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138)

<99화>

“다음은 누굴까?”

민야라가 침을 꿀꺽 삼키고 방어적으로 양손을 위로 올렸다. 그를 따라 나머지 마을 사람들도 항복자 세를 취했다. 나는 민야라의 머리를 향해 총을 더 높이 들었다.

“나한텐 이런 물건이 더 있어. 마음만 먹으면 이 마을을 불태워 없앨 수도 있고, 영원히 얼려 버릴 수도 있지. 아, 치명적인 독이 깃든 검도 갖고 있다. 베이면 단숨에 골로 가 버리는 독이지.”

더스크번을 해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나는 부러 음산하게 읊조렸다. 민야라가 겁을 집어먹고 물었다.

“……원하는 게 있는 건가?”

“우리 협상을 하자. 서로에게 득이 될 만한 협상을.”

“계속하라.”

민야라가 벌벌 떨리는 손을 등 뒤로 감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 박자 쉬고 지난 밤 쉬지 않고 연습했던 대사를 뱉었다.

“당신은 죽고 싶지 않고, 나는 이번 출장이 성공적이었음을 증명해 줄 증거가 필요해. 서로 협조해 준다면 둘 다 목적을 이룰 수 있어.”

“어떻게……?”

“나랑 같이 수도에 올라가. 대신 난 여기서 보고 들었던 모든 걸 없었던 일로 해 줄게.”

여유작작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나는 초조함을 숨기려 주머니에 손을 꽂고 민야라를 바라봤다.

죽음의 냄새를 맡고 희게 질렸던 얼굴이 일말의 희망을 목도하고 혈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민야라가 약간의 여유를 회복하고 현명한 척 반박했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다. 내가 더스크번을 떠나는 건 위험하다.”

“내 말을 이해 못 하네. 모른 척해 주겠다는 말은 그쪽한테 저주받은 데이타스를 해명할 기회를 주겠다는 거야. 내가 맞장구쳐 주면 황제도 마지못해 그 말을 믿겠지. 그러면 2차 조사도 없을 거고, 그사이 도망가면 되잖아?”

“하지만 억지로 끌고 가도 되는데 왜 굳이 협상을 하는 건가? 그 점이 수상하다.”

눈감아 주겠다고 인심 써 주면 ‘감사합니다’ 하고 넙죽 받으면 될 것이지, 죄지은 놈이 왜 이렇게 말이 많아? 마음 같아서는 그냥 가진 무기를 다 써서 민야라를 납치하고 싶었다.

내가 실낱같은 인내심을 붙들고 스크롤을 찢지 않는 이유는 유혈 사태를 최대한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채집자를 제외한 사람들은 동산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른다. 나는 폭군이 아니다.

“수상해? 그럼 그냥 피 좀 보고 억지로 끌고 갈까? 그걸 원해?”

나는 총을 집어넣고 한 손엔 스크롤을, 다른 한 손엔 단검을 들었다. 사람들이 술렁이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타이밍 좋게도 쿠카리에가 민야라의 등을 살포시 떠밀었다. 나는 단검으로 스크롤을 아주 천천히 찢었다.

“시간은 가고 있어. 어떻게 할래?”

막대한 재산을 두고 죽기엔 민야라는 너무 욕심이 많았다. 그가 헐레벌떡 소리쳤다.

“알겠다! 가고 싶다! 가게 해 달라!”

진작 그럴 것이지. 나는 앞장서라는 듯 턱짓했다. 이로써 계획의 반절은 성공했고, 남은 건 쿠카리에의 몫이다. 그가 부족장으로서 훌륭한 리더십을 보여 주길 나는 간절히 바랐다.

***

가는 길은 혼자가 아니라 살인적인 주행 시간도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좁은 마차 안, 범죄자와 마주 보고 반나절 가량 달리다니. 덕분에 나는 쏟아지는 졸음을 참으려 그렇게 허벅지를 꼬집어야 했다.

운 좋게도 자정 전에 수도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극소수만 알고 있는 비밀 통로를 통해 황궁에 들어가자 뜻밖의 인물이 우리를 반겼다.

윌터는 형식적인 안부 인사를 건네려다가 내 뒤로 마차에서 내린 민야라를 보고 황당하다는 듯 헛숨을 들이켰다.

“뭡니까?”

그 질문은 내가 먼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도대체 황제의 보좌관이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 분명 할리가 나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사람이요? 더스크번의 족장이에요.”

윌터는 도저히 못 믿겠다는 듯 민야라를 망연히 응시했다.

“족장이라고요? ……근데 꼴이 왜 저러죠?”

아, 그게 문제였어?

“말하자면 길어요.”

그 길고도 짧은 시간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일이 벌어졌던지. 민야라가 틈만 나면 탈주하거나 날 죽이려고 해서 갖고 온 무기의 성능을 하나씩 시험해 볼 수 있었다.

모두 훌륭했지만 아무래도 끈적이 그물 총이 제일 유용했다. 지금도 민야라는 그물에 손발이 묶인 채 질질 끌려다니고 있었다. 입까지 막아 두니까 종알거리지도 못했다.

“그쵸, 족장님?”

민야라가 나를 죽어라 노려보았다. 꼴이 엉망인 주제에 참으로 위협적이었다.

천은 군데군데 뜯겨 있고, 심지어 소매는 불에 타서 덜렁거렸다. 풍성했던 머리카락 사이가 듬성듬성 비어 있는가 하면 눈가엔 커다란 멍이 들어 있었다.

