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나는 분위기를 띄울 요량으로 농담했다.
“약간 상견례 하는 것 같지 않아? 하나밖에 없는 가족한테 결혼 허락받으러 온 느낌.”
“농담은.”
아로네가 은근히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이쯤에서 레이가 ‘혜라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겠습니다. 이 결혼 허락해 주세요!’라고 치고 나올 법했는데, 그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평소의 능청을 잃고 말았다.
반대로 아로네는 여유가 넘쳤다. 표정만 보면 나랑 단둘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식사 도중에 레이를 꼼꼼히 뜯어보는 시선은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다. 저 눈빛을 분명 옷 만들 때 봤던 것 같은데.
나는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만큼 경직된 레이가 안쓰러워서 쓸데없는 심부름을 시켰다. 사실은 그냥 웨이터를 불러도 됐는데.
“레이야, 나 시원한 물 한 잔만 가져다줄래?”
“당연하지.”
레이는 고맙다는 듯 내 어깨를 살짝 쓸고 문밖으로 나갔다. 나는 문이 닫히자마자 아로네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어때?”
“탐탁지는 않지만 격 떨어지는 사람 같지는 않네.”
아로네는 내가 누굴 데려오든 탐탁지 않아 했을 것이다. 쟤도 날 너무 좋아해서 탈이라니까.
“마음에 든다는 얘기를 왜 그렇게 길게 해.”
“내가 뭘.”
나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돌리는 아로네가 웃겨서 피식거렸다. 때마침 레이가 얼음이 동동 떠다니는 물컵을 들고 들어왔다. 잠깐이라도 숨을 돌린 덕분인지 그는 방금 전보다 살만해 보였다.
그러나 다시 아로네를 마주 보고 앉은 순간, 레이는 다시 목석처럼 몸을 뻣뻣이 굳혔다. 나는 식사 내내 잔뜩 얼은 채로 아로네의 질문에 대답하는 레이를 보고 숨죽여 웃었다.
평소답지 않은 모습이 귀여우니까 아로네가 인정해 줬다는 얘기는 좀 나중에 해 줘야지.
아로네가 냅킨으로 입술을 닦고 조곤조곤 말했다.
《데네브 외전: 내가 왜 그랬을까》
JMT공금
“다음 주에 파티를 해. 시간 되면 오든가.”
데네브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 눈을 끔벅였다. 언제나 단답으로 대꾸하기 일쑤였던 아로네가 먼저 손을 내밀다니.
그동안 아로네에게 기울인 노력이 아예 헛수고는 아니었구나 싶어서 데네브는 내심 안도했다. 자연스레 입가에 다정한 미소가 걸렸다.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가야지.”
아로네가 가늠하듯 데네브의 눈을 응시했다. 그가 무심하게 말했다.
“내가 만든 옷을 입어야 하는데도?”
“네가 만든 거라면 뭐든 상관없어.”
데네브는 더없이 진심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아로네의 취향은 데네브의 것과 한참 달랐다. 비유하자면 평행선의 양 끝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동생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뭔들 못 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로네는 그 고분고분한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한편으로는 만족하는 것 같았다.
그가 다시 한번 확답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도 아로네를 위해 준비한 디저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채였다.
데네브는 아쉬운 티를 내며 아로네를 배웅했다. 아로네가 그에게 허용한 시간은 고작 1시간인데, 그 짧은 만남으로 도대체 언제 멀어진 사이를 회복할 수 있을지 막막했다.
오늘로써 벌써 일곱 번째 만남이다. 그러나 아로네는 여전히 얼굴을 굳히고 최소한으로만 말했다. 혜라, 그 여자에게 편지로 조언을 구해도 답은 시간대를 막론하고 항상 같았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세요.」
틀에 박힌 충고 뒤에는 뼈아픈 직언이 날아왔다.
「근데 정말 이해 안 돼서 그러는데요. 아로네를 버린 시간이 얼마나 긴데 양심도 없이 그 세월을 고작 한 달 만에 메우려고 하세요?」
삐죽거리는 필체가 편지지에서 떨어져 나와 스스로 발화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한심하다는 눈빛과 비죽 올라간 입매가 저절로 눈앞에 그려져 괴로웠다.
데네브는 질릴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소망을 담아 말했다.
“그럼 꼭 그날 보자, 아로네.”
아로네가 스치듯 웃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인지하는 순간 사라진 미소는 잔상처럼 남아 허공에 둥둥 떠다녔다. 데네브는 잠시 꿈을 꾼 기분으로 귓불을 꼬집었다. 아릿한 통증은 행복한 현실감을 선물했다.
그는 밀려오는 환희를 주체하지 못하고 입꼬리를 씰룩였다. 서재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오늘의 일을 빠짐없이 기록하겠다는 다짐을 담고 있었다.
***
어느 날을 기점으로 아로네의 악명은 시나브로 사그라지고 새로운 평판이 쌓이기 시작했다.
제국의 공식 악녀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는 소문이 데네브의 창문을 넘은 건 새로운 가십에 대한 흥분이 바싹 식었을 때였다. 소문의 주인공과 같은 집에 살면서도 제일 마지막으로 그 변화를 안 것이다.
