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103/138)

<103화>

에단이 팔짱을 끼고 거만을 떨었다.

“나니까 쉽게 풀었지, 다른 애들은 절대 못 해.”

주변에 잘난 척하는 애들이 하도 많아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게 이젠 습관이 됐다. 나는 자연스럽게 딴생각을 했다. 고난도의 마법도 이렇게 쉽게 해제하다니.

“……이런. 그럼 진실의 물약도 너한텐 소용없다는 얘기잖아?”

에단한테 꼭 알아내야 할 진실이 있어서 그동안 그의 홍차에 진실의 물약을 탈 기회를 노렸었다. 근데 다 망해 버렸다. 비밀 서약도 손쉽게 푸는 애가 물약 해제 주문을 모르겠어 설마?

언젠가의 주말, 나는 자다가 갑자기 귀밑에서 울리는 닭 울음소리 때문에 심장이 멎을 뻔했던 적이 있다. 생닭이 어떻게 내 방까지 들어왔는지 아직까지도 미스터리지만, 난 그 범인이 에단이라고 확신한다.

물론 에단은 여전히 아니라고 딱 잡아뗐다. 하지만 그 후로도 간간이 내 숙소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장난은 에단 말고 할 사람이 없었다. 걔는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내 반응이 재밌나?

“진실의 물약? 그건 너도 피할 수 있어.”

나와 아로네는 서로를 잠깐 바라보았다가 다시 에단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 강력한 물약을 어떻게 피해?

“물약이 가릴 수 있는 건 말의 진실성뿐이야. 네 속내까지 끄집어낼 수 없어.”

그니까 요리조리 뜬구름 잡기만 하면 잘 피해 갈 수 있다는 거잖아. 마법이 그렇게 허술한가?

“마법 물약인데도?”

에단이 무료한 듯 분필을 허공에 던지고 잡는 걸 반복했다.

“마법이라는 말이 거창해서 그렇지, 마법 물약이라고 다 완전한 건 아니야. 변신 물약만 해도 부작용이 상당한걸.”

그가 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보고 덧붙였다.

“못 들어 봤어? 기본적으로 구토, 두통, 어지럼증이 수반하고 장기 복용할 때는 부작용이 더 심해. 내가 봤던 사람들은 시력을 잃거나 머리가 하얗게 새거나 손가락 길이가 제각각이거나……. 근데 이 재미없는 얘기를 더 해야 해? 이쯤 하고 빨리 더스크번 얘기 좀 해 봐.”

물약에 대해 더 캐묻고 싶었지만 에단의 기세가 너무 강경했다. 나는 차 한 모금을 마시고 아로네와 에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긴 이야기가 될 거야.”

아로네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은 손가락 튕김 한 번에 팝콘을 만들고 바삭바삭 씹었다. 나는 잠시 말없이 에단을 바라보았다.

그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팝콘 하나를 내 입으로 던져 넣었다. 나는 팝콘을 받아먹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다 사실이니까 놀라지 마.”

***

나는 벌컥 문을 열자마자 우렁차게 소리쳤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리고 잠깐 저 좀 보시죠!”

할리가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앓는 소리를 냈다. 제이든은 유난히 밝은 내 얼굴을 보고 짐짓 인상을 썼다. 나는 모든 것을 무시하고 제이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의아하게 올려다보는 눈빛에 의기양양한 미소를 돌려주며 품에 고이 보관한 편지를 탁 내려놓았다.

“뭐야?”

“더스크번의 부족장한테 편지가 왔어요. 아니, 이젠 족장이겠네요.”

나는 악당처럼 우하하 웃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제이든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편지 안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쿠카리에의 편지는 간결했기에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됐다.

제이든이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 시선을 기다렸던 나는 활짝 웃었다.

“거봐요. 편지 올 거라고 말씀드렸었잖아요. 휴, 아슬아슬하게 딱 일주일 되는 날에 왔네!”

“너는 무슨…….”

제이든은 기막혀서 말을 잇지 못했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던 눈동자에 가능한 모든 종류의 기상이변이 담겨 있었다.

착각인 줄 알았던 반짝거림은 약간의 존경심을, 흔들리는 동공은 이유 모를 두려움을, 그럼에도 도망가지 않는 시선은 어쩔 수 없는 만족감을.

“제가 뭐요?”

나는 싱글싱글 웃으며 답을 기다렸다. 제이든은 갑자기 맥이 풀린 듯 깊게 한숨을 내쉬고 편지를 서랍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내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진심을 담아 말했다.

“잘했다.”

제이든은 업무에 몰입하려는 듯 펜을 들었다. 그건 내 시나리오에 없던 행동이었다. 내가 무슨 일을 해냈는지 뻔히 알면서 어쩜 저리 무심할 수 있지?

“제이든 님? 설마 그게 다인가요?”

“뭐가 더 필요하지?”

제이든의 표정이 너무 천연덕스러워서 헷갈리기 시작했다. 비리 고발했을 땐 그 상으로 황제한테 소원을 말했는데, 수만 명을 죽음의 약초에서 구해 줬으면 상의 크기가 더 커야 하는 거 아닌가?

잠깐. 설마 제이든이 서프라이즈 선물을 주려고 지금 모른 척하는 건 아닐까? 하하, 내가 생각한 거지만 정말 턱도 없다.

