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찰나의 시간 동안 나는 황제의 새파란 눈동자를 응시했다. 파도 한 번 치지 않는 바다의 색은 제이든이 처음으로 날 인정했을 때 지었던 눈빛과 비슷했다.
나는 훈장을 받아 들며 씩 웃었다. 이제야 마음 편히 현재를 즐길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제이든을 바라보았다. 그는 부하 직원에게 자랑스러운 미소를 지어 주는 대신 내일부터 성실하게 계약 내용을 지키라고 눈빛으로 압박을 가했다.
내가 훈장을 받고 바로 튈 사람으로 보이나? 나는 걱정 붙들어 매라는 듯 웃어 주고선 쿠카리에에게 시선을 옮겼다.
쿠카리에는 훈장의 의미를 정확히 알진 못했지만 그게 내 앞날에 도움 되는 거라는 건 알았다. 그가 축하한다는 듯이 눈인사를 보냈다.
나는 짧게 목례하고 뒤돌아 수십의 정계 인사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 나는 황제를 등 뒤로 하고 저명한 정계 인사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작 3초도 안 되는 시간이지만 내 이름을 그들의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강하게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시간 이후로 나는 절대로 무시와 폄하와 의심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 단순하고도 어려운 사실 하나가 눈물 나도록 기뻤다.
***
훈장도 받았겠다, 낱낱이 품평당하는 기분을 더는 느끼고 싶지 않아서 얼마간 자리를 지키다 연회장을 나왔다.
그사이 태양은 지평선을 완전히 넘어갔고, 달과 별이 떠올라 어둠을 밝혔다. 나는 춤추듯 걸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마구잡이로 튀어나온 음표가 오선 위를 혼란스레 뛰어놀았다.
“내 이름은 강혜라. 사람을 죽이지 않고도 훈장을 받았지. 내 쩌는 훈장을 보아라. 이제 아무도 날 무시 못 하지.”
추위에 입술이 얼어붙을 것 같았지만 넘치는 흥을 제어할 수 없었다. 나는 리듬에 고개를 까닥이며 코너를 돌았다. 그리고 꺼림칙한 인물을 맞닥뜨리고 겨우 탄식을 삼켰다.
게일이 왜 여기 있어?
그간 우연히 마주쳤던 장소는 황후 궁이나 기숙사 주변으로, 그의 생활권 반경 안에서였다. 그러나 연회장은 그 어느 곳과도 가깝지 않았다.
그는 가로등 빛이 잘 드는 정자에 앉아 있었다. 이 추운 날 굳이 야외에 앉아 멍을 때리고 있는 것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싶었다.
‘설마 나는 아니겠지?’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몹시 슬퍼졌다. 싸한 느낌은 언제나 딱 들어맞기 때문이다.
내 노랫소리를 게일이 듣지 못했기를 바라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멀리 돌아가야겠군.
그러나 한 발자국도 멀어지지 못한 채 나는 떨어진 낙엽을 밟고 말았다.
“하…….”
게일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더니 내 얼굴을 발견하고 단숨에 달려왔다. 역시나 날 기다리고 있던 거였군.
그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내 가슴팍에 달린 훈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필요 이상으로 길고 집요한 시선이었다. 나는 왈칵 인상을 찌푸리고 노골적으로 불쾌한 티를 냈다.
“시선 처리 똑바로 하시죠.”
게일은 사과 한마디 없이 허허 웃었다. 그가 머리를 긁적이곤 늙은 여우처럼 말했다.
“설마 했는데 혜라 양이 훈장을 받는다는 소문이 진짜였군.”
고작 소문 진위 확인하려고 여기서 계속 기다린 거야? 기숙사로 가려면 지나칠 수밖에 없는 이 길목에서? 정말 징글징글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예. 방금 받고 나오는 길입니다.”
게일이 눈을 내리깔고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고뇌에 빠졌다. 보나 마나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테다. 이윽고 그가 곤란하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여자가 이리 야욕 넘치고 독해서야 쓰나. 혜라 양이 정말 내 마음을 얻고 싶다면 튀는 행동은 자제하는 게 좋을 걸세.”
한창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던 내 기분을 순식간에 하강시키는 말이었다. 쟤도 참 꾸준해, 그치?
열이 올라서 고개를 양옆으로 꺾자 뚜둑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게일의 근거 없는 자신감이 가소롭다는 듯 차게 웃었다.
“어디까지 착각하나 가만히 두고 보니까 끝이 없네. 계속 그렇게 헛소리하다간 큰코다쳐, 아저씨.”
본인이 우위에 서 있다고 생각했던 게일이 미묘하게 달라진 공기의 흐름을 읽고 말을 더듬었다. 게일이 한마디 뱉을 때마다 주변 공기가 오염되는 느낌이었다.
“아저씨? 방금 나를 아저씨라고 부르고 감히 경박하게 반말을…….”
더 이상의 공기 오염은 막고 싶어서 나는 그의 말을 뚝 자르고 신랄하게 쏘아붙였다.
“그래서 뭐. 시시비비 다 따졌을 때 존댓말 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에요. 내가 너무 착해서 연장자 공경해 주는 거지.”
