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붕괴가 진행되고 있는 건물에 오래 있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나는 거침없이 길을 찾으면서 소리 지르듯 말했다.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지 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곳에 들어와?”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어.”
등 뒤에서 시무룩한 목소리가 들렸다. 난 지금 레이의 변명 따위를 듣고 싶은 게 아니었다.
“레이.”
나는 우뚝 멈춰 서고 그를 노려보았다. 레이는 어깨를 움찔 떨면서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고요한 시선이 내 무사함을 재차 실감했다. 그 헌신이 한 번도 숨 막힌다고 느낀 적 없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내가 왜 화내는지 정말 몰라? 지금 우리가 천장에 깔려 죽지 않고 얘기하고 있는 게 단순한 행운 같아? 아니, 이건 기적이야.”
아무리 내가 걱정됐어도 여기에 들어오면 안 됐다. 붕괴 진행 중인 건물에 들어오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근데 쟤는 그걸 알고도 날 위해 죽음을 감수했고. 쟤는 왜 자기 목숨 소중한 걸 모를까?
“……넌 죽을 수도 있었어. 무모하게 뛰어들었다가 죽을 수도 있었다고!”
레이는 말없이 내 분노를 맞았다. 순응적인 태도를 보자니 화낼 기운도 없어졌다. 나는 말투를 누그러뜨리고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다음부터 이러지 않겠다고 약속해. 내 위험은 나만의 것이야. 내가 이겨 내야 하는 일에 괜히 너까지 목숨 걸 필요 없어.”
레이는 시선을 내려 바들바들 떨고 있는 내 팔을 바라봤다.
화염과의 전쟁에서 최전선에 섰던 상체는 화상이라는 상처를 내고 검게 변했다. 그가 인상을 쓰며 조심스레 상처를 살폈다.
“다쳤네, 많이.”
이마에서 피가 흐르는 애한텐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애초에 레이는 본인의 꼴이 엉망인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너 진짜.”
“난 널 위해서라면 뭐든 할 거야, 혜라.”
어둠 속에서도 그의 녹안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별처럼 반짝였다. 영원한 희생을 맹세하는 목소리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을 갖고 있었다.
……진짜 쟤는 사람 신경 쓰이게 하는 데 뭐 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좋아, 마음대로 해. 대신 알아 둬. 네가 날 위해 목숨을 걸면 난 그런 널 살리기 위해 내 목숨을 걸 거야.”
레이는 알겠다는 듯 웃었다. 나는 그 미소에서 절대 그런 일이 생기도록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읽었지만, 속고 싶어서 속아 넘어가 줬다.
***
카이사르 28년 1월 1일 새벽 4시 44분.
레이는 출구를 코앞에 두고 발걸음을 늦추었다. 그게 얼마나 코앞이었냐면 딱 한 발자국만 가면 바깥 공기를 마실 수 있었다. 그가 황급히 말했다.
“잠깐만, 할 말이 있어.”
의아해하며 뒤를 돌아보자 레이가 그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잘근잘근 깨문 입술에는 피딱지가 나 있었다. 어쩐지 그는 불안해했다.
“뭔데?”
“……널 찾으러 들어오면서 물의 정령을 불러냈어.”
그 정도야 문제 되지 않았다. 극한의 상황에 내몰려 잠재적 힘을 발현했다고 하지 뭐. 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레이의 표정을 보니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게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주저하며 입을 떼었다.
“내 과거에 대해 말 못…….”
별안간 천장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1초라도 지체했다간 정말로 비명횡사할 것 같았다. 나는 나중에 이야기하자며 그의 손을 이끌었다.
바라마지 않았던 찬 공기가 온몸을 감쌌고, 오매불망 우리를 기다리던 할리는 괴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나는 오열하는 할리를 달래며 생각했다.
한밤의 소동은 이로써 끝이다. 조금 다치긴 했지만 데이타스 약초 하나 먹으면 10분 만에 나을 것이다. 우리 모두 무사했고, 그거면 충분했다.
나는 활짝 웃으며 레이를 쳐다보았다. 그는 기쁨의 환성을 질러도 모자랄 순간에 괴물을 목격한 사람처럼 얼굴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나는 그의 어깨를 짚었다. 패닉에 빠진 눈동자는 절규하고 있었다. 그 감정이 지나치게 강렬해서 나조차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왜 그래?”
생뚱맞게도, 그리고 절망스럽게도 답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옹기종기 모여 우리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사람들 중 누군가가 벼락같이 외쳤다.
“프레이야 멜러니!”
그것이 마법의 단어라도 되는 양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레이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다. 그가 꽃이었다면 금방이라도 꺾일 것 같았다.
나는 의문 어린 시선으로 레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군중을 헤치고 통통한 체격의 남자가 선두로 나왔다.
“게일?”
게일은 레이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시선을 고정하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초리로 레이를 훑어봤다.
“까만 머리를 보니 이제야 알겠군. 처음부터 찝찝하다 했어. 설마하니 마지막 멜러니를 여기서 볼 줄이야…….”
