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화 (108/138)

<108화>

에단 말로는 물건이 제 주인 찾아가는 거라던데 사실은 처분하기가 귀찮아서 그냥 나한테 버리는 거였다. 뭐, 덕분에 유니크하지만 쓸모없는 장난감을 공짜로 얻게 돼서 좋았다.

“그거 하나 때문에 마탑주가 될 순 없어.”

에단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퍽도 그러겠다며 비웃으려다가 정말 안타깝다는 듯이 미간을 모았다.

“아쉽네. 네가 마탑주가 되면 계산기랑 핸드폰 좀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려 했는데.”

“계산기는 뭔지 알 것 같은데 핸드폰? 그건 또 뭐야.”

에단은 관심 없는 척 무심하게 물었지만 살짝 기울여진 상체는 구미 당긴 속마음을 대변했다.

“핸드폰이 뭐냐면 아주 획기적인 물건이야. 이게 무슨 기능을 갖고 있냐면…….”

바깥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바라보자 벌써 7시였다. 나와 에단은 약속이라도 한 듯 번갈아 물약을 마시고 음 소거 마스크를 쓴 다음 후다닥 지정된 구역으로 달려갔다.

정수리 끝까지 투명하게 변하자 덜컥 문이 열렸다. 다소 냉랭한 표정의 아로네와 그에게서 웃음을 이끌어 내려 쩔쩔매고 있는 데네브가 차례로 문턱을 넘었다. 나는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대박……. 벌써 재밌다.”

***

아로네는 데네브를 거실 소파로 이끌었다. 데네브는 처음 들어와 보는 아로네의 집을 신기하다는 듯 구경했다.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려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눈동자 한가운데에 떠오른 놀라움은 어쩔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작가에 비하면 지금 아로네가 사는 주택은 소박한 편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비교 대상이 그 으리으리한 공작가일 때 얘기지만.

아로네가 와인 잔 두 개를 가져오자 데네브가 와인병을 땄다. 자그마치 일주일 중 5일을 술 덕후와 보내서 그 와인이 얼마나 비싸고 구하기 힘든 건지 알 수 있었다.

역시 인생은 알다가도 모르는 거야. 데네브가 아로네를 위해 저런 귀한 술을 구해 올 줄 누가 알았겠어?

아로네가 와인 한 모금을 마셨다. 그가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자연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가 아직도 여기에 있는 건지 확인하는 것이다.

나는 사전에 약속했던 대로 살짝 열린 창틀 앞에 서서 살살 부채질을 했다. 아로네의 머리카락이 은근하게 흔들렸다. 아로네는 입가의 미소를 띠고 와인 한 모금을 더 마셨다.

데네브는 그 표정을 달리 오해하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필시 아로네가 와인을 마음에 들어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 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이 내 팔을 툭 쳤다. 나는 뭐냐는 의미로 팔꿈치로 에단의 옆구리를 찔렀다.

에단이 등 뒤로 무언가를 건넸다. 손에서 느껴지는 안경의 감촉은 생경한데 시야를 채우는 건 오직 바닥 무늬뿐이었다.

나는 일단 안경을 쓰고 옆을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던 얼굴이 은으로 도금된 안경을 쓰고 있었다.

뭐야, 이런 걸 갖고 있으면서 왜 이제야 준 거야? 나는 의문을 표하듯 과장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에단이 잠깐만 기다리라는 듯 한쪽 손을 들어 올린 뒤 어디서 난지 모를 수상한 잉크통에 깃펜을 적시고 그대로 바닥에 글을 끄적였다.

아로네한테 걸렸다간 최소 손가락 하나는 내줘야 할 죄였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에단의 팔의 잡아끌었다. 에단은 사고를 쳐 놓고도 기세등등하게 바닥을 눈짓했다.

아로네가 가장 아끼는 카펫에 새까만 글씨가 자수처럼 새겨져 있었다.

-방금 만들었어. 무효화 안경을 써야만 보이는 투명 잉크야.

너 미쳤니? 나는 에단의 멱살을 틀어잡고 흔들었다. 투명 잉크고 뭐고 저렇게 얼룩이 크게 남아선 아로네가 속상해할 것이다. 에단이 짜증스럽게 내 손목을 잡고 억지로 드잡이를 멈추었다. 그가 빠르게 깃펜을 움직였다.

-3분 뒤에 저절로 사라지는 잉크니까 유난 떨지 마.

그런 건 빨리 좀 말하지. 나는 괜히 머리를 긁적이곤 멋쩍어진 양손을 맞잡았다. 에단이 할 말 있으면 하라는 듯 깃펜을 건네줬다.

-방금 만들었다는 게 투명 잉크랑 무효화 안경 중에 뭐야?

-둘 다.

그러니까 아이디어가 떠오르자마자 바로 만들었다는 거 아니야. 그것도 환장하게 어렵다는 무언 주문으로. 나는 문득 저 천재가 미치도록 재수 없어져서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 근데 너는 평소에 잉크랑 안경을 갖고 다니냐?

에단이 정말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인상을 썼다.

-그걸 왜 갖고 다녀. 그냥 소환하면 되는걸.

