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4/138)

<124화>

데네브는 고요한 방 안에서 천천히 사색에 젖어 들어갔다.

처음부터 아로네가 못됐던 것은 아니었다. 분명 아로네가 여느 아이들처럼 해맑고 착했던 시절도 있었다. 허무맹랑한 전설 같지만 분명 님프 가문도 그럭저럭 화목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아로네의 손을 뿌리치던 그날부터 서서히 균열이 생긴 것 같다.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아로네를 피했다. 어쩌다 마주쳐도 인사 한마디 없이 쌩하니 지나칠 뿐이었다.

눈치 하나는 비상한 아로네가 달라진 아버지를 알아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관심 좀 가져 달라는 애원은 난동으로 이어졌고, 그때마다 아버지는 아로네를 호되게 꾸짖었다. 아로네는 그마저도 기꺼웠던 게 분명하다.

그 애는 아버지가 정말로 자신을 포기할까 싶어 얼마간 자중하다가도 미치도록 외로워지면 다시 사고를 쳤다. 영악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데네브는 아로네처럼 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사랑받지 못하는 애가 어떻게 되는지 두 눈으로 봐 왔기 때문에 데네브는 절대로 아버지의 관심을 잃고 싶지 않았다. 실낱같은 관심일지언정.

데네브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이란 반항아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악한 마음을 옮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소란과 난동으로부터 유리된 채 자신만의 길을 걸었다. 아로네의 말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음에도 데네브는 모른 척했다.

지금까지 그는 단 한 번도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비로소 살 것 같다는 듯 웃는 아로네의 사진을 보기 전까진 그랬다.

“……아로네는 제 발로 나간 게 아니야.”

데네브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짙은 안개가 걷힌 듯 머릿속이 맑았다. 이제야 그는 아로네의 삶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아로네는 자발적으로 독립한 게 아니다. 사실은 나와 아버지가 그 애를 내쫓은 거나 다름없다. 사람들의 비난에도 맞는 구석이 조금쯤은 있던 것이다. 데네브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 애 스스로 악인이 된 게 아니었어. 방치와 무관심이 그 애를 충동질했지.”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혀 명백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 저 자신이 부끄럽고 한심했다. 데네브는 머리를 감싸 쥐며 고개를 숙였다.

어린 날의 제가 왜 방관을 택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저 또한 아버지에게 버림을 당할까 봐 두려웠다는 변명으로는 부족했다.

이제껏 인지하지 못한 기억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데네브는 한참 동안 후회와 자책감에 매몰되어 침묵했다. 왜 지금에서야 알았을까?

‘뭐 잘못 먹었어? 평소처럼 굴어. 어차피 네 알 바 아니잖아.’

정말로 어긋났던 건 나였을 지도.

***

데네브는 망가진 남매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다. 용서를 구하고 기회를 달라 부탁하고 싶었다.

어쩌면 죄책감을 덜고자 하는 이기심일 수도 있다. 아로네의 존재를 부정하며 사는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다는 아집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로네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아로네가 쉽게 용서해 주지 않을 거란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쫓기듯 나오는 모습을 그 여자한테 들키리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혼자만의 힘으로는 가게의 문턱도 못 넘을 것 같아서 데네브는 혜라에게 부탁했다. 아로네랑 화해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혜라는 고민도 안 하고 바로 거절했다. 깐죽거리는 태도가 건방졌지만 차마 화낼 수 없었다. 내가 한 짓은 내가 제일 잘 알고, 그 여자는 아로네의 하나뿐인 친구였으니까.

그래서 혜라가 생각이 바뀌었다며 찾아왔을 때 놀랐다. 혜라는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고 말했고, 데네브는 혜라의 표정이 수상쩍어서 고민하다가도 그 외에 마땅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라 결국 승낙했다.

그 끄덕임 하나 때문에 인형극을 하고 화보까지 찍을 줄은 몰랐다. 도와준다더니 자신을 광대로 만들어 버리는 혜라에 데네브는 악마와 손을 잡았나 싶어 내심 후회했다.

그러나 내심 즐거워하는 아로네를 보면 광대 짓이야 평생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네브는 우스꽝스러운 짓을 함으로써 아로네와 만날 기회를 얻었다. 그중 여섯 번째 만남은 유난히 특별했다. 처음으로 혜라의 입김이 닿지 않은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로네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밤낮으로 고민했다. 소통하지 않은 세월은 너무나 길어 데네브가 떠올릴 수 있는 건 딱 하나였다.

그는 아로네가 등불 축제를 좋아하던 기억을 간신히 생각해 내고 거금을 들여 라크리마 호수를 빌렸다.

