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화 (115/138)

<115화>

이번 옷은 가짜 날개가 달린 후드 집업인데 모자 끈을 잡아당기면 5분간 허공으로 떠오를 수 있다. 오직 데네브를 위해 제작된 옷이었다.

데네브는 착잡한 얼굴로 날개를 만지작거렸다. 이런 옷을 입게 되어 몹시 치욕스러워 보였다. 나는 그를 숲 한가운데 있는 호수로 이끌었다.

“호수 위를 걸을 거예요.”

“……제정신이야?”

“당연한 걸 물으시네. 에단이 도와줄 거니까 호수에 빠질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아, 끈은 만지지 말고요.”

데네브가 선뜻 용기를 못 내서 그의 등을 살살 밀었다. 그가 두고 보자며 나만 들릴 크기로 경고했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에단에게 신호했다. 데네브는 공기라는 계단을 밟고 깊은 호수 위에 섰다.

“아련한 눈빛을 지으며 호수를 산책하듯 걸을 거예요.”

“뭐? 아련한 눈빛?”

“왜, 그때 데네브 님이 저한테 신시…….”

데네브가 황급히 내 입을 막았다.

“젠장! 하면 되잖아!”

그가 체념한 채 호수 위를 걸었다. 반짝이는 눈망울이 정말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나는 신들린 표정 연기에 감복하며 열광적으로 소리쳤다.

“좋았어! 하늘 한 번 올려다보고! 그렇지! 만세 하듯 양팔을 옆으로…… 바로 그거야! 자, 마지막으로 독수리처럼 포즈를. 아니, 그게 아니라! 나처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예스! 좋아요!”

이 기세를 몰아 나는 전신 수영복을 입고 나오라 말했다. 데네브는 장난치지 말라는 표정으로 날 노려보았다. 보는 눈만 없었다면 내 목을 조를 기세였다.

“보온 마법이랑 방수 마법이 걸려 있어요. 이거 하나면 한겨울에도 감기 걸리지 않고 몇 시간이고 수영할 수 있죠. 대박이죠?”

“앞으로 이런 게 더 있나?”

나는 히죽거리는 걸로 대신 답했다. 데네브는 모든 전의를 상실하고 터덜터덜 탈의실에 들어갔다. 그 뒤로도 나는 한참 동안 괴상한 포즈를 요구하며 감탄사를 내질렀고, 뒤에서 아로네와 에단은 숨죽여 웃었다.

***

데네브는 만신창이가 되고 난 후에야 원래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었다. 아로네가 고맙다며 형식적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면 정말 울었을지도 몰랐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일이 또 생기면 불러 달라는 말을 하고 떠났다. 나한테 당분간 몸조심하라는 침묵의 경고를 보낸 건 덤이었다.

우리는 데네브의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눈밭을 구르며 깔깔거렸다. 물론 눈밭을 구른 건 나와 에단뿐이었다. 아로네도 드물게 소리 높여 웃었다.

촬영이 이루어지는 3시간 동안 그들은 쉬지 않고 웃었지만, 그 음 소거 웃음도 충분하지 않았을 만큼 데네브는 별짓을 다 했다. 평소 그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표정과 포즈를 3시간 내내 보여 줬다는 뜻이다.

우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그대로 아로네 집에 가 축하주를 땄다. 테이블 위에는 에단이 현상해 온 사진들이 차곡차곡 쌓여져 있었다.

아로네가 아직도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사진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데네브가 어설프게 내 동작을 따라 하고 있었다. 감히 단언하건대, 그처럼 병약하고 위엄 없는 독수리는 세상에 또 없을 것이다. 아로네가 말했다.

“이 사진 마음에 든다. 기분 안 좋을 때마다 꺼내 봐야겠어.”

에단이 피식 웃고선 탑처럼 쌓인 사진을 툭 건드렸다. 사진의 탑이 와르르 쏟아지며 흑발 청년이 격동적으로 움직였다. 에단이 내 앞으로 떨어진 사진을 가리켰다.

“난 저거. 예술성과 웃음 둘 다 잡았어.”

잠수복을 입은 데네브가 차디찬 호수에서 수영하는 사진이었다. 저거 하나 찍으려고 나는 비행 마법의 도움을 빌려야 했다. 덕분에 겨울 호수 특유의 시린 분위기와 데네브의 유려한 몸 선이 잘 담긴 결과물이 나왔다.

“마음에 드는 사진이 다 다르네. 나는 무조건 이건데.”

에단이 절대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나는 같은 눈빛을 돌려줬다.

“그게 왜? 너무 평범하잖아.”

데네브가 눈밭에 누워 마치 시골 청년처럼 청량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어떻게 그게 평범하지? 심지어 목도리를 살짝 끌어 올리며 윙크하듯 눈을 찡그리고 있잖아. 나는 에단의 눈앞에 사진을 가져다 댔다.

“정말로 이 미소가 평범하다고 생각하니?”

에단이 자세히 사진을 들여다보고 경악했다. 거봐, 그런 반응이 정상이라니까.

“윙크하고 있잖아? 소공작이 드디어 미친 건가?”

“다 내 신들린 순간 포착 능력 덕분이지. 데네브가 짜증 나서 눈 찡그릴 때 잽싸게 눌렀어.”

