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7/138)

<127화>

지금 전하가 제게 쏟는 관심도 그런 종류라 확신합니다. 제 집착을 혐오하셨던 전하가 정확히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죠.

제가 느꼈던 비참한 감정을 전하께 그대로 돌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혜라의 부탁을 들어주는 척 전하를 만났어요. 그동안 어떠셨나요? 집착이든 사랑이든 사람을 비굴하게 만들지 않던가요?

이 편지 이후로 더는 전하를 만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혜라를 미끼로 연락하셔도 소용없을 거라는 말씀도 미리 드려야 할 것 같네요. 많은 일들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건강하세요.

-아로네 님프.」

어디선가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누군가에겐 새로운 시작일 소리가 제이든에겐 패배 선고처럼 들렸다.

《제10장: 강혜라는 강하다》

JMT공금

새해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청아한 소리가 오케스트라 선율 사이의 공백을 메웠다.

사람들은 약속하기라도 한 듯 와인 잔을 들어 올리고 서로의 무탈한 한 해를 기원했다. 알코올과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취한 사람들은 모두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는 후끈 달아오른 분위기에 휩쓸려 옆에 있던 레이를 냅다 끌어안았다.

“해피 뉴 이어! 아니, 행복한 새해!”

레이가 내 어깨를 제 품으로 더욱 끌어당기며 귓가에 속삭였다.

“취했어? 돌아갈까?”

내가 취했다고 확신하는 어조였다. 즐거움에 취할 수도 있다면…… 그래, 취했다고 할 수 있겠군.

나는 허리에 두른 손에 힘을 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작정하고 꾸민 레이는 말 그대로 자체 발광이었다.

백옥처럼 매끈한 피부와 창백한 금발이 그의 외모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이마를 덮은 차분한 머리카락 좀 봐. 탈색 세 번을 해도 저렇게 연한 색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레이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비단 같은 실이 손가락 틈 사이로 빠져나갔다.

“난 말짱해. 진짜 취한 건 쟤지.”

나는 저 멀리 있는 할리를 곁눈질했다.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할리는 루나와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어쭈, 입이 아주 귀에 걸릴 기세야.

레이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글쎄, 내가 보기엔 취한 게 아니라 반한 거 같은데?”

“뭐?”

나는 반신반의하며 할리의 표정을 살폈다. 도대체 무슨 얘기 중인 건지 그는 과장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젖혀진 허리는 금방이라도 뚝 부러질 것 같았다.

오른발은 리듬을 타듯 쉴 새 없이 까닥이고 있었는데, 웃긴 건 음악의 박자와 하나도 맞지 않았다. 왜 저렇게 뚝딱거려?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할리의 연애가 심히 우려된다.”

“그래도 분위기는 꽤 화기애애하네.”

그건 사실이었다. 루나는 뺨을 발그레 물들이고 사랑에 빠진 소녀의 눈빛을 띠었다. 허둥거리는 할리의 모습조차 귀엽다는 양 그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둘이 정말로 사귄다면 딸기 같은 커플이 되겠군.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다시 레이와 눈을 맞췄다.

“둘 다 제 짝을 만난 것 같다. 우리처럼. 그치?”

나는 느끼한 윙크를 날렸다. 레이가 못 말리겠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선 춤을 추겠냐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어느새 길게 늘여진 리듬은 로맨틱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레이가 구두 하나 버릴 결심까지 했는데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우리는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구석을 맴돌며 형식을 벗어난 새로운 춤을 시도했다. 레이의 리드는 훌륭했지만 알코올에 절여진 내 발은 영 정신을 못 차렸기 때문이다.

나는 내 꼬락서니가 얼마나 우스울까 생각하며 깔깔거렸다. 레이는 열세 번째 발을 밟히면서도 행복하다는 듯 웃었다. 아놔, 쟤는 날 너무 사랑해서 탈이라니까.

곡이 점점 막바지에 이르면서 제멋대로 움직이던 몸뚱어리도 대충 감을 잡고 바른 스텝을 밟았다. 치마폭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주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레이가 잘했다고 말하듯 코를 찡긋댔다. 지켜보는 시선만 없었다면 뽀뽀를 퍼부어 줬을 정도로 깜찍했다.

4분도 채 되지 않았던 시간이었음에도 여운이 진했다. 레이와 춤을 추면 항상 가슴이 들떴다. 나는 완벽하게 호흡이 맞았던 순간을 복기하며 레이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는 예상치 못한 키스에 숨을 멈췄다. 나는 그 표정이 웃겨서 검지로 그의 볼을 툭 건드렸다.

“나 잠깐 아로네한테 다녀올게. 할 말이 있거든.”

레이가 키스 받은 손등을 어루만졌다.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둘만 있었다면 입술로 이어졌을 키스도, 나의 부재도.

“오래 걸려?”

“아니. 얼마 안 걸릴 거야.”

레이가 얌전히 기다리고 있겠다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그대로 등을 돌리려다가 이쪽에 몰린 시선을 눈치채고 레이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나는 어린아이에게 주의 사항을 나열하듯 엄하게 말했다.

