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연극은 다짜고짜 살인으로 시작됐다. 우리는 맨 첫 번째 줄에 앉아 있는 바람에 가짜 핏방울을 뒤집어썼다. 레이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내 콧등에 묻은 물감을 닦아 줬다.
연극을 보다 보니 왜 에단이 이 티켓을 줬는지 알 것 같았다. 심약한 사람이라면 무조건 옆 사람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전개가 계속 이어졌다.
무대 효과도 아예 사람 심장을 정지시키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좌석 뒤쪽에서 갑자기 목 없는 귀신이 튀어나오질 않나, 바닥에선 뼈만 남은 팔이 튀어나와 발목을 잡질 않나, 무대에선 끊임없는 살인이 이어지질 않나.
스킨십 진도 팍팍 빼라는 목적으로 일부러 사기 친 것 같긴 한데…… 문제는 우리 둘 다 놀랍도록 강심장이었다는 것이다. 아니, 살면서 이보다 무서운 일을 질리도록 겪었는데 고작 가짜 귀신과 피가 무섭겠냐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과자를 집어 던질 동안 선혈의 향연을 평온하게 관람했다.
불쑥 튀어나온 귀신이 얼굴을 들이밀어도 얘 좀 보라며 허허 웃고 넘길 뿐이었다. 아마 뒷좌석 사람들은 어깨 한 번 으쓱이지 않은 우리를 목각 인형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고어물과 공포물과 스릴러의 혼합이라……. 누가 봐도 평범한 데이트는 아니었지만 막상 우리는 즐거웠다. 빈틈없이 얽힌 손은 커튼콜이 끝날 때까지 풀리지 않았다.
***
우리는 바로 헤어지기가 아쉬워 기숙사 코앞까지 갔다가 뒤편의 벤치로 향했다. 나는 레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감미로운 미성이 말했다.
“피곤해?”
“아니, 그냥 좋아서.”
저번의 점집 데이트에 비하면 오늘은 최고였다. 할리가 재촉만 하지 않았더라면 오늘이 첫 번째 데이트가 됐을 텐데.
감은 눈꺼풀 너머로 레이의 애정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보지 않아도 그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눈에 훤했다. 보나 마나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내 얼굴을 새삼 하나하나씩 뜯어보고 있겠지.
나는 푸흡 웃음을 터뜨리며 눈을 떴다. 레이가 머쓱해하며 말했다.
“미안. 너무 노골적이었지.”
“아니야. 갑자기 할 말 생각나서 그래.”
레이가 살짝 풀린 내 목도리를 꼼꼼히 정리해 주곤 말했다.
“뭔데?”
“아로네가 너 한번 보고 싶다는데?”
“……어?”
그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나는 얼빠진 얼굴이 웃겨서 깔깔거렸다. 레이가 동아줄 잡듯 내 손을 잡고 얼핏 간절하게 말했다.
“정말로? 나를 왜?”
“내가 어떤 사람이랑 사귀는지 궁금한가 봐.”
나는 레이를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사실 아로네는 궁금한 것을 넘어 ‘네가 어떤 놈이랑 사귀는 건지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라며 투지를 불태웠다. 뭐랄까, 막냇동생의 남자 친구를 궁금해하는 큰 언니 같았다.
“네가 싫다고 하면 약속 안 잡을게.”
“아냐, 잡아도 돼. 나 공녀한테 인정받고 싶어.”
레이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금세 자신감을 잃고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걔가 날 인정할까?”
“당연하지. 넌 그냥 안녕하세요~ 인사만 해도 바로 합격이야. 그니까 너무 걱정 마.”
“정말?”
“그렇대도. 어느 누가 널 싫어하겠어.”
레이가 긴장을 풀고 배시시 웃으며 내 입술에 뽀뽀했다. 그는 내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자 장난치듯 계속 쪽쪽거리다가 마지막에는 아주 길게 입을 맞추었다.
꽁꽁 얼은 감각이 그럼에도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느꼈다. 그가 살짝 입술을 떼고 진득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아쉬운 듯, 무언가를 망설이듯 내 입술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작게 웃으며 레이의 양 뺨을 감싸고 그대로 입을 포개었다.
기다렸다는 듯 달뜬 숨이 치고 들어왔고, 내 뒷목을 감싼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겨울바람에 언 살갗이 그의 체온과 맞닿으며 미적지근하게 녹았다. 우리를 둘러싼 소음이 차차 멀어지며 오고 가는 숨결은 점점 가빠졌다.
차가운 눈송이가 하나둘씩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우리는 가로등 아래서 한참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첫눈이었다.
***
결전의 날이 왔다. 나는 설렘을 주체하지 못하고 꼭두새벽부터 눈을 떴다. 정계에서 한 가닥씩 하는 사람들 앞에서 훈장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심지어 그 훈장은 나를 위해 새로운 명분을 갖고 만들어진 것이다. 그 자리에 참석하는 사람들 중 훈장의 무게를 모르는 사람을 없을 테다.
나는 반듯하게 다려져 옷장에 걸린 정장을 바라보았다. 이날을 위해 아로네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준 옷이었다.
손끝으로 쓸어내리자 깃털처럼 부드러운 벨벳의 감촉이 느껴졌다. 몸에 옷을 대고 거울에 비춰 보니 심해의 빛깔을 꼭 빼닮은 색이 허여멀건 피부와 대비되어 잘 어울렸다.