“……황후 폐하의 사람인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후환이 두렵지도 않은 건가?”
“웃기네. 황태자 전하의 측근이자 방금 황제 폐하께 공로를 인정받은 나를 감히 협박하는 건가 지금? 누구 뒷배가 더 강할지 한 번 요목조목 따져 봐?”
애초에 황후 폐하의 사람이니 뭐니 하는 말도 다 허세일 게 뻔하다. 나는 반박할 수 있으면 해 보라는 듯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게일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분한 듯 씩씩거리는 꼴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나는 종지부를 찍듯 단호히 말했다.
“다시는 내 앞에서 여자가 야망 있어서는 안 된다느니 그딴 소리 하지 마세요.”
“……협박인가?”
“협박이자 경고죠. 제가 어떻게 황태자 전하의 보좌관이 됐는지는 익히 들어 아시죠?”
“감히…… 감히 어떻게 이 게일 브…….”
나는 한 대 칠 기세로 주먹을 들어 올렸다.
“어디서 감히 내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
게일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나한테 삿대질을 하다가 내가 위협적으로 다가가자 겁을 먹고 도망쳤다. 싸워서 이길 자신은 없나 보지? 나는 통쾌하게 웃으며 그 꽁지 빠지게 달려가는 모습을 구경했다.
***
제이든을 위한 계획은 데네브 때와 비교도 안 되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현재 데이트하고 있는 사람을 놔두고 몰래 전 약혼자를 만나는 건 절대 쉽지 않았다.
제이든은 도대체 언제 아로네를 만날 수 있는 거냐고 허구한 날 눈치를 줬다. 아니, 제이든이랑 아로네가 아무도 모르게 만나는 게 어디 쉬운 일이야?
나는 많은 고민 끝에 그럭저럭 마음에 드는 계획을 생각해 냈다. ‘계획’이라니. 나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요즈음 지나치게 남발해서 머리에서 김이 날 지경이었다.
내가 제이든에게 말해 준 데이트 장소는 요즘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핫하다는 ‘사랑의 요정과 레스토랑’이다. 유토피아에 위치한 그곳은 《귀족의 모든 것》에 한 번 실린 이후로 필수적인 데이트 코스가 되었다.
인기 많을 법하네. 그것이 레스토랑의 사진을 보고 처음으로 한 생각이다.
그러나 동화 속에 나올 법한 아기자기한 레스토랑은 생각보다 호불호가 많이 갈렸다. 레스토랑 직원들의 옷차림이 몇몇 사람들을 당황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성별을 가리지 않고 모두 하늘하늘한 은색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등 뒤에는 각기 다른 크기의 인조 날개를 달고서 말이다!
레스토랑의 테마는 더욱 가관이었다. 사랑의 요정은 말 그대로 오작교가 되어 새로운 커플이 탄생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심지어 그냥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손님의 사랑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귀애하며 신을 대하듯 칭송해야 한다. 사랑이란 감정이 손님에게 찾아온 이상 그는 사랑의 신의 현신과도 같다는 것이다.
근데 그 칭송의 방법이 정말 다양하게 엉망진창이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았다.
제이든 또한 레스토랑의 명성 혹은 악명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그 이름을 꺼냈을 때 제정신이냐고 우아하게 욕을 하지.
예상했던 반응이라 당황은 없었다. 나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사랑의 요정과 레스토랑’이라면 떠나간 여자의 마음도 잡을 수 있을 거라 거짓말했다.
물론 어떤 여자는 넘어올지도 모르겠으나 아로네는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런 작위적인 컨셉을 질색한다. 다만 제이든이 곤란해하는 모습이 못마땅함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아서 아로네는 흔쾌히 가겠다고 말했다.
제이든은 데네브보다 반대가 거셌다. 데네브는 세 번째 설득에 마지못해 넘어왔는데, 역시 제이든은 제이든이었다. 하지만 내가 누구던가. 제이든은 결국 마음의 진실성을 의심당한 후에야 포기하듯 두 손을 들었다.
그리하여 오늘, 나는 변신 물약을 먹고 레스토랑의 직원으로 변장했다. 어떻게 잠입할 수 있었냐고 묻는다면 세상에는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없다고 답하겠다.
제이든은 비밀 서약에 서명한 직원 네 명만이 레스토랑에 남아 있는 줄 알고 있다. 그중 두 명이 나와 에단이라는 사실은 오직 아로네만 안다.
나머지 주방장과 그의 보조에게는 거사가 끝난 후 기억력 왜곡 마법이 걸릴 예정이다.
비밀 서약만으론 불안해서 내린 결정이었고, 기껏해야 손님의 인상착의를 흐릿하게 만드는 정도니 일상생활을 하는 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탈의실에서 나오기 전에 나는 거울 속 내 모습을 뜯어보았다. 키가 조금 더 커지고 머리카락이 금발로 물들며 눈동자도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미국 하이스쿨에서 치어리더 단장을 했을 것 같은 외모였다. 눈을 깜박이자 처음 보는 여자가 날 따라 했다.
“아아, 목소리 테스트.”
허스키한 목소리가 말했다. 음성 변조기를 성대에 부착하기라도 한 듯 감쪽같은 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