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나는 혀를 내두르며 새삼 마법의 위대함을 실감했다. 12시간 동안 다른 사람으로 살 수 있다니 이게 말이 되냐고.
다만 몸이 급격히 변한 부작용으로 두통이 일었다. 12시간짜리 물약을 먹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레이 걔는 도대체 수년 동안 어떻게 버틴 거야?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탈의실을 나왔다. 에단은 이미 나와서 나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흥미로운 눈으로 메뉴판을 내려 보던 그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나는 흔한 인상과 왜소한 체구가 낯설어서 인사하려 들어 올렸던 손을 내렸다. 나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그를 바라봤다.
“……에단?”
“왜.”
나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복하여 한동안 박수만 짝짝 치자 에단이 미쳤냐는 듯이 눈썹을 까닥였다. 흑발 미인이 했을 땐 꽤 매력적이었는데 지금은 아무런 감흥도 안 느껴졌다. 나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이번 구경도 수월하겠다. 정말 완벽한 위장이야.”
“이 거추장스러운 옷만 빼면.”
에단이 걸을 때마다 펄럭이는 옷을 짜증스레 응시했다. 나는 동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겨울에 무슨 어깨가 다 트여 있는 옷이람? 난방이 잘 되어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아로네와 제이든이 도착하려면 아직 10분가량 남아 있었다. 우리는 입구 근처에 서서 잡담을 나누었다.
“신제품 개발은 잘되어 가는 중?”
여기서 신제품은 접때 에단에게 흘리듯 말했던 핸드폰을 의미한다. 에단은 데네브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떠나자마자 핸드폰의 기능과 목적, 생김새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나는 전혀 귀찮아하지 않고 리포트를 만들어다 줬다. 에단이 핸드폰 그 비스무리한 거라도 만들 수 있다면 10페이지짜리 리포트를 매주 써 갈 수도 있었다. ……아니, 매주는 좀 오바고 격주 정도는 가능할 듯.
에단이 거만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평범한 갈색 눈동자에 익숙한 자신감이 떠올랐다.
“당연하지. 곧 받아 볼 수 있을 거야.”
“내 지분도 여전하고?”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나는 아이디어를 제공한 대가로 핸드폰 판매 수익의 일부를 가져가기로 했다. 핸드폰이 얼마나 팔릴지는 모르겠으나 대박 난다는 것은 확실해서 나는 곧 졸부가 될 예정이다.
“모레 공문서로 보내 줄게. 그럼 됐지?”
“내가 말했던가? 네 화끈함과 추진력을 언제나 높이 여겼다고.”
“말만 잘해.”
에단이 새빨간 거짓말을 익숙하게 흘려들으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내심 기분은 좋아 보였다.
시계를 보자 벌써 10분이 지나 있었다. 때가 닥치니 갑자기 환영 인사가 기억나지 않았다. 허겁지겁 인수인계를 받을 때 분명 신박한 멘트라고 좋아했는데, 문제는 내가 킬킬 웃었던 기억만 났다.
나는 황급히 에단한테 물어보려 했지만 타이밍 나쁘게도 문이 열렸다. 어쩐지 들떠 있는 제이든을 보니까 몇 시간 전의 일이 번뜩 떠올랐다. 나는 순간의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크게 외쳤다.
“어머, 세상에! 저의 신이 바로 여기 계셨군요. 역시나 태양이 기꺼이 빛을 내어 줄 정도로 고귀하십니다. 마음속에 품은 열정의 불꽃 또한 보배스럽고요. 잠깐! 지금 막 여신님도 칭송하려던 참이니 너무 노여워 마세요.”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틀어막고 이어 말했다.
“여신님의 눈부신 지혜와 꽃들마저 질투하는 아름다움은 예로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뵈니 고서의 삽화가 겸손한 것이었군요. 두 분 다 만나 봬서 정말 영광입니다. 제 한 몸 바쳐 모시겠습니다.”
놀랍게도 여기까지도 정해진 환영 인사이다. 에단은 이를 앙다물며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고, 아로네는 나와 눈을 피하며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오늘의 주인공 제이든은 혐오와 질색을 넘어 경악을 경험하고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제이든이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오늘 처음 봤다. 내 과장스러운 연기가 어지간히 충격이었나 보다. 에단이 간신히 평정을 되찾고 말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두 분에게 어울리는 자리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로네와 제이든은 홀 한가운데에 앉았다. 제이든은 티 안 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로네가 모른 척 물었다.
“무슨 문제 있나요?”
제이든이 순식간에 가면을 뒤집어썼다. 눈 깜박이는 사이에 불만스러운 기색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가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네. 레스토랑은 마음에 드나?”
아로네가 도도하게 대꾸했다.
“나쁘지 않네요.”
직원의 부담스러운 과몰입만 아니면 레스토랑은 봐줄 만했다.
곳곳에 탐스러운 장미가 피어 있고, 마법 걸린 천장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유니콘의 환영을 비췄다. 은은하게 울리는 바이올린의 선율 소리도 신비로운 분위기에 한몫했다.
그런데 나한테 지금 레스토랑의 인테리어 따위는 전혀 관심거리도 아니었다. 뭐? 레스토랑은 마음에 드나?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는 제이든이라니!
