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138)

<95화>

로벤스가 평정을 되찾고 사태를 수습하려 애썼다.

“……지나친 추측이군요. 이건 단지 취미 활동이에요.”

로벤스가 나한테 어마어마한 약점을 잡힌 이상 나는 그에게 과도한 격식을 갖출 필요 없었다. 조만간 벨라한테 선물 한 보따리 보내야겠군.

나는 비죽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아, 그래요? 그럼 정말 그런지 영애의 수첩을 확인해 볼까요?”

나는 돗자리 위에 널브러진 여러 수첩을 눈짓했다. 높은 확률로 저기 어딘가엔 기사 초안이 적혀 있을 테다.

로벤스는 입술을 잘근잘근 질겅이면서도 섣불리 반박하지 못했다. 지금 이 자리에 그의 시녀나 기사가 없는 게 다행이었다. 로벤스가 두려움에 손을 벌벌 떨면서 간신히 말했다.

“내 정체를 폭로할 건가요?”

“음……. 아니요.”

로벤스한테 안 까여 본 귀족은 없다. 만약 그의 정체가 드러나면 그는 쥐도 새도 모르게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알다시피 그의 문체가 필요 이상으로 과격하고 신랄해서 이 갈고 있는 사람이 한 트럭이걸랑.

살인에 동조하는 건 영 내키지 않았지만, 내 뒷담화를 하는 걸 목격했는데 그냥 보내 주는 것도 별로였다. 펜으로 사람 한 명 죽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지.

나는 그가 동아줄처럼 쥐고 있는 수첩과 쓰다 만 글을 빼앗았다. 로벤스가 나를 죽어라 노려보았다.

“이렇게 하죠. 내가 영애에게 바라는 건 두 가지예요. 이것만 지켜 준다면 죽을 때까지 혼자만 알고 있을게요. 어때요, 한번 들어 볼래요?”

선택지 없는 로벤스가 참담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쉴 새 없이 펜을 움직였을 땐 세상 그렇게 발랄하더니.

“첫 번째, 앞으로 저와 아로네 이야기로 기사 쓰지 말아요.”

“……좋아요. 두 번째는 뭐죠?”

“로벤스 영애가 말로만 알았다고 하고 나중에 날 사회적으로 매장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니 만약 그러면 제가 진 싸움이죠. 그러니까 수첩은 안전장치로 가져갈게요.”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죠?”

아직도 상황 파악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로벤스가 귀찮았다. 나는 같잖다는 듯 실소했다.

“안 믿겨도 믿어야죠. 안 그러면 목이 잘릴 텐데.”

로벤스가 빠득 이를 갈았다.

“……알겠어요, 알겠다고요.”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나는 사르르 눈웃음을 지어 보이곤 그대로 뒤돌아 레이에게 뛰어갔다.

야호! 사회악을 처단했다! 내가 너무 신나서 팔을 활짝 벌리자 레이가 머리 위에 물음표를 가득 달면서도 달려드는 나를 안정적으로 받았다.

출장 가기 전에 힐링도 제대로 하고 거슬리던 상대의 약점도 잡다니.

다시 한번 말하건대 정말 완벽한 하루였다.

《제8장: 사람들은 만용이라 말하지. 난 그걸 간절함이라 불러》

JMT공금

나와 에단이 기다리고, 그 외 모든 사람들이 걱정했던 출장이 목전에 다가왔다.

이른 새벽, 나는 터질 듯 솟아오른 배낭을 메고 숙소를 나왔다.

배낭에 경량 마법이 걸려 있어서 다행이지, 만약 안 그랬다면 내 척추는 세 발자국 만에 반으로 뚝 부러졌을 것이다.

더스크번에 고작 이틀 머무른다는 걸 생각하면 짐이 상당했다. 이게 다 날 너무 좋아하는 지인들 탓이다.

에단은 경험담을 자세하게 풀어 달라는 뇌물로 개당 100골드를 호가하는 호신용 마법 도구를 보내 줬다. 아로네는 마법 상점의 스크롤 가판대를 싹 쓸어 상자째로 선물했고, 할리는 잘 아는 점성술사에게서 부적을 받아 왔다.

그리고 레이는 치명적 독이 깃든 단검을 선물해 준 것에 그치지 않고 날 배웅하기 위해 새벽부터 기숙사 앞에서 기다렸다. 그가 자연스럽게 배낭을 받아 메고 다정하게 물었다.

“잘 잤어?”

“나야 잘 잤지. 근데 넌 영 안색이 별로다?”

