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97/138)

<97화>

민야라는 적의를 지우고 사람 좋게 웃었다. 뒤에 서 있던 부족민들도 그를 따라 깔깔거렸다. 마치 웃음 버튼이 눌린 것처럼 자동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나는 그 작위적 행동에 소름을 느끼는 한편, 민야라가 생각보다 쉽게 경계심을 풀어서 안심했다. 제이든이 오지 않았다고 내가 소홀히 일할 거라 생각했다면 착각한 거야, 너.

족장이 내게 호의적으로 나온 덕분에 다행히도 만찬 분위기는 평화로웠다. 의외로 음식도 입맛에 잘 맞았고, 즉흥적으로 벌어진 춤판도 화기애애하기만 했다.

하지만 부족장 쿠카리에는 어쩐지 분위기에 잘 녹아들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민야라에게 불만이 있는 듯 만찬 내내 그를 노려보았다.

민야라가 자꾸 날 자리에 붙들어 놓는 바람에 어느새 해는 산등성이에 아슬아슬하게 걸렸다. 시간을 더 지체한다면 마을 한 바퀴를 둘러보지도 못할 것이다.

민야라의 뜻에 어울려 주는 것도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나는 술잔을 내려놓고 단호하게 말했다.

“밤이 오기 전에 마을 한 바퀴를 둘러보고 싶은데요.”

“내일 해도 되는 일을 꼭 지금 해서 산통을 깨뜨리는 건가?”

민야라는 빙긋 미소 지었지만 눈빛에는 슬금슬금 적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라, 얘 봐라?

나는 질세라 싱글싱글 웃었다.

“알다시피 이곳에 방문한 목적이 진상 규명을 위해서거든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진상 규명……. 알겠다.”

민야라는 내가 찬물을 끼얹기라도 한 것처럼 무섭게 눈을 희뜩였다. 조금 전까지 나랑 낄낄거린 사람 같지 않았다.

마을 안내는 쿠카리에가 해 주기로 했다. 그는 말없이 나를 이끌고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우리의 발자국마다 끈질긴 시선이 따라붙었다. 민야라가 미리 감시자들만 만찬에서 빼놓은 게 분명했다. 덕분에 내 신경은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더크스번은 듣도 보도 못한 지형을 갖고 있었다. 울창한 산림과 짙은 안개가 장벽처럼 마을을 감쌌고, 그 안에선 획일적인 오두막들이 띄엄띄엄 원을 그렸다. 그리고 그 원의 중심에 작은 동산이 있었다.

동산은 생전 처음 보는 나무로 가득했는데, 특히 복잡하게 얽힌 수많은 나뭇가지는 소름 끼칠 정도였다.

나는 동산 앞에 멈춰 서서 미로 같은 나뭇가지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구역질 나는 냄새가 공기처럼 마을을 떠돌고 있었지만 동산에 가까워지니 특히 더 심해졌다.

이상한 점은 이 불쾌감을 나 혼자만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왜지? 전에 레이가 말했듯 감이 좋다는 게 바로 이런 의미인가?

쿠카리에가 긴장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처음 들어 보는 목소리가 시냇물처럼 맑아서 내심 놀랐다.

“왜 그런가?”

흔들리는 동공이 저 안에서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시인했다. 나는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며 말했다.

“이 안에 들어가도 되나요?”

“그건…….”

갑자기 나타난 민야라가 쿠카리에의 어깨를 쥐어틀듯 잡으며 빙그레 웃었다.

“죄송하다. 오늘 조사는 여기까지 하는 게 좋다.”

쿠카리에는 고통을 참으려 입술을 질끈 물었다. 내가 여기서 거절이라도 하면 쿠카리에의 어깨에 멍이 생길 것 같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후퇴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봬요. 꼭.”

“쿠카리에, 혜라 님을 숙소로 안내해 드려라.”

쿠카리에는 반항적인 표정으로 민야라를 노려보고선 내 팔을 휙 끌었다. 민야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동산으로 들어갔다.

나는 민야라의 반응으로 말미암아 확신했다. 동산은 데이타스 약초의 서식지이고, 그 안에서 자연의 뜻을 거스르는 짓이 행해졌다는 것을.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혐오감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쿠카리에는 나를 빈 오두막으로 데려갔다. 이번 조사를 위해 새로 지어진 그곳은 기대 이상으로 깔끔하고 따뜻했다. 쿠카리에가 직접 만들었다는 이불도 무척 부드러워서 스트레스가 조금 풀렸다.

나는 소파에 주저앉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몸은 고단했는데 알아낸 건 별로 없어서 막막했다. 새벽에 몰래 나가기라도 해야 하나? 왠지 민야라가 동산 앞에 경비를 세워 둘 거 같은데.

“그럼 쉬다.”

쿠카리에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나는 너무 피곤해서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네. 내일 봬요.”

“……저기.”

“네?”

쿠카리에가 문지방을 넘으려다 말고 머뭇거렸다. 그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마침 누군가가 오두막을 지나가며 그에게 시선을 던지자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줄행랑을 치는 쿠카리에가 이해되지 않아서 눈을 찌푸렸다.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민야라를 생각하면 도대체 어떻게 쿠카리에가 부족장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둘이 부부 사이는 아닌 것 같던데. 흠, 설마 남매 사이인가? 그럼 둘 사이의 묘한 살기도 이해되는데.

“……에라이. 알 게 뭐람. 중요한 건 따로 있는데.”