신시아와의 티타임을 코앞에 두고 시침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그의 보좌관이 물었다.
“데네브 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데네브가 창살 사이로 투과한 햇빛에 눈을 찡그렸다. 보좌관은 조심스럽게 그의 표정을 살피며 이어 말했다.
“요즘 떠돌아다니는 공녀님 소문 말입니다. 공녀님이 딴사람이 됐다는 소문…… 설마 못 들어 보셨습니까?”
그 설마가 맞았다. 데네브는 말도 안 된다며 조롱하듯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는 쓸데없는 소문을 전하고 다니는 보좌관에게 일이나 열심히 하라는 일침을 가했다.
하지만 신시아가 아로네의 마수로부터 벗어나고, 3층 어디선가 생소한 웃음소리가 잊을 만하면 들려오고, 연례행사 같았던 시녀 물갈이가 과거로 사라지면서 데네브는 그 소문을 고민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민도 잠시였다. 아로네는 여전히 데네브에게 날을 세웠고, 그 표정은 19년간 익히 봐 왔던 구제 불능의 것이었다. 심지어 아로네는 길에서 수상쩍은 여자를 주워 온 뒤로 한량처럼 하루 종일 깔깔거리기만 했다.
적어도 예전에는 뭐든 잘하는 걸 찾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은데. 혜라라는 여자가 나타난 뒤로 아로네는 절박함을 손에서 놔 버렸다.
정령술도 못 하는 애가 노력마저 안 하면 어쩌자는 거지? 새사람 됐다는 말이 막살겠다는 결심을 의미하지 않는 이상 소문은 궤변에 불과했다.
“……아로네가 새사람이 되기는 무슨.”
그렇게 고민은 채 5분도 이어지지 못하고 끝나 버렸다. 그 뒤로도 데네브의 판단은 돌처럼 굳어 강한 바람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영영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바위도 엄청난 사건을 계기로 첫 발걸음을 떼었다.
아로네는 19년 내내 크고 작은 사고를 쳐 왔다. 그렇다고 한들 그 애가 온 국민이 알고 있는 국혼을 제멋대로 파기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다섯 살배기 아이조차 제이든을 향한 아로네의 마음을 알았다. 그 정도로 아로네의 외사랑은 유명했고, 맹목적이고도 집착적인 사랑은 해가 갈수록 크기를 불려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데네브는 그 갑작스러운 파혼에 경악하면서도 내심 현실화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아로네는 제이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고, 그 명제는 언제나 참이었으니까.
“무관심에 지쳐 과감한 반항을 부린 거겠지. 한심하기는.”
데네브는 자세한 내막을 알아볼 생각일랑 하지 않은 채 언제나 그랬듯 본인의 일상을 살았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아로네는 지난 과오를 인정하고 제이든을 붙잡지 않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가 신선해서 데네브는 말없이 지나치려는 아로네를 붙잡았다.
“후회 안 해?”
아로네는 생략된 주어를 단번에 눈치챘다. 그가 비웃듯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해야 하나?”
데네브는 같은 공간에 있기도 싫다는 양 바로 자리를 떠 버리는 아로네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흐트러짐 하나 없는 모습은 평상시와 같았는데 후련한 표정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제야 데네브는 정말로 아로네가 외사랑을 접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썩은 우물도 나아질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며칠간 데네브는 아로네의 생각을 했다. 절대 변하지 않으리라 믿었던 감정이 전조도 없이 모래성이 되었다. 아니, 어쩌면 관심이 없어서 명백한 사인을 보고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일 수도.
……하지만 그토록 바랐던 결혼을 왜 제 발로 찼을까? 제이든이 먼저 파혼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한들 거절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젠 기다리는 데 신물이 났던 걸까?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 멋대로 파혼을 진행시켜 버린 아로네가 어리석었다. 한편으로는 반평생 동안 품어온 감정을 싹둑 잘라 버린 아로네가 딴 사람 같아서 이질감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로네가 사생아라는 소식이 밝혀지며 전국은 발칵 뒤집어졌다.
알고 있었냐는 연락을 지인들에게 수없이 받았다. 아버지가 작정하고 숨긴 비밀을 미리 알고 있었을 리 만무했다. 데네브는 그저 당황스러웠다. 아로네의 친모가 사실은 하녀였다고?
아로네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저택이 떠나가라 울부짖었다. 이번만큼은 시끄럽다고 짜증을 부릴 수도 없었다.
굳게 닫힌 문틈 사이로 흘러나온 격렬한 분노가 3층을 잠식했고, 데네브는 비명 소리를 뒤로 한 채 먼 과거를 회상했다. 이제는 흐릿한 기억이지만 그때 느꼈던 감정은 아직도 선연했다.
어머니, 그러니까 데네브의 친어머니가 땅에 묻히던 날이었다. 하늘도 같이 슬퍼해 주듯 비가 주룩주룩 내렸고, 아버지는 우산도 쓰지 않고 멍하니 암갈색 관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