제이든이 전혀 생각을 안 하고 있든, 나한테 상 따위 내릴 생각 없든, 그도 아니면 그저 날 놀리려고 시치미를 떼고 있는 거든 상관없다. 네가 먼저 말 안 꺼내면 내가 하지 뭐.

“그런 거 없나요? 잘했으니까 상을 줄게, 소원 한번 말해 봐. 뭐 이런 거요.”

제이든은 이제야 내 뜻을 간파했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어쩐지 제이든이 미묘하게 웃은 것 같아서 기분이 찝찝했다. 그가 턱을 괴고 날 뚫어져라 쳐다봤다.

“무슨 소원을 원하나?”

마음 같아서는 작위를 달라고 하고 싶었다. 최소 백작 정도 되면 날 깔보는 사람은 없겠지. 전쟁 영웅이 되지 않아도 작위를 받을 수 있다는 최초의 선례가 될 거고.

하지만 그런 요구는 도전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제이든이 내게 일순 두려움을 느꼈던 이유도 바로 그런 맥락 아닐까. 내가 제대로 야망을 가지면 얼마나 높이 올라올 수 있을지 가늠이 안 돼서.

선명한 위험은 별로다. 나는 현실과 타협하기로 했다.

“솔직히 이번 일 제가 다 한 일이잖아요. 인정하시죠?”

“그래.”

내 건방진 말투에도 제이든은 놀랍도록 차분했다. 나는 기묘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그것에 대해 미처 생각해 볼 틈도 없이 호기롭게 말했다.

“제 성과를 증명할 공식적인 증표가 필요해요.”

제이든은 웃었다. 마치 내 요구를 미리 예상하기라도 한 사람처럼.

뭐지? 나는 언제 시작됐는지 모를 이 두뇌 싸움에서 내가 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이든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 훈장 정도면 만족하나?”

“……만약 그 계약에 서명하실 거면 더스크번 파견단에 제 이름도 올려 주세요. 지휘관으로.”

나보다 그 자리에 적합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내 본래 직위는 보좌관이니 제이든은 그 요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거라 짐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러지.”

그래, 나는 이제 확신했다. 제이든은 내 머리 위에서 놀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잘했다고 할지언정 바로 대답할 종류의 요구가 아닌데 순간의 고민도 없다니.

그는 명백히 내게 바라는 점이 있었다. 나는 그제야 몸에서 긴장을 풀었다.

“뭡니까?”

“무엇이?”

제이든이 순순하게 나오는 건 좋은데, 그 이면에 분명 시커먼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 거라서 찝찝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고심해서 만든 이 상황의 주도권을 제이든이 가져갔다는 게 짜증 났다.

“제가 이런 말을 할 거라고 이미 예상하셨죠?”

제이든이 재수 없게 코웃음을 쳤다. 살짝 가늘어진 눈매는 내가 그보다 한참 아래에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만들었다.

“뻔하지.”

그동안의 세월이 헛되진 않았나 보다. 나만 제이든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제이든도 나를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바쁜 황태자 전하께서 부하 직원한테 그렇게 관심 많은 줄 알았다면 다중 인격 연기를 한번 해 보는 거였는데. 나는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부터요?”

“뜬금없이 더스트번의 부족장을 믿는다고 얘기했을 때부터.”

아이고, 미리 복선을 깔아 놓으려던 게 부메랑으로 돌아와 내 뒤통수를 칠 줄이야. 간만에 철저하게 계획을 짜 놓았더니 오히려 해가 됐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제이든은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 매혹적인 미소를 그렸다. 독을 품은 식물들이 유독 아름다운 외관을 갖는다는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그가 이 질문만을 기다렸다는 듯 유려하게 말했다.

“다시 아로네와 잘해 볼 생각이야. 제대로.”

“워매…….”

설마하니 대놓고 인정할 줄이야. 그것도 내 앞에서!

나는 귀를 틀어막는 것과 소리를 질러 제이든의 말을 막는 것 중 뭐가 더 효과적일지 고민했다. 그 찰나에 제이든은 폭탄을 던졌다.

“네게 훈장과 지휘관 자리를 약속하지. 단, 네가 어떠한 술수 없이 날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는 조건으로.”

주위에 후회남들이 넘쳐나서 행복하다고 말했었던가? 그 말 지금 당장 취소한다. 신이 있다면 어찌 제게 이런 시련을 내려 준 건가요. 방법만 찾으면 그쪽이 있는 곳에 가서 흠씬 두들겨 패 드릴 겁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모든 게 한데 섞여서 매끄러운 문장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결국 튀어나온 건 패배의 시인이었다.

“……저한테 그런 부탁을 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설마 이게 다 꿈은 아니겠죠?”

제이든은 친절하게도 내 희망의 싹을 댕강 달라 버렸다. 그가 즐거워하며 미소 지었다.

“생각할 시간은 딱 하루 주지.”

저 악마 같은 놈.

***

치킨인가 피자인가 그 이후로 희대의 딜레마가 찾아왔다. 제이든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과 않는 것 중 어느 게 옳은 선택인지 모르겠다.

애초에 내가 더스크번에서 간 이유는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편한 길을 내버려 두고 혼자 처리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게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내가 바랐던 인정의 증거가 바로 코앞에 있다. 특별 훈장을 가슴팍에 달고 다니면 누구라도 내 이름을 뒤에서 수군거릴 수 없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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