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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102/138)

<102화>

요즘 아로네는 뒷북치는 누군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스트레스를 푸는데 입욕제만 한 게 없어서 나는 라일락 향이 나는 입욕제를 사 들고 아로네의 가게로 향했다.

내 선물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며 문을 열었다. 갑자기 열린 문에 이마를 세게 부딪치지만 않았더라면 내 의지를 끝마칠 수 있었을 테다. 나는 이마를 붙여 잡고 꽥 고함을 질렀다.

“아악!”

두개골이 빠개지는 듯한 고통이 찌르르 울렸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대역 죄인을 노려보았다.

욕을 한 바가지로 퍼부어 주려고 했건만, 전혀 예상 못 한 사람이 서 있어서 나는 고통도 잊고 입을 떡 벌렸다.

“아니, 데네브 님이 여긴 어쩐 일로?”

“젠장…….”

데네브가 작게 욕설을 읊조리며 치부를 들킨 사람처럼 시선을 피했다.

근래 데네브가 끈질기게 아로네에게 사죄의 편지를 보냈다는 건 알았다. 편지에는 그동안 방치해서 미안하다느니,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느니 따위의 놀라운 말로 가득했다. 아로네가 직접 말해 줘서 믿었지, 《귀족의 모든 것》에서 접했다면 루머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튼, 데네브가 가게에서 나온 걸 보아하니 참다못해 아로네를 찾아온 것 같았다. 그리고 아로네는 눈물 젖은 편지를 꾸준하게 무시했던 것처럼 바로 데네브를 내쫓았겠지.

음, 보지 않았지만 생생한 상황이 눈앞에 그려졌다. 차 한 잔 권유받지 못한 데네브가 얼마나 속이 뒤틀렸을지도. 그렇다고 문을 부술 기세로 여는 건 무슨 경우야?

“아니, 그건 됐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제 이마를 이렇게 만든 거죠?”

나는 빨갛게 부어오른 이마를 가리켰다. 데네브가 보기에도 상태가 나쁜지 그는 평소처럼 비아냥거리지 못했다. 대신 그는 사연 많은 한숨을 내쉬며 나를 골목으로 끌고 갔다.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서 순순히 따라가 줬다.

사림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 와서야 데네브가 입을 열었다. 그의 눈은 확고한 결의에 차 있었다.

“네가 좀 도와줘야겠다.”

내가 널 왜 도와주냐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뭐를요?”

“아로네와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싶은데 기회가 없어.”

“와우! 그러니까 제가 아로네한테 얘기 좀 잘해서 자리 한 번 마련해 달라는 뜻인가요?”

데네브가 선명한 의구심과 약간의 희망을 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데네브의 기억 저장 장치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아로네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그 친구인 나한테 이런 부탁을 할 리 없는데. 역시 아직도 내가 만만한 건가?

“싫어요.”

아마 데네브는 내 거절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 뜻대로 상황이 잘 풀리지 않자 옅게 인상을 썼다.

아로네와 대면해야 된다는 이유가 아닌 그 애와 못 만난다는 이유로 답답해하다니. 정말 인생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내 주변에 후회남들이 이리도 넘쳐 나는 걸 보니 아마 나는 전생에 큰 공을 세웠나 보다.

데네브가 쉽게 물러날 것 같지는 않고, 나도 이 엄청난 구경거리를 빨리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나는 순진한 척 물었다.

“근데 어디 아프세요?”

데네브가 무슨 생뚱맞은 소리를 하냐는 듯 눈썹을 실룩였다. 나는 능청스럽게 말을 늘였다.

“아니……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니까 그러죠. 아로네랑 남보다도 못한 사이였잖아요.”

죽을병에 걸리지 않고서야 이렇게 딴 사람처럼 바뀔 리 없다. 도대체 그동안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던 거야?

나는 경청할 준비가 됐다는 걸 어필하기 위해 귀 옆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데네브가 그 모습을 어이없게 쳐다보면서도 의외로 빼지 않고 대답해 줬다.

“……아로네가 객기 부리는 줄 알았어. 한동안 잠잠하던 관심병이 또 도진 거라고 생각했었지.”

“파혼하고 사업에 뛰어들고 출가까지 했는데, 관심병이라고요?”

다른 건 모르겠고 그간 아로네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낮았는지 알겠다. 데네브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넌 아로네를 몰라. 난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전부터 그 애를 봐 왔어.”

글쎄, 나보다 아로네를 잘 아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 같은데.

“바로 옆에서 지켜본 건 아니었지만요.”

데네브는 가뿐히 내 말을 씹었다. 그가 과거를 회상하며 아련하게 눈을 반짝였다.

“금방 제풀에 지쳐 집으로 돌아올 줄 알았어.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돌아올 기미가 안 보이더군.”

나는 계속 듣고 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데네브가 고해 성사를 하듯 공허하게 중얼거렸다. 깊게 패인 미간에 19년 분량의 후회가 담겨 있었다.

“객기가 아니라 진심이었다는 걸 얼마 전에 알았어. ……최근 인터뷰를 보고 나서야 내가 그 애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지.”

무슨 인터뷰를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개업한 지 반년도 안 돼서 다른 의상점의 매출과 인기를 훌쩍 뛰어넘다니! ……잡지사들은 엄청난 기록을 세운 아로네를 인터뷰하려 혈안이었다. 데네브가 본 것도 그중 하나겠지, 뭐.