나는 저 남자가 정말 내 상사가 맞는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혹시 몰라, 쟤가 제이든 손톱 먹고 둔갑한 생쥐일지.
에단이 내 팔을 툭 친 후 애피타이저 준비를 위해 주방으로 갔다. 나는 쓸데없는 망상에서 빠져나와 메뉴판을 건넸다.
아로네는 무신경하게 메뉴판을 쓱 훑고선 바로 닫았다. 그가 제이든을 바라보았다. 제이든은 끔찍한 메뉴 이름을 보고 본인의 시력을 의심하는 중이었다. 아로네가 그린 듯이 웃으며 말했다.
“전하는 미식가로 유명하시죠. 메뉴 선정은 전적으로 전하께 맡길게요. 기대해도 되죠?”
제이든이 간신히 표정 관리에 성공하고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내 눈은 못 속이지. 그는 테이블 아래로 핏줄이 불거지도록 주먹을 쥐었다.
제이든 성격에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나 ‘어디서 타는 냄새가 나지 않아요? 내 마음이 불타고 있잖아요’ 같은 메뉴를 주문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가 그나마 정상적인 메뉴를 찾기 위해 분주히 메뉴판을 넘기다가 결국 포기하듯 내려놓았다. 나는 친절하게 물었다.
“주문하시겠어요?”
“추천 메뉴를 듣고 싶군.”
“사랑해, 나의 아기 고양이. 당신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어. 당신은 내 전부야.”
나는 제이든의 반응이 궁금해서 부러 뜸을 들였다. 제이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미간을 좁혔다. 혼란스레 떨리는 동공은 정말 미친 거냐고 묻고 있었다.
하긴, 황태자인 걸 뻔히 알면서 대놓고 추파를 던지는 사람이 극히 드물긴 하다. 아로네가 도저히 못 보겠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웃음을 참았다. 나는 쾌활하게 말했다.
“이 세 개가 가장 인기 많아요.”
“……그럼 그걸로 주문하지.”
“어떤 거요?”
나는 그 민망하고 느끼한 말을 제이든의 목소리로 듣고 싶었다. 아마 제이든 본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한마음 한통속일 테다.
“방금 추천해 준 세 가지.”
“제가 방금 어떤 메뉴를 말했죠? 오늘 우리 집에 아무도 없어, 이걸 말했던가요?”
제이든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증거였다. 제이든은 아로네 앞이라 짜증 한 번 못 내고 가만히 심호흡을 했다.
와우, 좀 색다르다. 내가 얄밉게 말대꾸를 했을 때도 저렇게 열 받아 하지 않았는데. 역시 좋아하는 여자 앞이라 이건가?
그가 턱에 힘을 잔뜩 주고 말했다. 시선은 아로네를 교묘하게 비껴갔다.
“사랑해, 나의 아기 고양이. 당신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어. 당신은 내 전부야.”
한숨이 짙게 섞인 목소리에서 진심 또한 희미하게 느껴졌다. 제이든이 아로네를 지그시 응시했다. 아로네는 구태여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묘한 눈 맞춤을 잘라 내듯 박수를 쳤다. 제이든이 또 뭐냐는 눈빛으로 날 노려봤다.
“기다리시는 동안 지루하지 않도록 선곡을 바꿔 볼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이래 보여도 제가 유명한 가수 출신이거든요.”
내 노래 실력을 아는 아로네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든은 격렬하게 반대하는 눈치였지만 애초에 그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나는 레스토랑 한편에 마련된 무대 위로 올라가 미리 준비해 뒀던 반주를 틀었다. 그리고 환상적인 목소리로 희대의 망곡을 노래했다.
“너의 입술, 깨물어 주고 싶어. 너의 하얀 피부, 다이아몬드보다 빛나지. 누구도 감히 널 건드릴 수 없어. 예아! 널 애기라고 불러도 될까? 응응, 내가 더 잘할게.”
얼핏 제이든이 내 이름을 중얼거린 것 같기도 했다. 날 족치려고 이를 갈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즐거워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봐 봐! 아로네도 엄청 좋아하네. 그럼 된 거지, 뭐.
***
우리는 중간 평가를 위해 의상점에 모였다. 아로네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물었다.
“제이든이 뭐래?”
“뭐…… 어떻게 그런 미친 곳을 추천할 수 있냐고 화내더라.”
“얼마나 오래?”
“하루 종일.”
문득 그날의 악몽이 떠올라서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때의 제이든은 온몸으로 노여움을 분출하는 듯했다. 제대로 안 하면 훈장을 회수할 거란 협박에서 시작해서 내가 일을 망치리라 이미 예상했었다는 인신공격까지.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에단이 한마디 더 보태었다. 에단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싱글벙글 웃었다.
“하루면 짧네. 너 그날 걔네가 갈 때까지 별 이상한 노래를 계속 불러 댔잖아. 춤까지 춰 가면서. 덕분에 걔 준비한 말 하나도 못 하지 않았던가?”
사실 세 곡 정도만 부르려고 했는데 갈수록 흥이 오르는 게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