이렇게 찬찬히 몰골을 살펴보니 어지간히 얻어맞았구나 싶었다. 뭐, 딱히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황제 폐하가 절 찾으시나요?”

윌터는 드디어 민야라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비즈니스 모드로 돌아왔다.

“황태자 전하의 병세가 나아지지 않아 황제 폐하가 대신 보고를 듣기로 하셨습니다.”

“아직도 안 나았다고요? 어떻게 그럴 수……. 아, 잠깐만요.”

나는 주머니를 뒤져 쿠카리에에게 선물 받은 정상적인 데이타스 약초를 꺼냈다. 다섯 개밖에 없는 귀중한 거라 제이든한테 쓰기 아까웠지만, 이게 다 사회생활이려니 했다.

제이든이 완전히 나으면 오늘 일을 언급하면서 두고두고 우려먹어야지. 제이든은 50% 정도 나한테 목숨을 빚진 셈이라고.

윌터에게 약초 하나를 건네주자 그가 살짝 인상을 썼다.

“이건 데이타스 약초 아닙니까?”

“네, 맞아요. 부족장이 직접 품질을 보증한 순수한 약초예요. 그거 하나면 제이든 님 병세도 금방 나아질 거예요.”

“확실합니까?”

“당연하죠.”

윌터는 믿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우리를 황제의 집무실 앞까지 데려다주고 약초를 전달하러 황급히 사라졌다. 나는 끈적이 그물을 도로 회수하고 히죽 웃었다.

“황제 폐하께 말할 준비 됐나요?”

민야라는 나랑 말 섞기도 싫어서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나는 잘했다면서 가볍게 민야라의 등을 툭 쳤다. 가엽고 멍청한 민야라. 내가 뒤통수칠 것도 모르고 옷매무새를 가다듬네.

“그럼 들어가죠.”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며 환한 빛이 쏟아졌다. 나와 쿠카리에의 배신은 반드시 성공의 막을 내릴 것이다.

별 괴상한 부탁을 받았던 그때 이후로 처음 보는 황제였다. 민야라가 쭈뼛거리며 나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나는 현기증 이는 머리를 다잡고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황제가 펜을 내려 두고 살벌하게 눈을 번뜩였다.

“살아생전 더스크번의 족장을 보게 될 줄이야. 영광이군.”

민야라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동안 황제는 수만 명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내몰고도 발뺌하던 사람을 무척 궁금해했었다.

드디어 마주하게 된 뺀질이의 몰골이 말이 아니라 황제는 내게 의문을 보냈다. 나는 알아듣지 못한 척 말을 돌렸다.

“족장님이 직접 상황 설명을 해 주실 겁니다.”

나는 민야라에게 눈치를 줬다. 황제가 민야라를 나노 단위로 자세하게 뜯어보았고, 민야라는 황제의 아우라에 눌려 기를 못 폈다. 그가 우물쭈물하며 말문을 열었다.

“그게, 토양이 오염되어서…….”

별안간 나는 민야라의 등을 세게 후려쳤다. 그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황제가 인상을 찌푸리고 나를 흘겼다.

정말이지, 내가 예상한 그대로 흘러가서 만세 삼창이라도 하고 싶었다. 나는 분개한 척 숨을 시근덕거렸다.

“사실대로 말하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이게 무슨 경우에도 없는 거짓말입니까?”

민야라는 너무 충격을 받아서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멍하니 등만 어루만지는 것을 보면 아직 상황 파악이 덜된 것 같기도 했다. 황제가 흥미롭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거짓말이라니?”

“족장은 금기를 어기고 데이타스를 채집했습니다. 신의 저주가 내려와 데이타스가 파멸의 힘을 띠게 될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요.”

민야라의 동공이 한계까지 확장되었다. 그가 배신당했다는 걸 깨닫고 내게 손가락질했다.

“……너! 어떻게 네가……!”

그러게 날 왜 믿었니. 네 잘못된 결정으로 인해 죽은 사람이 몇 명인데 순순히 빠져나가게 놔둘 것 같았어?

나는 황제를 직시하며 한 글자 한 글자 씹어뱉듯 말했다.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부족민 중 일부를 꾀어 다분히 의도적으로 거래금을 빼돌렸습니다.”

“사실인가?”

황제가 확인차 민야라에게 물었다. 경멸 어린 표정은 이미 민야라의 유죄를 확정하고 형량을 가늠하고 있었다. 민야라는 그의 불행한 말로를 직감하고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혼란스럽게 떨리는 동공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민야라가 영원히 대답하지 못할 것 같아서 내가 대신 말했다.

“확실합니다. 증거도 있습니다.”

증오 어린 얼굴을 지나쳐 책상에 녹음기를 내려놓았다. 녹음기에는 수도로 오는 길 민야라가 멋모르고 떠들어 댄 내용이 담겨 있다.

황제가 조개 모양의 녹음기를 열자 치직거리는 소리가 짧게 울리곤 젠체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금기를 어겼냐고? 돈이 많을수록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난다. 몇 년만 더 계속하면 섬 하나를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황제가 녹음기를 닫고 민야라를 노려보았다. 민야라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바닥만 응시했다.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군.”

황제는 곧바로 밖에 서 있는 기사를 불러 민야라를 지하 감옥에 가두도록 명령했다. 민야라는 나를 지나쳐 가며 목덜미를 물어뜯을 듯이 으르렁거렸다.

양팔이 포박된 주제에 눈을 부라린다고 한들 하나도 무섭지 않아서 나는 그저 해맑게 웃어 주었다.

민야라는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며 바락바락 고함을 질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