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혼자 사는 게 무섭진 않느냐는 질문에서 시작해서 사업에 관한 내용까지. 그는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에 대해 물었다. 현명한 처사였다.
아로네는 시큰둥해하면서도 착실히 대답해 줬다. 나는 어쩐지 그 애가 아주 조금의 만족감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에단은 그사이에 흥미를 잃고 필담을 보냈다. 나도 쩔쩔매는 데네브를 보는 게 이제 질려서 에단한테 집중했다.
-저런 영양가 없는 대화 듣자고 물약 성능 개발한 거 아닌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
-그니까. 슬슬 다리도 저림.
-소공작한테 인형 놀이인가 하라고 얘기 안 했어?
-했지. 쟤도 알겠다고 했어. 오늘 할 생각이 아닌가 봐.
에단은 몹시 실망하여 땅이 꺼지도록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인형 놀이가 없다면 그냥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다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같이 나갈 요량으로 외투를 여몄다. 그리고 그때, 별안간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데네브를 찾았다.
데네브는 눈을 반짝이며 아로네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한 뒤 현관으로 뛰어가 문을 열었다.
나는 문밖에 서 있는 인형극 무대를 보고 입을 벌렸다. 아로네도 다소 당황한 기색이었다.
“……뭐야?”
데네브가 바퀴 달린 그것을 거실로 끌고 들어왔다. 그는 무대를 아로네 앞에 위치시키고 그 뒤로 가 섰다. 아마 직접 인형극을 보여 줄 요량인 것 같았다. 그가 부끄러운 듯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렸을 때 네가 인형극을 좋아하던 게 생각나서.”
아로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못 보게 하셨지…….”
“네가 좋아하던 동화 작가한테 이야기를 써 달라고 부탁했어. 너만을 위한 이야기야.”
와, 제법인데. 나는 에단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아무래도 다시 앉아야 할 것 같지? 당연히 에단은 배부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들어 볼래?”
데네브가 다정하게 말했다.
우웩, 데네브가 아로네한테 다정하게 말하다니! 아로네는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무의식적으로 긍정했다. 설마하니 정말로 데네브가 인형을 가지고 올 줄 전혀 예상 못 한 것 같았다.
데네브가 목을 가다듬고 아기자기한 인형을 손수 움직이며 나직이 읊조렸다.
“……옛날 옛적에 아무도 오지 않는 높은 탑에 갇힌 공주가 있었습니다. 공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탑에 갇혔습니다. 사실 공주는 세상 그 누구보다 선량한 마음씨를 가졌는데 말이에요.”
나는 바닥에 엎어져서 꺼이꺼이 웃었다. 저 냉담한 얼굴로 아련하게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공주를 연기하다니. 에단도 호흡 곤란이 올 만큼 배를 부여잡고 웃어 댔다. 그가 간신히 펜을 잡고 글자라는 걸 썼다.
-내가 여기서 본 걸 아무도 안 믿을 거야.
-차라리 우리가 취해서 헛것을 봤다는 게 더 설득력 있을 듯.
데네브의 인형극은 1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혼란스러워하던 아로네도 극이 절정으로 치달을수록 평온을 되찾고 진심으로 즐기기 시작했다.
물론 나와 에단은 시작부터 끝까지 박장대소를 하느라 나중엔 기력 없이 바닥에 드러누웠더랬다.
***
평화로운 토요일 아침. 나는 9시 정각에 번쩍 눈을 떴다. 잠을 설친 걸 고려하면 9시에 일어난 게 거의 기적이었다.
아니, 엘리는 도대체 뭔 짓을 하길래 밤새 중얼거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아듣기라도 했다면 적어도 무섭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고저 없는 목소리가 끝도 없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니 원. 첫인상은 마냥 순진해 보였는데 역시 사람은 두고 봐야 하나 봐.
어쨌든 평상시의 나였다면 날이 밝았다는 것만 알고 다시 베개에 고개를 파묻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벌떡 일어나 경건한 마음으로 샤워를 하고 옷장 앞에 섰다. 왜냐고?
“진정해, 강혜라. 데이트 한두 번 나가 봐? 아마추어같이 왜 이래?”
다 허세다. 겨우 두 번째 데이트라 그런지 기합이 바짝 들었다. 강철 같은 내 심장을 사시나무 떨듯 떨게 만든 남자는 네가 처음이다, 레이.
나는 한참 동안 옷장 앞을 서성이며 수없이 많이 옷을 갈아입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손은 생각과 달리 다음 옷걸이를 쥐었다.
아로네의 인형이 됐을 땐 진땀을 뺐으면서 오늘은 스스로를 마네킹으로 만들다니. 아무래도 내가 레이를 꽤 많이 좋아하기는 한가 보다.
길고 긴 패션쇼 끝에 마침내 외출 준비를 마치자 타이밍 좋게도 노크 소리가 울렸다. 나는 옷의 홍수로 엉망인 바닥을 헤치고 문을 열었다.
“왔어?”
나는 근사하게 차려입은 레이를 보고 활짝 웃었다. 칙칙한 회색 복도를 배경으로 하고도 레이의 외모는 빛났다. 그가 등 뒤에 숨기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
나는 얼떨떨해하며 정성스레 포장된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조그만 데이지가 깜찍했다.
