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이런. 이대로라면 잠이 달아나겠는데. 뭐라도 말해서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야겠어.
나는 등을 토닥이는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입을 뗐다.
“있잖아, 너 말이야.”
“응?”
“도대체 어떤 비누를 쓰길래 체향이 그렇게 좋아?”
“……어?”
레이는 잠시간 멍을 때리더니 이윽고 제 손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이 웃었다.
“나 농담한 거 아닌데.”
“알지.”
“근데 왜 그렇게 웃어? 어깨까지 들썩이면서.”
레이가 나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숨결이 귓가를 간질였다.
“그냥 좋아서. 비누는 시내에서 산 거야. 눈에 보이는 아무거나 산 건데 네 마음에 든다니 기쁘네.”
레이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씩 웃었다.
“남아 있는 거 다 사서 나 말고 아무도 못 쓰게 해야겠다. 너만 이 향 맡을 수 있게. 그러면…… 나 좀 자주 안아 주려나?”
레이가 코끝을 맞대고 장난치듯 비볐다. 나는 괜히 부끄러워져서 뒤로 고개를 빼고 툴툴거렸다. 얼굴 만면은 미소로 가득해서 딱히 불평한다는 느낌은 나지 않았다.
“또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네.”
“왜? 나 돈 많이 벌어.”
맞는 말이라서 할 말이 없었다. 나도 꽤나 월급이 높은 편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데 상급 정령술사인 레이 또한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그쪽 부서는 인센티브도 자주 나와서 그것까지 합하면 레이가 나보다 벌이가 좋을지도 몰랐다. 아, 이건 좀 분하네.
“……몰라. 돈 얘기하다 보니까 잠 다 깼다.”
“그렇다고 침대를 벗어나긴 싫지?”
“넌 나를 너무 잘 알아.”
이럴 때마다 레이가 정말 독심술사는 아닐지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뿌듯하다는 듯 실실거리는 모습을 보면 그저 순수하게 나한테 관심이 많은 사람 같아서 금세 의심의 싹이 사라졌다.
사랑의 크기를 기간으로 재단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레이의 마음은 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에 비해 지나치게 크고 깊었다. 나는 문득 그가 좋아한다고 고백하던 때를 떠올렸다.
“이런 말 진짜 상투적이고 뻔한데.”
레이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네가 하면 안 뻔해.”
“너 정말 시도 때도 없구나. 아니, 이게 아니고. ……그때 네가 나한테 그랬지. 나 덕분에 세상 밖으로 나올 용기를 얻었다고.”
“기억하네?”
레이는 놀란 눈치였다. 나는 그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아 눈알을 굴렸다. 아니, 저 얼굴로 난 네가 좋다고 말하는데 그걸 어떻게 잊어? 기억 상실증에 걸리지 않는 이상 자발적으로 그 귀한 기억을 삭제할 리 없지.
레이는 내 시선이 그에게로 다시 돌아온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때 넌 나한테 별로 관심 없었잖아. 그래서 기억 못 할 줄 알았지.”
“너 말 잘했다. 암만 생각해도 우린 그때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내 어떤 점을 보고 그런 중대한 결심을 한 거야?”
생각해 보니 이제야 이런 질문을 한 게 놀라웠다. 호기롭게 꼬셔 보라고 선언한 이후로 계절이 두 번 바뀌었는데 그동안 왜 생각하지 않았지?
레이의 말마따나 그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서? 사는 게 바빠 그날을 돌이킬 여유가 없어서? 아니면 굳이 이유를 듣지 않아도 레이의 진심이 여실히 느껴져서?
뜬금없는 질문에도 레이는 배시시 웃었다. 그가 즉답했다.
“어느 순간 널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어……. 이런 대답은 네 마음에 안 들겠지?”
“그것도 듣기 좋긴 한데, 그래도 궁금하니까 하나만 말해 줘.”
레이는 신중하게 고민했다. 너무 많아서 하나만 꼽기 어렵다고 말하는 얼굴이 어느 때보다 진지해서 괜스레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잠시 후, 그가 깍지를 껴 오며 입을 열었다.
“혹시 그때 기억나? 검술 시험 본다고 케이크도 뒤로하고 연습했던 날.”
기억 안 날 리가 있나. 아직도 그때 느꼈던 감정이 머릿속에 선하다.
언젠가 아로네가 외출이 잦았던 무렵, 그는 대뜸 검술 시험을 보겠다고 통보하고 내가 뭐라 반대할 틈도 없이 볼일을 보러 나갔다.
바짝 검술 수업한 뒤로 다신 목검을 들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완전 청천벽력이었다. 덕분에 나는 신시아를 앞에 세워 두고 엉성한 폼으로 검만 휘둘러야 했다. 얼마나 굴욕적이었던지…….
“그때 내가 너한테 물었잖아. 너는 왜 다른 애들처럼 코르셋을 하지도 않고, 화장도 안 하고, 가식도 안 떠냐고. 어떻게 사람들 반응에서 자유롭냐고.”
“그랬지.”
‘해야 하는 건데 왜 안 해?’가 아니라 ‘어떻게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어?’라는 뉘앙스였다.
“남들 다 한다고 꼭 나까지 해야 해? 난 하고 싶지 않은 짓을 하면서까지 평범함이라는 틀에 나를 끼워 맞추고 싶지 않아. 굳이 안 그래도 날 좋아해 줄 사람은 좋아해 주고, 무엇보다 그렇게 살면 피곤하잖아. 고아하게 군다고 누가 나한테 밥 먹여 주나? 손가락질은 조금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답게 산 대가가 고작 그거라면 난 기꺼이 괴짜라 불릴래.”