“잘 모르는 사람이 귀찮게 하면 바로 나 불러. 알았지?”

“질투하는 거야?”

레이가 다소 들뜬 어조로 물었다. 내가 질투하길 내심 바라는 것도 같았다.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양 웃음을 터뜨렸다.

“질투는 무슨. 넌 나만 좋아하잖아.”

레이가 입을 열었다 닫고는 말없이 나를 구석으로 끌었다.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는 능청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여긴 사람들 눈에 안 띄어.”

“그래서?”

“뽀뽀해 줘.”

나는 말문이 막혀서 살짝 입을 벌렸다. 레이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개를 숙였고, 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하여간 맨날 뽀뽀할 궁리만 하지, 너.”

“아니야. 난 너한테 사랑받을 궁리만 해.”

레이가 입술 사이의 거리를 2cm만 남기고 이래도 안 해 줄 거냐는 듯 예쁘게 눈웃음을 지었다. 정말 안 넘어가곤 못 배기겠네.

쪽. 나는 가볍게 입을 맞췄다.

“너 진짜 여우 같은 거 알지?”

레이가 낮게 웃으며 상체를 세웠다. 나는 그를 짧게 흘기곤 아로네를 찾아 눈을 굴렸다. 그는 주최자답게 파티장 한가운데에서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아는 유명 인사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편안한 분위기와 간간이 들려오는 웃음소리는 그들이 꽤나 친밀한 사이라는 것을 알려 줬다. 그래서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고민했다. 내가 대화의 흐름을 끊는 건 아닐까?

아무래도 기다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레이에게 돌아가려는데, 타이밍 좋게도 아로네와 눈이 마주쳤다.

아로네는 순간의 고민도 없이 주위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곧장 내게 왔다. 그가 가볍게 나를 끌어안았다.

“이미 수도 없이 말했지만 드레스 정말 잘 어울린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그치? 제국에서 제일 유명하고 실력 있는 디자이너한테 맡긴 거야. 너도 하나 맞추고 싶으면 얘기해. 내가 걔랑 친분이 좀 두텁거든.”

아로네가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느른한 미소에서 풍만한 행복감이 느껴졌다. 그가 듣는 귀를 피해 나를 구석으로 데려갔다.

“나한테 할 말 있는 거지?”

나는 유리창 너머 거리를 밝힌 가로등을 바라보았다. 저녁부터 내리던 함박눈은 어느새 그친 뒤였고, 가로등 아래 소복이 쌓인 눈길에는 점 같은 발자국이 나 있었다. 일직선으로 이어진 자국은 한 사람의 것이었다.

‘왠지 쓸쓸해 보이는걸.’

나는 아로네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덩달아 목소리도 낮아졌다.

“제이든 말이야. 지금쯤이면 황궁에 돌아가고도 남았겠지?”

“그랬을 수도 있고, 어쩌면 한 발자국도 못 뗐을 수도 있겠다.”

아로네는 편지를 나에게 보여 주지 않았다. 보여 달라고 떼쓸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서 굳이 뭐라고 썼냐고 묻진 않았지만, 대강 예상할 순 있었다. 넌 지금까지 나한테 놀아난 거야. 이 말을 고급스럽게 하지 않았을까?

나는 아로네 등 뒤로 보이는 두 남자를 힐긋거렸다.

무스탕을 입고 있는 데네브의 모습이 정말 장관이었다. 그는 옷이 마음에 드는 척 애써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옆에 선 에단은 비교적 단정했다.

데네브는 그의 평범한 정장을 부러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러던 중 나와 눈이 마주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나는 당황으로 물드는 얼굴을 즐겁게 관망하다가 다시 아로네를 바라보았다.

“제이든은 버려졌고……. 데네브는 어떻게 할 거야?”

“어려운 질문이네.”

아로네가 뒤돌아 데네브를 응시했다. 안절부절못하던 데네브는 아로네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사르르 눈웃음을 지었다.

으악! 저게 뭐람? 소리 없이 경악하는 날 보고 에단이 피식 웃었다. 동시에 어디선가 쿵 소리가 나서 고개를 돌리니 레이가 아니꼽다는 눈초리로 에단을 째려보고 있었다.

“참나, 질투하는 건 본인이구만?”

아로네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나 말하는 거야?”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서 데네브는?”

아로네는 내 눈동자 속에 해답이 있기라도 한 듯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는 한참 후에야 입을 떼었다.

“데네브가 등불을 가져왔다고 말했던 거 기억나?”

“응. 이제 와서 위해 주는 척 군다며 화냈었잖아.”

“그 이후로 많이 생각해 봤어. 그 위선이 한철일지, 계속될지.”

제이든은 명백히 전자의 경우였다. 아로네는 그의 감정이 소유욕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내가 갖기는 싫은데 남이 갖는 건 더더욱 싫다는, 더 나아가 나만 사랑해야 하는 애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꼴은 죽어도 못 보겠다는 이기적인 소유욕.

아로네의 눈꺼풀이 일순 불확신을 담고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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