“뭐야?”
“예전부터 주고 싶었거든. 이젠 꽃다발 줘도 되는 사이잖아, 우리.”
레이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 자연스러운 능글거림이 미치도록 좋아서 나는 괜히 농담했다.
“예전부터 주고 싶었다는 사람치고는 꽃이 작네.”
“넌 모를 거야. 꽃집에 있는 꽃을 다 들고 올 뻔했어.”
“그럼 앞으로 하나씩 선물해 줘.”
레이는 가장 예쁜 꽃 하나를 빼서 내 팔목에 느슨히 묶었다. 하루도 못 가고 시들해질 꽃 팔찌인데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레이가 내 손등에 짧게 키스를 남기곤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였다.
“그러려면 우리 오래 만나야겠다. 네가 먼저 말했으니까 무르면 안 돼.”
정말로 그동안 저 넘치는 끼를 어떻게 참았는지. 내가 도망갈까 봐 저돌적인 성격을 꾹꾹 눌렀다는 건 알겠다.
나는 두 번째로 예쁜 꽃을 레이의 귀에 꽂고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잠깐, 어느 게 꽃이지?”
“장난은.”
레이가 청량한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잡았다. 한 가닥 남아 있던 피로가 싹 사라지는 웃음이었다. 나는 마주 웃으며 그를 계단으로 끌었다. 가슴이 기대감으로 풍만하게 차올랐다.
***
오늘의 데이트 장소는 마법 극장 ‘판타지아’다. 마탑이 운영하는 극장을 말하는 거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판타지아는 티켓값이 비싼 건 둘째 치고 티켓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라 웬만한 귀족도 줄을 서야 갈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세상은 재력과 권력으로만 돌아가는 게 아니지. 나는 에단이라는 어마어마한 인맥을 둔 덕분에 요즘 가장 인기 있다는 연극의 가장 좋은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는 로비에서 스낵과 오렌지 주스를 사 들고 극장에 입장했다. 여유 있게 도착해서 그런지 아직 좌석은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
나는 처음 와 보는 이 세계의 극장을 신기해하며 둘러보았다. 웅장한 무대와 반원형 좌석 배치는 익숙했지만 몸이 흐물흐물하게 늘어지도록 푹신한 소파형 좌석은 처음 경험하는 거였다.
이야, 전 세계에서도 못 앉아 봤던 고급 좌석을 여기서 경험하는구나.
만족스레 한숨을 내쉬자 레이가 말린 딸기를 입에 쏙 넣어 주었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먹고 입을 오물거리는 나 자신한테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뭐지, 이 10년 된 커플 같은 편안함은? 레이가 다정하게 물었다.
“왜? 맛이 없어?”
“……아니, 맛있어.”
몸 어딘가가 간지러운데 아무리 찾아도 그게 어딘지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처음 겪는 거라 낯설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생경함이 새로워서 익숙해질 때까지 곁에 두고 싶었다.
원래 연애가 이런 걸까? 먼 과거에 친구들에게 해 주었던 수많은 조언이 덧없어지는 순간이었다.
레이와 조곤조곤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공연 시간이 다가왔다. 단호히 쳐져 있던 막이 오르고, 동시에 허공에서 짙은 안개가 내려왔다. 이따금씩 맞닿는 어깨가 어쩐지 은근해서 침이 꼴깍 넘어갔다.
흐릿한 조명이 무대를 비추었다. 나는 예상치 못한 무대 세팅에 고개를 기울였다. 잠깐만, 이거 로맨틱 코미디 아니었나? 그런데 왜 곧 쓰러질 것 같은 폐가와 목 잘린 시신이 있는 거지?
나는 반신반의하며 주변을 살폈다. 꽉 차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좌석은 처음 봤던 그대로 한산했다. 레이가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왜 그래?”
참나.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됐다. 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에단이 나한테 사기를 쳤어. 공포물인 줄은 미처 몰랐네.”
무대를 흥건히 적신 피와 잘린 목 단면이 진짜처럼 실감 나는 걸 보면 그저 그런 공포 연극일 리가 없다. 왜 사람이 별로 없는지 이제야 알겠네.
그래. 어쩐지 순순히 티켓을 넘긴다 했어. 자기도 봤다면서 세기의 명작이라고 어찌나 칭찬하던지. 그게 복선이었다는 걸 진작 알아챘어야 했는데.
에단 이놈, 감히 나를 골탕 먹이다니. 분명 뻔한 사랑 이야기라 들었는데 이게 뭐람? 나는 빠른 시일 내로 에단에게 복수해 주겠다고 다짐했다. 아무래도 비둘기의 훈련 강도를 높여야겠어.
굳은 얼굴을 보고 레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혜라, 혹시 무서우면 나랑 손잡을래?”
“너 이런 거 잘 못 봐?”
나는 천성이 겁 없는 사람이다. 레이가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그럴걸?”
“……솔직히 말해. 무서운 게 아니라 그냥 나랑 손잡고 싶은 거지?”
“당연한 걸 묻네.”
레이가 사르르 눈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거절할 마음도 없었지만 설사 있었다 해도 거절하기 어려운 미소였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박력 있게 깍지를 꼈다. 레이는 만족스럽게 웃고선 내게 조금 더 붙어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