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뿌리째 뽑아 버리겠다는 공녀의 의지는 소름 끼칠 정도였다. 더욱 무서운 점은 그 모든 뒷공작이 갈수록 은밀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바라지 않았던 집착의 올가미는 시도 때도 없이 제이든의 몸을 휘감았다. 올가미를 피해 방 안 깊숙이 숨어도 동조자들이 그를 세상 밖으로 내던졌다. 제이든 본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추격자의 편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관계의 주도권이 본인에게 있다고 믿으며 올가미가 조여 올 때마다 가위로 싹둑 자르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추격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세상에 남은 사냥감이 오직 제이든밖에 없다는 양 그는 간절하고 집요했다.
제이든의 인내심은 나날이 닳았고, 결국 남은 건 지독한 혐오감이었다. 공녀에 대한 기대감이 밑바닥을 친 게 바로 열일곱 살, 아카데미에 들어가던 해의 일이었다.
***
불행한 인생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행복하다고 느낀 적도 없다. 제이든은 아버지의 명령이라는 실에 사지를 묶인 채 꼭두각시 같은 삶을 살았다.
그런 제이든에게도 봄날은 찾아왔다. 아카데미 입학식 날, 그는 한 여자에게 맹렬히 사로잡히며 첫눈에 반하는 감각이 어떤 것인지 생생히 경험했다.
신시아 그 애는 수백 쌍의 눈을 마주 보면서도 말 한마디 더듬지 않고 입학식 선서를 했다. 차분하고 또렷한 목소리에서 그 선서를 잘 해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느껴졌다.
우월 의식에 찌든 귀족 몇몇이 뚫어져라 적대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음에도 신시아의 자세는 곧았다.
심지어 그 애는 선서문의 마지막 문장을 말하며 슬쩍 미소 지었다. 한낮의 햇살처럼 따스하고 여유로운 미소는 어떤 상처도 어루만져 줄 것 같았다.
입학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신입생이 있다는 건 미리 들어 알고 있었다. 100년 만에 나타난 천재가 과거의 역사와 달리 평민이어서 흥미로워했던 기억도 있다. 다만, 공부만 잘하는 줄 알았던 범생이가 내면도 단단해 보일 줄은 몰랐다.
제이든은 자신의 불순한 마음과 관계없이 신시아와 친분을 쌓아 두면 나쁠 것 없다고 판단했다.
어쨌거나 그가 굳이 아카데미에 들어온 이유는 황태자로서 국영 교육 기관을 홍보하는 목적 외에 미래에 그와 함께 일할 인재를 찾는다는 목적도 있었으니까.
제이든은 그의 외모와 직위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잘 알고 있었고, 주어진 무기를 활용하는 데에도 꽤 능숙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타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이든 헤인. 내 이름 기억해둬.”
신시아는 상냥하고 똑똑했다. 하지만 그 애의 입가에서 떠나지 않는 미소는 명백한 거리감을 담고 있었다. 제이든 또한 곤란한 상대를 만났을 때 미소라는 가면을 곧잘 쓰기 때문에 신시아의 벽을 눈치챌 수 있었다.
신시아의 호감을 쉽게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도리어 신시아가 지나치게 빨리 마음을 열었다면 그 애 또한 겉모습에 홀리는 족속이라 여기고 흥미가 식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편으로 제이든은 진정한 관계를 맺어 본 적이 없어 겉모습이 아닌 무엇으로 신시아의 벽을 부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제이든이 할 수 있는 건 만나는 횟수를 늘리는 게 다였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공을 들여 신시아와 이야기하고 편지를 주고받았다. 인내한 보람이 있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신시아는 점차 마음을 여는 것처럼 보였다.
신시아는 학업과 정령술사로서의 미래가 아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던 보육원 생활에 대해 털어놓았다.
제이든은 신시아의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분노하며 정상적인 관계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달았다. 그의 마음이 갈수록 깊어진다는 것 또한.
물론 공녀는 꾸준히 훼방을 놓았지만 그 정도 문제야 제이든 본인 선에서 처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정말 문제는 언제나 그랬듯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당사자의 의견도 묻지 않고 공녀와의 약혼을 확정했다. 난데없이 불러서 한 말은 제이든의 이성을 잃게 만들기 충분했다.
“상의 끝에 님프 가문과 연을 맺기로 했다.”
멋대로 남의 인생을 휘두르는 그 행동은 폭력이나 다름없었다. 제이든은 거세게 항의했지만 황제는 꿈쩍하지 않았다. 그저 냉담한 시선으로 축객령을 내릴 뿐.
‘사람들이 그러는데 우리가 나중에 결혼할 거래.’
언젠가 공녀가 했던 말이 환청처럼 들렸다. 제이든은 한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해결책을 골몰했다.