잔뜩 지친 머리는 마땅한 대책을 떠올리지 못했다. 나는 일단 1시간만 눈 붙이기로 했다. 대충 씻고 누운 침대는 환상적이었다.

목 끝에 닿은 이불의 촉감이 구름 같아서 심신이 안정되었다. 나는 기지개를 펴다 베개 아래에서 이질적인 감촉을 느꼈다.

“뭐야.”

등불에 비추자 정갈한 필체로 쓰인 쪽지가 보였다.

「1시 정각에 동산 중심부로 온다. 모든 걸 말한다. 이 쪽지를 확인하면 바로 불태운다. 주의할 점, 아무에게도 외출을 들키지 마라. 감시가 삼엄하다.」

“허, 고민 해결했네.”

나는 모닥불에 쪽지를 던졌다. 낯선 필체였지만 본능적으로 주인을 알 수 있었다. 쿠카리에, 그 여자 한 명이라도 내 편이라서 다행이다.

***

긴장감은 쏟아지는 졸음도 단숨에 물리쳤다. 나는 동산에 가지고 갈 만한 무기를 선별하며 남은 시간을 보냈다.

내가 아직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은 내게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쪽지를 확인하고 바로 창문 밖을 살폈을 때 그 사실을 더욱 절실하게 느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마을에 내려앉았지만 내 오두막 주위만큼은 예외였다. 시야에 닿는 모든 창문에서 등불 빛이 아른거렸고, 똑같은 사람이 30분에 한 번씩 내 오두막을 지나갔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새로 지었다는 이 오두막은 감시하기 딱 좋은 위치에 있었다.

처음에는 도 넘은 경계에 숨이 턱턱 막혔는데 쪽지를 받고 나니 마음가짐이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 나에겐 숨겨진 조력자가 있다. 삼엄한 경비망을 뚫기만 한다면 내겐 푸짐한 상이 내려올 것이다.

“사람들 속이는 거? 그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나는 자정이 되자마자 모든 불을 끄고 자는 척을 했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자 지척에서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는 실눈을 떴다가 목격한 광경을 보고 혀를 질끈 깨물었다. 볼이 홀쭉하게 패인 남자가 창문에 얼굴을 딱 붙인 채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왜 커튼이 없을까 생각했었는데 관음을 위해서였나 보다.

그는 한참 동안 내 잠든 모습을 지켜봤다. 시체처럼 차가운 낯빛이 흰 소복까지 입고 있으니 이승을 떠돌아다니는 혼령과 다름없었다.

나는 혹여나 남자가 오두막 안으로 들어올까 봐 이불 안에 숨겨 둔 스크롤을 꽉 쥐었다.

……다 괜찮을 거라고,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생리적인 반응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추위 한복판에 내던져진 것처럼 몸을 덜덜 떨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내가 정말로 잠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만족한 얼굴로 돌아갔다. 방바닥에 언뜻 비치는 희미한 빛도 차츰 하나씩 줄어들었다.

“미친놈들 소굴에 제 발로 기어들어 오다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필코 완벽한 조사를 하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그리고 그 공로로 엄청난 걸 요구해야지. 솔직히 이런 수모까지 겪었는데 대충 돈주머니만 주진 않을 거다. 만약 그런다면…….

“황궁을 폭파시켜 버려야지.”

나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미리 준비해 놓은 호신용 무기와 외투를 챙겼다. 혼령 같은 남자가 다시 되돌아올 경우를 대비해서 가져온 여벌 옷과 베개로 가짜 강혜라를 만들어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흠, 이 정도면 속아 넘어가겠지.”

내가 만들었지만 완벽했다. 뒷모습만 보면 내가 옆으로 누워서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창문이나 문으로 대놓고 나가는 건 주목해 달라고 광고하는 거나 다름없다. 나는 주방에 작게 난 창문으로 나가기로 했다. 천운이 도와 몸을 구겨 넣으면 가까스로 통과할 수 있는 사이즈였다.

나는 에단이 챙겨 준 20분 투명 물약을 마시고 혼신의 힘을 다해 창문을 통과했다.

이렇게 마법 물품이 도움 될 줄 알았다면, 비밀 서약 따위 다 무시하고 에단을 데리고 올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수수께끼 광신도는 민야라가 수상쩍게 굴수록 더욱 희열했을 텐데.

한밤의 더스크번은 빙하 속을 걷는 것처럼 추웠다. 갑작스럽게 부는 눈바람이 거세서 눈 뜨는 것도 힘들었다. 그래도 덕분에 발소리가 가려져서 마음 놓고 뛰어갈 수 있었다.

나는 하얀 소복의 무리를 불시에 마주치고 흠칫 몸을 굳혔다. 그들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나를 쌩 지나쳐 갔다. 얇은 소복 하나만 입고도 추운 기색 하나 내보이지 않는 게 사람 같지 않아서 꺼림칙했다.

귀신같은 몰골을 보고 고함을 지를 뻔한 게 다섯 번을 넘어가서야 동산 입구에 도착했다. 끈적이 그물 총을 쏘고 달아나야 할 일이 벌어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입구에는 경비가 서 있었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당당하게 동산에 들어갔다. 지나가며 메롱을 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무에 가려질 만큼 충분히 들어오자 서서히 마법이 풀리기 시작했다. 나는 주의 깊게 주위를 둘러보며 인기척이 느껴지나 살폈다. 들리는 건 바람 소리밖에 없었지만 직감은 안심해도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오케이. 웬일로 신이 날 돕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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