나는 거들먹거리는 투로 말하곤 잔을 비웠다. 희귀 사진은 에단의 손을 거쳐 아로네에게 넘어갔다. 아로네가 순박한 표정의 데네브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무심코 말했다.

“이걸로 해야겠다.”

“1면 사진으로?”

“응. 온갖 신문과 잡지가 이 사진으로 도배되면 재미있을 것 같아.”

에단이 시니컬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소공작은 수치심에 죽으려고 하겠지.”

어떡하니. 데네브는 모든 신문사와 잡지사에 연락해서 당장 그 사진 내리라고 길길이 날뛰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다. 만약 데네브가 아로네의 용서를 포기하면 가능하겠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그가 선뜻 물러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로네가 상상만 해도 우습다며 소리 내어 웃었다. 요즘 따라 아로네는 웃음이 많아졌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로네와 잔을 부딪쳤다. 벌써 여섯 잔째였고, 내일 일찍부터 레이랑 만나기로 해서 곧 가야 했지만 단란한 분위기는 자제력을 흐리는 마력을 갖고 있었다.

나는 쭉 술을 들이켰다. 불타는 감각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더니 갑작스레 취기가 올라왔다. 맞다, 이거 고량주였지! 머릿속에서 큰일 났다는 경보 소리가 윙윙 울리다 금세 꺼졌다. 나는 헤벌쭉 웃으며 아무 소리를 했다.

“아니면 이건 어때? 아예 화보집을 내 버리는 거야. 홍보도 되고, 옷도 팔고, 데네브의 혈압도 올리고……. 일석이조도 아닌 무려 삼조라고.”

아로네가 만족의 한숨을 내쉬곤 내 손등을 토닥였다.

“넌 내 행운이야.”

나는 옳다구나 하며 바로 받아쳤다. 혀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나름 최선을 다해 말했다.

“넌 내 자랑이고.”

에단이 인상을 찌푸리고 남은 술을 털어 마셨다. 외투를 입으며 하는 말에서 뿌리 깊은 질색이 느껴졌다.

“쇼를 한다…….”

평소처럼 받아치려고 고개를 들어 올리자 일순 머릿속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지만, 결국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약한 바람이 앞머리를 흐트러뜨리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창문은 꼭꼭 닫혀 있는데 웬 바람? 몽롱한 정신이 겨우 그럴듯한 가설을 생각해 냈다. 음…… 에단이 또 순간 이동으로 사라졌나 보군.

부드러운 목소리가 몇 번 내 이름을 불렀다. 아, 여기서 뻗으면 100% 내일 늦잠 잘 텐데.

나는 팔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서려 애썼다. 그러나 알코올에 절여진 몸은 의지를 배반하고 자꾸만 아래로 축축 처졌다.

본능이 의지를 압도하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멍한 의식은 천천히 무의 세계로 향했다. 이윽고 나는 필름 끊기듯 골아 떨어졌다. 새벽 2시의 이야기였다.

***

“……으악!”

나는 장렬한 외침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간만에 꾼 악몽의 환영이 아직까지도 눈앞에 선명했다. 소파에서 굴러떨어지며 바닥에 부딪힌 엉덩이뼈는 아프지도 않았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현실 감각을 되찾으려 버둥거렸다. 아로네가 괴성을 듣고 후다닥 방에서 나왔다.

“무슨 일이야!”

다정한 손길이 땀으로 흠뻑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로네가 이마를 맞대고 열이 있나 살폈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그의 어깨를 살짝 밀어내며 일어났다. 아로네가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괜찮아?”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아로네를 보니 마음이 진정되었다. 꿈속과 달리 현실은 모든 게 순리대로 굴러가고 있었다.

현실감이 완벽히 돌아오자 그제야 화려한 기상이 수치스러워졌다. 나는 고개를 붕붕 돌리며 에단이 정말 없는 게 확실한지 확인했다.

“휴, 목격자가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다.”

아로네가 나를 테이블로 이끌었다. 나는 숙취 해소 물약을 꿀꺽 마시고 말했다. 떫은맛이 혀끝에 감돌았다.

“단순한 악몽이었어.”

“무슨 악몽?”

나는 영원 같았던 허상의 시간을 떠올렸다. 절로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화재로 죽는 꿈.”

“왜 그런 꿈을 꿨지?”

아로네는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느냐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딱히 그런 것 같진 않았지만 나는 동의한다는 양 허허 웃었다. 짐작 가는 바라곤 딱 하나인데, 그걸 아로네한테 선뜻 말해 주기 주저되었다.

있잖아, 아로네. 얼마 전에 점을 봤는데 점쟁이가 나한테 곧 위험이 닥칠 거라면서 불을 조심하라고 했어. 오늘 꿈을 생각하면 좀 묘하지?

‘……이런 얘기를 어떻게 해.’

아로네는 분명 기겁하며 날 집밖에 못 나가게 할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점괘는 점괘일 뿐이지, 무조건 이뤄지는 예언이 아닌걸.

그러니 굳이 아로네에게 불확실한 걱정을 안겨 줄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뭐든 확실한 게 좋으니 안타레스를 한번 찾아가긴 해야겠지만.

나는 창밖을 흘깃 내다보았다가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기껏해야 정오라고 생각했건만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아이고 망했다!”

……레이와의 약속 시간을 훌쩍 넘겨 버렸다. 나는 엄청난 속도로 샤워하고 아로네에게 조만간 또 오겠다고 소리치며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