공녀와 결혼했을 때의 기대 가치가 얼마나 높은지 안다. 하지만 제이든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전부터 정략결혼의 폐해를 보며 자라 왔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처럼 불행한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따로 두고도 오직 국익에 부합하는 결혼을 해서 연인과 가짜 연인 모두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힘들게 쟁취한 그의 사랑은 완전무결해야 했다.
“……내가 곧 제국이야. 신시아를 버리면서까지 공작가와 결속을 다질 필요 없어.”
제이든은 마지막 첫사랑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그와 함께하지 않는 미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신시아를 다른 남자에게 보내느니 차라리 미친 척 아버지에게 대드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래서 제이든은 황후 탄신 연회에 파트너로 신시아를 데려갔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증오하는 부모는 황급히 자리를 떴고, 공녀는 얼굴을 새하얗게 물들이며 간신히 악담을 내뱉었다.
핏발 선 눈에 독기가 가득했다. 혹여나 공녀가 다시 괴롭힘을 시작하는 건 아닐까 순간 우려했지만, 다행히도 그는 잠잠했다.
……그러고 보니 공녀는 어떤 계기로 신시아를 놔줬지? 어떤 전조도 없이 이루어진 일이라 마땅한 이유를 추측하기 어려웠다.
제이든은 금세 공녀의 생각을 지워 버렸다. 그에게 있어 공녀란 10년 넘게 그를 쫒아 다닌 끔찍한 여자이자 신시아를 괴롭힌 악녀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외양도, 성격도, 사고방식도, 그 무엇 하나 평범하지 않은 여자가 어느 날 나타나 공녀를 옹호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혐오로 얼룩졌던 평가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게 바로 그 무렵이었다.
혜라는 기를 쓰고 공녀를 변호했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묘사하는 공녀와 제이든이 아는 공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제이든은 혜라를 조금도 믿지 않았다. 차라리 신시아가 사실은 남자라고 하는 게 더 신빙성 있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제이든은 몰랐다. 헛소리라 치부했던 말이 그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변화를 일구고 있었다는 것을. 신시아를 떠나보내고 완전히 마음 정리를 하고 난 뒤에야 그는 뭔가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녀에게 파혼 동의 계약서를 내밀었을 때였다. 싫다고 물고 늘어질 것을 대비해 차선책을 생각해 온 것이 무안할 정도로 공녀는 흔쾌히 승낙했다.
제이든은 번거롭게 공녀를 설득하지 않아도 돼서 기쁘다가도 내심 생각했다.
‘인생의 절반이 넘는 시간 동안 날 쫓아다녔으면서 이렇게 쉽게 포기한다고?’
그 질문에 혜라는 건방지게도 깔깔거렸다. 눈물을 훔치며 그는 말했다.
“제이든 님을 좋아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요? 세상에 영원한 건 없어요. 힘든 사랑이라면 더더욱 유효 기간이 짧고요. 아로네가 참아 줄 수 있는 건 딱 13년이었나 봐요.”
제이든은 쉽사리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변하지 않을 게 있다면 공녀의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딱 13년뿐이었다고?
혜라가 일부러 거짓말하는 게 분명하다고, 제이든은 확신했다.
……어쩌면 거짓말이길 바라는 것일지도 몰랐다.
***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일주일, 한 달이 넘어도 공녀는 계약을 물러 달라고 찾아오지 않았다. 제이든의 새로운 연인에게 위해를 가하지도 않았다.
난동을 부리든 예전처럼 황후에게 손을 쓰든 분명 공녀가 일을 벌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공녀는 마치 제이든의 인생에서 완전히 빠져 주겠다는 양 더 이상 올가미를 던지지 않았다.
언제나 자유로워지길 원했다. 그러나 막상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반면 공녀는 본인의 숙명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처럼 거침없이 도전이란 선박에 올랐다. 그동안 갑판에 한가로이 누워 선원들이 부단히 움직이는 걸 관망하기만 했다면, 이제 공녀는 스스로 배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그건 제이든이 아는 공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바람을 타고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선장의 일대기는 말 그대로 풍문에 불과할 터였다.
제이든은 공녀의 변화를 믿지 않았음과 동시에 믿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제자리에 서서 어떻게 하면 정략결혼을 피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누구보다 결혼에 얽매여 있었던 공녀가 먼저 굴레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은 인정의 문제가 아니라 회피의 문제라는 걸 한참 뒤에 알았다. 제이든이 자각한 건 혜라의 말 때문이었다.
그때 제이든은 공녀의 인터뷰를 보고 생각에 잠겨 있던 참이었다. 바꿀 수 없는 걸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바람에 오랫동안 시간을 허비했다고?
“……허, 누가 바꿔 달라고 사정했던가?”
공개적으로 저격하는 배포가 놀라웠다. 제이든은 공녀가 무슨 목적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제이든이라도 그 의뭉스러운 여자의 속을 들여다보는 건 어려웠다. 대신 그 여자의 마음을 제 손안에 둔 사람은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