달빛이 내려앉은 호수는 신비로운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는 미리 준비해 놓은 나룻배에 아로네를 태우고 바람의 정령을 부려 호수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아로네는 일렁이는 물길만 담담히 바라봤다. 데네브는 본인이 혹여 실수를 했나 걱정했다. 축제만큼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그 근처는 따라갔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뭘 간과했지?

아로네의 입술은 데네브가 상자에서 등불을 꺼냈을 때 열렸다. 반짝이는 눈동자가 등불의 빛 때문인지, 아니면 물기가 차오른 건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등불 축제 좋아한다는 거, 알고 있었어?”

책망하는 어투였다. 데네브는 용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응.”

“그동안 왜 그랬어?”

그동안 아로네는 단 한 번도 과거를 묻지 않았다. 입 밖에 내뱉는 것도 싫어서일까, 혹은 이야기한들 과거의 상처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무용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겹겹이 쌓인 울분을 온몸으로 분출하는 아로네를 보니 어쩌면 두 가지 경우 모두인 것 같았다.

데네브는 원망의 시선을 온전히 받아 내지 못하고 결국 고개를 숙였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미안해.”

이상하게도 사과하면 할수록 마음은 납덩이를 매단 것처럼 점점 더 무거워졌다. 데네브는 서럽게 눈물을 흘리는 아로네를 보며 계속 사과했다.

과거로부터 날아온 부메랑이 그의 가슴에 꽂혀 선혈이 흘렀다. 등불은 끝끝내 호수 위로 떠오르지 못했다.

《제이든 외전: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JMT공금

제이든이 여섯 살 되던 해,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작은 사교 모임을 만들어 줬다. 엄선되어 뽑힌 초대자들은 꽤나 평범하지 않았다.

마법에 두각을 보이는 카터 후작가의 사생아와 님프 공작가의 외동딸. 그들은 제이든 또래 중 가장 잠재력이 뛰어난 아이들이었다. 차후 제국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운명을 타고났다는 뜻이다.

영특한 제이든은 친구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는 사탕 발린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제이든은 그의 아버지가 이중적이고 계산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 싫었다. 하지만 제이든은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는 법을 몰랐고, 결국 정해진 요일이 다가올 때마다 어느새 익숙해진 애들을 만나러 갈 수밖에 없었다.

제이든은 그 모임을 치가 떨리도록 싫어했다.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모임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끊임없이 신경을 건드리는 공녀 때문이기도 했다.

공녀는 제이든을 처음 만난 날,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대뜸 헛소리를 했다.

“사람들이 그러는데 우리가 나중에 결혼할 거래.”

제이든은 두 번 놀랐다. 제국의 하나뿐인 공녀치고는 놀랍도록 예의가 없어서 첫 번째로 놀랐고, 처음 만난 사이에 결혼을 논하는 무식함에 두 번째로 놀랐다.

충격이 가시고 난 다음에는 분노가 휘몰아쳤다. 황태자를 상대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다니는 멍청한 사람들이 있다니.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그랬지?”

“다들 그러던데.”

공녀는 그저 천진난만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랑 추잡한 소문에 얽혔는데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지? 공녀가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

“너랑 결혼해 주면 날 좋아해 줄 거야? 내가 원하는 만큼 관심을 주고, 영원히 날 버리지 않을 거야?”

철없는 질문이었다. 제이든은 농담인 줄 알고 웃어넘기려고 했지만 진지한 눈동자를 보고 진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뭔가 단단히 착각한 모양인데, 난 너랑 결혼하고 싶다고 한 적 없어.”

“……너도 날 싫어하나 보구나.”

공녀가 암울하게 중얼거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제이든은 난감한 기색으로 눈알을 굴렸다. 분명 난 옳은 말을 했을 뿐인데 왜 내가 눈치를 봐야 하지? 초면에 결혼하자는 사람이 비정상적인 거 아닌가?

울음을 참는 공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감정의 크기와 비례하여 치아에 짓눌린 입술은 기어코 피를 냈다.

제이든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고 적선하듯 위로의 말을 뱉었다. 억지로 나온 자리에서 여자애가 우는 모습까지 보기 싫었다.

“널 싫어한다고 말한 적 없어. 그저 결혼을 입에 담기엔 너무 어리지 않나 싶은 거지.”

공녀가 슬그머니 고개를 올리고 희망적인 어조로 물었다.

“……그럼 나중엔?”

“모르지. 마음이 달라질 수도.”

별 뜻 없는 말이었지만 공녀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양 눈을 빛냈다. 피처럼 붉은 입술이 가로로 길게 찢어졌다. 얼핏 사악해 보이기도 했다. 제이든은 이유 모를 미소를 보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감지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직감은 옳았다. 그날부로 공녀는 기를 쓰며 제이든의 마음을 사려고 노력했다.

야심 차게 시작되었던 모임이 아무런 이익도 낳지 못하고 파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그는 목표에 방해되는 장애물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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