도대체 무슨 소리야? 중간에 낀 나는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눈알만 굴렸다. 그러나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말뜻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소란은 더욱 커졌고, 할리는 턱이 빠지도록 입을 벌렸다. 잔뜩 확장된 동공은 충격과 약간의 배신감으로 정처 없이 흔들렸다.
나는 불현듯 예감했다. 한밤의 불행은 끝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레이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제 머리카락 색을 확인했다. 손가락 끝에 검은 잿더미가 묻어 나오자 그는 심장 한가운데가 꿰뚫린 사람처럼 고통스러워했다. 나는 레이 옆에 나란히 서고 게일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시죠?”
고작 한마디 했을 뿐인데, 안타깝게도 내 시건방진 태도가 게일의 화를 더욱 돋웠나 보다. 그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눈알을 찌를 듯 노려보는 시선이 제법 매서웠다.
“황태자 전하의 보좌관이 반란 분자를 눈앞에 두고도 감싸 주는 꼴이란……. 아하, 이제 보니 혜라 양도 공범이었나 보군?”
농담이라면 제법 웃겼다. 나는 바로 비웃어 주려다가 눈앞의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공포에 절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레이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고저 없는 목소리를 꾸며 냈다. 맞잡고 있는 그의 손이 얼음장 같았다.
“제 이름은 레이몬드입니다. 어떤 근거로 제가 멜러니 왕자라 우기시는 건진 모르겠으나 착각이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왕자는 전쟁 중 죽지 않았습니까.”
나는 검게 더렵혀진 머리카락을 생경하게 쳐다보며 생각했다. 프레이야 멜러니가 누군가 했더니 데우스 왕국의 왕자였구나. 그래, 아로네가 알려 줬던 것 같기도 하다.
‘근데 걔가 레이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라는 거지? ……잠깐, 그때 아로네가 정확히 뭐라고 했더라?’
내가 한 번 듣고 바로 잊어버렸던 기억을 되살리는 동안에도 게일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착각? 수십 마리의 상급 정령을 동시에 불러낼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알기론 세상에 딱 한 명이었네. 변장까지 하며 멀쩡히 살아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
이상하게도 게일이 거짓말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나는 게일과 레이를 혼란스레 번갈아 봤다.
분노로 물든 녹안을 보니 과거의 기억이 명료해지는 것도 같았다.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의식에서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멍하니 사유했다.
‘초상화를 본 적은 없지만, 듣기론 숲처럼 푸른 녹안과 어두운 갈색 머리칼이 신이 공들여 만든 것 같았대.’
지금 레이의 머리칼이 어두운 갈색과 비슷하지 않나?
‘엄밀히 말해서 한 명만 살아남은 건 아니야. 고일인지 가일인지 하는 남자도 간신히 생을 부지했어.’
게일이 ‘감히’를 버릇처럼 말하던 게 패전국 출신 귀족여서였던 거야?
‘살인죄. 근데 진짜로 사람을 죽인 건 아니고 누명 쓴 거야. 하지만 그걸 증명할 수단은 없어.’
레이야, 네가 대역 죄인으로 몰렸다는 그 비운의 왕자야?
‘……게일이 내 어머니의 죽음에 관여했거든.’
그래서 게일을 보고 놀랐던 거였어?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멀쩡히 살아 있어서?
‘마지막으로 본 게 아주 어릴 적이기도 하고, 아마 내가 살아 있을 거라는 생각 자체를 못 했을 거야. 변신 물약의 부작용으로 머리가 이렇게 되어 버리기도 했고.’
나는 저릿한 손을 꽉 쥐었다. 이제야 알아챈 게 바보 같을 정도로 힌트는 이미 충분했다. 내가 멍청하고 무지해서 다양한 시간대에 흩어진 단서를 모아 조합하지 못했을 뿐.
엄청난 비밀을 극적인 상황에서 알게 되어 더욱 충격이 컸다. 나는 레이의 이름을 작게 읊조렸다. 불안하게 떨리는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현실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아까 네가 하려던 말이 이거였구나. 물의 정령을 불러내는 것을 보고 게일이 네 정체를 눈치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거야. 하지만 정말 결정적인 단서는 네 머리색이었고.
게일이 길길이 날뛰며 윽박질렀다.
“프레이야 멜러니! 어디 한번 그 잘난 입을 놀려 보시지. 네가 황제 폐하를 음해하려 황궁에 잠입하지 않았다고 반박해 보란 말이야!”
레이는 내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는 내가 모든 걸 깨달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절망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가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죄책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 귓가에 간신히 닿을 만큼 작은 소리였는데도 고함을 지르는 것처럼 들렸다. 갑자기 알게 된 진실의 대가가 너무나도 거세서 작은 자극에서 마음이 요동쳤다.
“미안해. 나는 그저……. 미안해.”
나는 넋 나간 채로 레이를 쳐다봤다. 세상을 잃은 사람이 꼭 그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