게다가 아로네는 직접 제작한 정장을 입고 잡지 표지를 장식했는데, 포스가 철철 흘러넘쳐서 나는 남몰래 감격의 눈물을 흘렸더랬다.

“그래서 이제 어쩌시게요?”

빈정대는 게 아니라 정말로 궁금했다. 데네브와 아로네의 관계는 이미 한참 전부터 틀어져 있었다. 어긋난 톱니바퀴를 고치려면 평생을 바친다 해도 모자랄 거다.

물론 에단이라는 선례가 있긴 하지만, 그건 그 애가 사업할 때 유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애초에 제이든이나 데네브와 달리 에단은 비교적 아로네와 접점이 별로 없었고, 따라서 감정의 골도 그리 깊지 않았다.

데네브가 날 직시했다. 냉담하다고 생각했던 눈동자에 미약한 온기가 돌아서 조금 놀랐다.

“용서를 구하고 앞으론 오라버니로서 잘해 줘야지.”

“왜요? 아로네는 지금껏 좋은 오라버니 없어도 잘만 살아왔는데.”

데네브는 이제 짜증이 난 것 같았다. 말하는 족족 태클을 걸어 댔으니 당연한 반응이긴 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미운 말이 튀어 나가는데 어떡해?

이런 식이라면 머지않아 데네브랑 말싸움을 할 것 같았다. 나는 슬슬 뒷걸음을 치며 인도 쪽으로 나갔다. 원하는 것도 못 얻고 스트레스만 왕창 받은 데네브가 한숨 쉬듯 말했다.

“조언 한마디도 못 해 주나?”

난 착하니까 딱 하나만 해 주지, 뭐.

“음…… 집에 찾아간다든가 이런 건 절대 하지 마세요. 그거 완전 최악.”

고맙다는 말을 기대했는데 데네브는 얼음처럼 굳어 눈만 깜박거렸다. 갑자기 주가 하락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처럼 굴 이유는 딱 하나뿐이었다. 나는 동정의 눈빛을 보냈다.

“축하드려요. 난이도가 더 높아졌네요.”

***

나는 산뜻한 마음으로 인사했다. 아로네가 옷감 고르는 데 열중하다가 내 목소리를 듣고 반색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로네가 발자국을 뗀 순간, 비어 있는 줄 알았던 소파 아래에서 머리통 하나가 쑥 올라왔다. 그가 표범처럼 달려와 내 어깨를 흔들었다.

“도대체 뭘 하느라 이렇게 늦게 온 거야?”

간만에 아로네랑 오붓한 시간 좀 보내려고 했건만, 객식구 에단 때문에 다 수포로 돌아갔다. 나는 에단의 손을 툭 쳐 냈다.

“어떻게 올 때마다 있냐? 이 정도면 너도 월세에 좀 보태라.”

에단은 우스운 농담을 들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난 이럴 자격 있어. ‘24시간 보온 로브’가 얼마나 잘 팔리는데. 그거 내 도움 없으면 절대 못 만들었어.”

어느새 다가온 아로네가 한마디 더 보탰다. 모든 걸 포기한 자 특유의 해탈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난 진작 포기했어. 쟤 4시간 전부터 와서 기다리더라.”

수수께끼라면 환장하는 에단 때문에 나도 환장할 것 같았다. 아니, 더스크번이 뭐길래 사람 인격을 바꿔?

“나 한참 기다렸다. 내 시간을 낭비한 만큼 질 높은 대답을 해야 할 거야.”

에단이 확실히 맛이 간 눈으로 경고했다. 미친 마법사 모드의 에단은 정말 앞뒤를 가리지 않아서 웬만하면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게 내 정신 건강에 이로웠다.

나는 아로네에게 선물을 넘겨주고 멀뚱멀뚱 에단을 바라봤다. 그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아로네에게 저리 비키라고 타박했다. 아로네는 어이없어서 혀를 차면서도 순순히 멀리 떨어져 섰다.

에단은 주머니에서 분필을 꺼내고 내 주위로 겹겹의 원을 그렸다. 무아지경에 빠진 에단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기하학적 무늬를 새겨 넣었다.

이해할 수 없는 무늬에 우주의 신비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에단이 다르게 보였다. 아로네 또한 묘한 눈빛으로 에단을 지켜봤다.

탁. 마지막 문양까지 그려 넣고 에단은 원의 시작이자 끝부분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그가 눈을 감고 기도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옴니스, 세크레툼, 바네스코.”

단순한 흰색 선이었던 것에서 빛이 발하기 시작했다. 단전 저 아래에서부터 무언가 울컥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토기를 누르려 했지만 내 의지보다 본능이 더 강했다.

나는 허리를 굽히며 쓰러지듯 아래로 넘어졌다. 동시에 이질적인 감각이 순식간에 기도를 타고 넘어와 바깥으로 분출되었다.

“혜라!”

아로네가 한달음에 달려와 에단을 붙잡고 도대체 무슨 짓이냐고 멱살을 잡았다.

나는 혼비백산하여 바닥을 둘러보았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토사물은 없었다. 일단 나는 흥분한 아로네를 에단과 떨어뜨려 놓았다. 에단이 살았다며 마른기침을 뱉었다.

“방금 뭐야? 난 내가 토한 줄 알았어.”

에단이 기침을 뚝 그치고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마법이 잘 걸렸나 보네. 이제 넌 비밀 서약으로부터 자유야.”

“뭐야, 원래 이렇게 쉽게 풀리는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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