“……긴장을 하긴 했나 보지.”
거울 속 여자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경직된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나도 거사를 앞두곤 별수 없나 보구나.
연회는 하늘이 주홍빛으로 물들 무렵에 시작된다. 그동안 나는 얼마 전 벨라가 보내 준 소설책을 읽으며 소란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책상 구석에 쌓이는 책의 수가 늘어날수록 머릿속이 명료해지고 입가의 근육이 느슨해졌다. 나는 벨라에게 감사 편지를 쓰고 의자에 편안히 기대었다. 창밖을 흘긋 바라보자 태양이 지평선에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슬슬 준비해야겠다.”
나는 우선 옷을 꿰어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자로 댄 것처럼 어깨선이 딱 맞아 떨어졌다.
재킷 안에 받쳐 입은 베스트와 곧게 뻗은 바지가 과하지 않을 정도로 몸 선을 드러냈다. 완벽한 핏에서 아로네의 정성이 느껴졌다.
목이 허전해 보이지 않도록 은색 목걸이를 하고 다시 거울을 봤다. 이제 머리만 단정하게 다듬으면 될 것 같았다. 문제는 똥손인 내가 어떻게 머리를 손질하냐는 건데…….
일단 엉킨 머리카락을 살살 풀고 있는데 갑자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나는 소리 높여 외쳤다.
“누구세요?”
“나야, 레이.”
엥, 연회 끝나고 보기로 했는데 왜 지금 왔지? 나는 서둘러 빗질을 마무리하고 문을 열어 줬다.
얼마 전 데이트했을 때처럼 레이는 꽃다발을 들고 활짝 웃고 있었다. 기울어가는 태양을 다시 하늘 한가운데로 끌어 올릴 것 같은 웃음이었다.
나는 꽃다발을 받아 들고 레이를 안으로 들였다. 리시안셔스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뭐야? 지금 올 거라 생각 못 했는데.”
레이가 인사 대신 솜털이 내려앉듯 입을 맞췄다.
“중요한 날이잖아. 너 머리 손질 잘 못 하는 거 아니까 도와주러 왔지.”
“아, 맞다. 너 이런 거에 일가견 있지?”
한동안 레이의 비밀스러운 과거에 대해 잊고 있었다. 나보다도 치장하는 데 재주 있는 남자 친구라니. 세상에 이런 애인 또 없을 것이다.
나는 희희낙락하며 화장대 앞에 앉았다.
“내가 입은 옷이랑 잘 어울리게 해 줘. 너만 믿는다.”
레이가 엷게 웃고선 내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위로 올려 묶었다. 그리고 그대로 올림머리를 해 주는 듯싶더니 중간에 노선을 틀고 두 갈래로 머리카락을 땋았다.
장난스러운 손길이 간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거울 속 연금발 청년에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 저한테 어떤 머리를 해 주시려는 거죠?”
레이가 거울의 나와 다정하게 눈을 맞췄다. 사귄 지 좀 됐다고 그는 뜬금없이 시작되는 상황극에 익숙해졌다.
“죄송합니다, 손님. 손님이 워낙 어떤 머리든 잘 어울리셔서요.”
나는 헉 숨을 들이켜며 입을 가렸다. 동그랗게 떠진 눈이 반달처럼 휘어진 눈을 바라봤다.
“어머, 설마 저한테 반하신 건 아니죠? 그럼 곤란한데…….”
“반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나요?”
레이가 은근히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의 손끝이 목 뒤에 닿을 때마다 그 자리에 열꽃이 피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참나, 갈수록 레이의 상황극 실력이 늘어서 큰일이다.
그렇다고 질 수야 없지.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은근한 윙크를 던졌다.
“그럴 리가요. 달이 뜨면 날 찾아와요. 즐거운 밤이 될 거예요.”
“꼭 달이 떠야 하나요?”
“에?”
“가령 지금이라든가…….”
레이가 고개를 숙여 내 목덜미에 길게 입술을 대었다. 그는 체온을 나눌 뿐 다른 아무 짓도 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숨이 멈췄다.
앵두 같은 입술이 귓가 가까이 움직이는 모습이 느리게 지나갔다. 시선은 절대 풀리지 않을 매듭처럼 얽혀 있었다.
“싫어요?”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나는 뒤를 돌아 어이없다는 듯 레이를 응시했다.
“뭐야, 이렇게 느끼하게 구는 거 누구한테 배웠어?”
“너.”
당연한 걸 묻는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반박하려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근거가 생각나지 않아서 입을 다물었다. 내가 하는 짓을 고대로 따라 하는 거라면 앞으로 더욱더 갈고 닦아서 느끼하게 굴어야겠다.
레이가 툭 머리끈을 잡아당기자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조심스러우면서도 망설임 없는 손길을 느꼈다. 처음부터 생각해 놓은 스타일이 있는 것 같았다.
“다 됐어.”
나는 거울을 보자마자 감탄했다. 나 혼자 해 봤을 때는 망했던 로우 번이 지금은 잡지에서 봤던 그대로였다. 삐져나온 잔머리도 자연스러워서 일부러 그렇게 연출한 것 같았다.
“수준급인데?”
레이가 만족스럽게 웃고선 조금 기대하는 기색으로 물었다.
“화장도 해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