의 물약만 놓고 다 나가.”
“하지만 전하…….”
제이든이 내게 물약을 마시라 눈짓했다. 그는 기사들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싸늘하게 명령했다.
“나가.”
나는 허튼짓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길을 빤히 바라보며 물약의 입구를 기울였다. 온갖 오물이 섞인 것처럼 탁한 색을 띤 액체가 쉬지 않고 기도로 넘어갔다.
희한하게도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잘 만든 물약일수록 무맛이라는 에단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심장이 떨어지도록 큰 소리가 나며 문이 닫혔다.
제이든은 턱을 괴고 급조된 서류를 휙휙 넘겼다. 그의 눈가 아래 드리운 그늘이 잔혹하게 타들어 간 기숙사만큼이나 까맸다. 그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서류를 옆으로 치웠다.
“설명해 봐.”
화부터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의외의 요구에 살짝 당황했지만 의연하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제이든은 정말 순수하게 궁금한 것 같았다. 무감정한 눈동자는 어쩌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여기 앉아 있냐고 묻고 있는 듯했다.
진정시키느라 쓸데없이 힘 빼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네. 나는 미리 생각해 뒀던 대사를 떠올리며 차분하게 말했다.
“우선 다 오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저와 레이의 무죄를 증명할 수 있어요.”
“남자 쪽은 됐고, 일단 네 무죄 먼저 증명해 봐.”
제이든이 팔짱을 끼고 무료한 시선으로 날 쳐다봤다. 본인의 보좌관이 역적으로 몰리고 있는데도 참 태평한 태도였다. 설마 아로네의 편지가 감정까지 거세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나?
“……먼저 제가 방화에 동조했다는 주장은 완전 개소리예요. 설마 지금 제 상처를 보고도 반박하진 않으시겠죠?”
제이든이 쓰러지지 않은 게 용한 내 꼴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테이블 아래로 작게 주먹을 쥐었다. 어쩐지 시작이 좋았다.
“역모에 가담했다는 주장도 타당성 없어요. 만약 제가 레이의 진실된 신분과 복수심을 알고 있었다고 쳐요. 그때 레이가 바라는 건 분명 황제 폐하의 죽음일 텐데, 제가 그 복수심을 나눠 가졌다면 진작 폐하를 시해하지 않았을까요? 그동안 둘만 있었던 적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기껏해야 두 번이지만 내 기준으로 황제와 두 번이나 독대한 거면 많았다. 레이의 진짜 이름이 레이몬드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지만 그가 데우스 왕국의 왕자라는 것은 몰랐기에 그의 ‘진실’을 다 안다고 할 수도 없었다.
내가 레이에게 했던 말이 바로 이런 의미였다. 진실을 교묘하게 틀면 아이러니하게도 거짓말이 된다는 것. 역시나 심장이 타들어 가는 부작용은 없었다.
나는 두 손을 모아 잡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제이든은 말없이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그가 한숨을 쉬었다.
“네가 무죄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 너 같은 애가 반란? 운 나쁘게 선동에 휩쓸렸다고 생각했지. 공포는 사람을 비이성적이게 만드니까.”
왜 입 아프게 말 시켰냐는 짜증보다 날 믿어 줬다는 감동이 더 컸다. 그러나 제이든은 말 한마디로 훈훈한 분위기를 깨뜨렸다.
“그 남자는 가망이 별로 없지만.”
나는 건방지게도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레이도 결백해요. 진짜 방화범을 제가 알고 있어요.”
제이든은 흥미가 당긴 눈치였다. 나는 그가 딱히 제재하지 않는 것을 계속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제 옆방에 사는 엘리라는 애가 범인이에요. 강령술을 한답시고 날마다 양초 수십 개씩 피우던 애예요. 그 사실을 증언해 줄 사람들도 많아요. 걔 이미 여러 번 신고 받았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가 걜 구해 줄 때 본인 입으로 직접 말했어요.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그 남자가 살아 돌아온 왕자라는 주장은 어떻게 변명할 거지?”
변명이라. 설명이라는 대신 선택한 단어에서 제이든의 입장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쉬울 거라고 생각 안 했어. 하지만 돌아가는 길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는 법이지.
“그 애는 절 사랑해요. 게일은 저한테 매번 까이다 못해 무참히 짓밟혔고요. 뻔하지 않나요? 남자가 악감정을 품었을 때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지 잘 아시잖아요. 게일은 그저 충동적으로…….”
제이든은 대단한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웃었다.
“충동? 어떤 멍청이가 충동적으로 그런 거짓말을 지어내? 그리고 그 남자, 정말 멜러니 왕자가 아니라기엔 지나치게 떨었다던데. 마치 비밀이 들통난 것처럼.”
“……제이든 님이 그 현장에 없으셔서 그래요. 사람들은 심증만 갖고 저희를 악마처럼 봤어요. 기사단이 저희를 체포하지 않으면 그 사람들 손에 큰일 날 것 같았다고요.”