“갑자기 무슨……?”
“네가 정확히 이렇게 말했었어. 그때 신시아라는 가면 때문에 지쳐 있을 때라 그런지 네 말이 뇌리에 꽂히더라. 사람들 반응이 어떻든 신경 안 쓴다는 표정과 태도도 명백히 진심이라서…….”
과거를 회상하며 날 살짝 비껴갔던 시선이 다시 직선을 그렸다. 레이가 웃음기를 머금고 말했다.
“글쎄 감명을 받았다고 해야 하나 동경하게 됐다고 해야 하나. 그 뒤로 네 강단 있는 모습이 계속 떠올랐어. 그게 네 무수히 특별한 점 중 하나라는 걸 나중에 깨달았고, 그 시점에선 이미 너한테 반한 후였지.”
레이가 대답이 됐냐는 듯 다정한 눈빛을 보냈다. 나는 어쩐지 속이 답답해서 침묵했다.
그때 말은 쿨하게 했지만 사실 마음 한구석은 괴짜라는 취급에 환멸 난 상태였다. 레이의 물음에 부러 강하게 대꾸한 건 ‘나’를 잃지 않겠다고 거듭 다짐하기 위해서였다.
나와 그들은 태생적으로 다르고 앞으로도 계속 부딪칠 것이므로, 내 의지와 각오를 발화함으로써 난 괜찮고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자기 세뇌하기 위해서.
……근데 레이한테는 위로가 됐다고? 모든 이에게 유별난 내 성격과 가치관이 레이한테는 동경과 감명의 계기가 됐다고? 그럴 수도 있는 거였나?
“……신기하네.”
“뭐가?”
“남들은 단점이라 여긴 걸 너는 장점이라 생각한 게. 아무래도 우리 인연은 하늘이 맺어 줬나 봐. 안 그래?”
넌 나로 인해 너답게 살게 되었고, 난 너로 인해 나 자신을 지켰으니까. 우리는 서로의 숨통을 트여 줬으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는 애정이 흘러넘치는 눈동자를 곧게 응시했다. 시냇물처럼 맑은 홍채에 익숙한 낯이 비췄다. 나는 애정의 샘 한가운데에 떠오른 내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레이를 더 좋아하게 된 것 같다고.
***
일주일 전이었다.
“아로네, 넌 이 사기극이 어떻게 끝났으면 해?”
다소 뜬금없는 질문에도 아로네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마치 같은 질문을 스스로 수십 번 묻고 이미 결정을 내린 사람 같았다.
“내가 느꼈던 감정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았으면 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내가 느꼈던 만큼만.”
“그럼 속이 후련할 거 같아?”
그때 아로네는 희미하게 웃었다. 고요한 눈동자 속을 들여다보며 나는 생각했다.
복수와 닮은 우리의 장난질이 그의 모든 상처를 치유할 순 없겠지만, 그럼에도 아로네는 과거의 기억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따라서 이 말도 안 되는 연극은 반드시 웃음과 함성 속에서 막을 내려야 했다.
물론 데네브와 제이든에겐 잊을 수 없는 비극이 되겠지. 그러나 상처받은 영혼이 둘이 될지 하나가 될지, 혹은 모두에게 해피 엔딩일지는 오직 그들에게 달려 있을 테다.
제이든은 격주마다 벨라와 데이트를 했다. 그들의 연애 전선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사람은 역시 황제와 황후였다. 그들은 아직까지 제이든의 연애에 태클을 걸지 않았다. 일단 가만히 지켜볼 심산인 듯했다.
오늘도 그런 비즈니스적인 만남 중 하루에 해당했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조금 특별한 점은 그 데이트 장소가 그들이 졸업한 ‘세니스 아카데미’라는 점이다.
1년에 한 번씩 아카데미는 성공한 졸업생 몇 명을 초청해 강연을 부탁한다. 황태자만큼 학생들에게 귀감이 될 인물은 없어서 당연히 제이든은 첫 번째로 부탁을 받았다.
그 자리에 굳이 벨라를 데려가는 이유는 순전히 보여 주기 식에 불과하다. 공식 행사에 벨라를 데려갈 정도로 그 사람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 점을 황제에게 어필하기 위해서.
제이든은 그 정도의 쇼를 보여 주면 자연히 성가신 관심도 떨어져 나갈 거라 기대했다.
오늘 한 방 크게 벌이고 그 뒤론 아로네에게 전력을 다할 계획인 것이다. 벨라가 여자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계획이기도 했다. 아니, 황태자의 파트너로 무려 공식 행사에 동행했는데 나중에 어떤 간 큰 인간이 그 사람한테 대시하겠어.
계약 기간이 끝나고 모두가 그들이 헤어졌다고 생각한들 황태자의 그늘은 여전히 벨라에게 드리워져 있겠지. 반면 제이든은 여전히 완벽한 신랑감일 테고.
다시 생각해도 이기적인 요구였다. 벨라의 망설임을 미리 예견하고 막대한 돈을 제안한 제이든이 놀라울 다름이다. 베키와 함께 살 저택을 짓겠다며 바로 수락한 벨라도 다른 의미로 대단하고.
나는 의식의 끈을 현실로 잡아당겼다. 눈을 감았다 뜨자 널찍한 등짝이 시야를 가로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