마법사는 일반인이랑 다르다, 이거지? 이거 원. 마법 못 하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나는 흐린 눈을 하고 다시 아로네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에단이랑 시답지 않은 잡담을 하는 사이 어느새 와인병은 반 이상 비워져 있었다. 알코올이 들어간 덕분에 초반의 싸늘했던 분위기는 다소 수그러들었다.

아로네가 와인 잔을 손가락 사이로 느긋하게 굴렸다. 그가 살짝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지? 관심도 없는 사업 얘기하자고 연락한 거 아니잖아.”

사건의 내막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 같지 않았다. 사교계를 주름잡았던 사람답게 연기력이 아주 일품이었다. 데네브가 긴장한 듯 갑자기 눈을 빨리 깜박였다.

그가 잠깐의 침묵을 두고 힘겹게 말을 꺼냈다.

“사과하고 싶었어.”

아로네는 차갑게 웃었다. 데네브의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게 실시간으로 보였다. 나는 깃펜을 쥐고 대충 휘갈겼다.

-아, 데네브 선수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저한테 부탁할 때의 뻔뻔함과 패기는 모두 증발해 버린 것 같은데요. 과연 위기를 이겨 내고 아로네의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에단 씨는 이 상황을 어떻게 보시나요? 데네브 선수한테 가망이 있나요?

에단이 키득키득 웃으며 한술 더 떴다.

-데네브 선수의 상황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가 있죠.

-그게 뭐죠?

-헛수고요. 소공작은 지금 헛수고를 하고 있습니다.

-의견 감사합니다. 일단 데네브 선수를 조금 더 지켜보도록 하죠.

데네브가 결심을 굳힌 듯 조심스럽게 아로네의 손등을 감쌌다. 아로네는 매끄럽게 뻗은 손가락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로네가 손길을 내치지 않았음에 희망을 얻었는지 데네브는 후회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내가 옳다고 생각했었어. 정상 궤도를 벗어나는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

“이해하려고 노력해 본 적도 없잖아.”

아로네가 손을 빼냈다. 데네브의 눈이 참담함으로 일그러졌다.

“미안해.”

“뭐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널 함부로 재단한 거, 널 혼자 내버려 둔 거, 날 선 말로 상처 준 거, 네가 변했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끝끝내 믿지 않았던 거……. 그리고 네가 저택을 나가도록 만든 거.”

아로네가 놀란 듯 데네브를 응시했다. 이 정도로 데네브가 진심이라고는 생각 못 했던 것이다. 어떤 감정은 실제로 봐야만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법이었다.

데네브는 얼핏 간절해 보이기도 했다. 속에서 무언가가 계속 울컥울컥 올라오는지 그의 목울대에 힘이 들어갔다.

아로네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진심 어린 후회를 목도하고 말을 잃었다. 죄지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라 데네브는 침묵을 지켰다. 나는 다시 깃펜을 들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분위기가 진지한데?

-그러게. 소공작이 준비를 많이 해 온 모양이야.

-그래도 아로네의 마음을 돌리려면 쉽지 않을걸.

자그마치 19년이다. 모든 갈등이 데네브의 책임만은 아닐 테지만 그때는 외면했던 사람이 이제 와서 다시 잘해 보자는 꼴이 조금 웃겼다.

아로네 또한 많이 늦은 사죄가 우스웠나 보다. 그가 지켜보는 사람이 상처 받을 정도로 냉소했다.

“그래서?”

“네가 가문을 증오한다는 거 알아.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가족이라는 단어 아래에 묶이고, 그건 앞으로도 변함없을 거야. 그러니…… 내게 기회를 줘.”

“무슨 기회.”

아마 데네브도 오늘 당장 용서를 받으리라 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 감히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좋은 남매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 줄게. 혈연의 끈을 그렇게 허무하게 잘라 내지 말아 줘.”

나는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숨을 죽였다. 아로네는 벌컥 화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슬퍼 보였다. 에단이 바닥을 보라는 듯 나를 툭 건드렸다.

-아로네가 뭐라고 할 거 같냐.

-기회 줄 거 같은데.

에단이 절대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왜? 아로네는 절대 용서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편이지. 근데 지금 데네브가 거의 애원하다시피 빌고 있잖아.

에단이 힐긋 데네브를 보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곧 눈물이라도 떨어뜨릴 기세네. 의외야.

동감이었다. 나는 데네브가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사자인 아로네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니까. 정확히 그 의외인 점 때문에 아로네는 데네브를 두고 볼걸?

물음표가 사라지던 순간, 아로네가 불쑥 말했다.

“한 달.”

데네브가 희망 어린 눈으로 아로네를 응시했다. 그 외에 보이지 않는 두 쌍의 눈이 제각각 다른 감정을 품고 그들을 지켜봤다. 아로네가 도전적으로 선언했다.

“내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시간으로 딱 한 달 줄게.”

***

그 뒤로 아로네와 데네브는 와인 한 병을 더 비웠다. 대화는 주로 데네브가 이끌었다. 평상시의 그는 대화를 주도하는 데 익숙했겠지만, 상대가 아로네라서 그런지 이따금씩 목이 타는 듯 와인을 물처럼 마셨다.

데네브는 귀찮을 정도로 아로네에게 많은 걸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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