말하다 보니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났다. 나는 울컥 벅차오르는 감정을 진정시키려 검지로 상처를 지그시 눌렀다. 목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죽다 살아나서 미칠 것 같은데 적국의 왕자가 나타났다고 생각해 보세요. 걔가 불을 껐든 말았든 그딴 건 상관없고 무조건 걔가 범인 같을걸요? 옆에 서서 그 범인을 변호하는 저는 한통속처럼 보이고요. 다수가 맞다고 몰아가는 상황에서 아니라고 말하는 게 어디 쉽나요?”
“무려 역적으로 몰리는 상황인데 쉽고 말고를 따지면 안 되지. 정말 결백했다면 더 강력하게 무죄를 피력해야 했어. 덜덜 떠는 게 아니라.”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니까요?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미 저희를 범죄자라고 확신했는데 어떻게 침착하겠어요? 무슨 말을 하든 거짓말이 될 게 뻔했다고요.”
제이든이 가늠하듯 내 표정을 살폈다. 그가 미간을 좁히며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멀쩡하네. 거짓말이라면 고통에 온몸을 비틀었을 텐데.”
“당연하죠. 전 진실만 말했으니까.”
“아니면 네가 아무것도 모른 채 그 남자를 변호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 사실 네가 틀린 건데 그것도 모르고.”
반박하려고 입을 열자 제이든이 손을 들어 올렸다.
“네가 얼마나 번지르르하게 말하든 조사는 진행될 거야. 악감정을 푸는 방식은 여러 가지인데 굳이 멜러니를 들먹인 이유가 있을 테고. 게다가 그 남자, 희한하게도 죽은 왕자와 겹치는 특징이 꽤 많거든.”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였다. 나는 일단 물러나겠다는 듯 상체를 뒤로 뺐다.
“……그럼에도 거듭 말씀드리건대 레이몬드의 신원은 확실해요.”
제이든은 이 화제를 무척이나 기다렸다는 듯 씩 웃었다. 앞서 한 대화는 오직 지금을 위한 밑밥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보니 신원 보증을 무려 신시아가 해 줬더군. 하지만 서명 하나로는 충분하지 않아.”
“……뭐가 더 필요하죠?”
“신시아가 그를 어디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진술이 필요해. 그 애를 만나야겠어.”
갑자기 입술이 바싹 말라 왔다. 제이든이 신시아의 얘기를 꺼내리라 예상 못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러는 건지. 어쩌면 슬슬 체력의 한계가 오는 것일지도 몰랐다.
제이든이 얼굴을 싹 굳히고 싸늘하게 말했다.
“신시아가 보증해 준 레이몬드, 그리고 그 남자와 사귀는 너. 이게 다 우연이라 말하진 않겠지.”
갑자기 취조실의 온도가 급격하게 낮아진 것 같았다. 분위기를 냉각시킨 장본인은 역설적이게도 집어삼킬 듯 불타는 눈빛을 쏘았다. 그는 온몸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넌 신시아의 행방을 알고 있었어.”
“……네, 알아요. 하지만 안 듣고 싶으실 거예요.”
제이든이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살벌한 소리가 밀폐된 공간의 벽을 튕겨 나가며 메아리를 울렸다. 그가 윽박질렀다. 목소리에 가시가 잔뜩 돋아 있었다.
“장난해? 네 애인, 안 살리고 싶나 봐?”
제이든이 신시아를 만나서 처음으로 할 말이 무엇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영원히 물음표로 남겠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침통한 척 눈을 내리깔았다.
“죽었어요.”
“……뭐?”
육체적 죽음만 죽음은 아닐 것이다. 사회에서 사라져 영영 나타나지 않을 테니, 신시아라는 신분도 죽었다고 할 수 있겠지.
나는 동요하는 눈동자를 보고 다시 한번 선고했다.
“신시아 그 애, 죽었다고요.”
***
영겁 같은 침묵이 흘렀다. 나는 한참 뒤 입을 떼었다.
“신시아가 제이든 님을 떠난 건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에요.”
애초에 식을 사랑이 없는데 어떻게 식겠어?
“……지금 농담할 상황 아니란 거, 잘 알 텐데.”
제이든의 목소리가 가냘프도록 파들파들 떨렸다. 그가 주먹을 말아 쥐고 테이블 아래로 손을 끌어 내렸다. 나는 곧 다가올 고통을 대비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떠나기 며칠 전에 그 애가 저한테만 말해 줬어요. 불치병에 걸린 것을 얼마 전에 알았다고, 머지않아 죽을 거라고. 그 애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슬퍼하길 바라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조용히 생을 마감할 거라고…… 저한테 도와 달라고 그랬어요.”
제이든 말 그대로였다. 온몸을 쥐어짜 내는 듯한 고통이 별안간 닥쳤다. 몸속의 장기가 잘게 분해되었다가 다시 붙는 것처럼 죽도록 아팠다. 차라리 심장에 칼이 꽂혔더라도 이만큼 아프진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