맑고 부드러운 피부는 여전했지만 어쩐지 눈빛에 번뇌가 가득했다. 레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가 더스크번에 가는데 당연하지.”

“너무 걱정하지 마. 혼자도 아니고 제이든이랑 같이 가는데, 뭘.”

“그래서 더 걱정하는 거야.”

레이가 그것도 모르냐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세상에, 설마 질투하는 거야?

쓸데없는 걸로 고민하는 사람이 한심하기는커녕 이렇게 귀여울 수도 있다니.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껄껄 웃었다.

느리게 갔으면 하는 시간은 어찌나 빨리 가던지. 우리는 어느새 황태자 궁 앞에 도착했다. 레이는 헤어지기 싫어서 괜히 내 손가락을 가지고 장난쳤다.

오늘따라 유난히 치대네. 나는 타이르듯 레이를 불렀다.

“레이.”

“……알겠어.”

레이가 마지못해 배낭을 돌려주고 그래도 아쉽다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같았다. 나는 터프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이리 와. 작별의 포옹 한 번 하자.”

“이틀 동안 못 보니까 진하게 해 줘.”

헤어지기 싫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는 와중에도 요구 사항 하나는 참 똑 부러졌다. 레이가 내 목을 끌어안고 한참 동안 만족스러운 숨을 내쉬었다. 나는 비누 냄새를 맡으며 등에 두른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이제 정말 가야 할 시간이었다. 레이의 등을 톡톡 치자 그가 아쉬운 기색으로 눈을 맞췄다.

“별일 없길 바랄게.”

“그럼 이틀 뒤에 보자.”

나는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레이는 울상 지으면서도 마주 손을 흔들어 줬다. 일그러진 눈이 곧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아서 조금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어째, 이게 내 일인데…….

나는 배낭을 거의 바닥에 질질 끌다시피 하며 사무실로 향했다. 2층 계단을 오르려던 참에 익숙한 얼굴이 어깨를 두드렸다. 제이든의 호위 기사 로건이었다.

“어라? 왜 여기에 계세요?”

로건은 다소 급해 보였다. 매사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걸 생각하면 놀라운 표정이었다.

“간밤에 제이든 님이 고열에 시달리셨습니다.”

나는 순간 제이든이 아프다는 사실 그 자체에 놀라서 펄쩍 뛰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그 독종이 뭐? 고열에 시달려? 그게 가능해?

“세상에! 열은 좀 내렸나요?”

로건은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질렀다. 동시에 내 심장도 쿵 내려앉았다. 그러면 출장은 어떻게 되는 거야?

……오, 설마. 이제야 왜 로건이 날 찾아왔는지 알겠다.

“당장 제이든 님을 봐야겠군요.”

***

나는 입사하고 처음으로 제이든의 침실에 발을 들여놓았다. 눈이 돌아가도록 호화로운 침실이었지만 지금 그런 세세한 것에 신경 쓸 여유 따위 없었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침대 옆 의자에 주저앉았다.

가까이에서 보는 제이든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상태가 안 좋았다. 언제나 흐트러짐 없었던 사람이 지금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열에 들떠 눈도 제대로 못 떴다.

밉기만 했는데 이렇게 약해진 모습을 보니까 새삼 제이든이 나보다 세 살 어리다는 게 실감 났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속삭였다.

“제이든 님, 저예요. 보좌관 혜라요.”

제이든이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그걸 몰라?”

오케이. 죽음을 논할 정도로 아픈 건 아닌가 보군.

나는 내심 안도하며 피로에 절어있는 의원을 바라봤다. 얼핏 보면 그도 환자처럼 보였다.

“어디가 안 좋으신 거죠?”

의원이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말했다.

“단순한 독감이네. 하지만 그간 누적되었던 스트레스와 피로가 상당해 증세가 악화되었어.”

그럼 단순한 독감이 아니지 않나요? 나는 절망스럽게 얼굴을 감쌌다. 전처럼 치료 물약이 멀쩡했으면 독감 따위야 1초 만에 나았을 텐데…….

“출장은 어떡하죠?”

이번 일정도 겨우 잡은 거라 날짜를 미루는 건 불가능했다. 이 꼭두새벽에 제이든을 대체할 만한 귀족을 찾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래도 혼자 가겠어, 설마?

제이든이 손가락을 까닥이자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직사각형 금고를 들고 왔다. 윗면에 황실의 문양에 새겨져 있는 그것은 딱 봐도 기밀 서고에 보관할 수 없을 만큼 보안 등급이 높은 자료를 담고 있었다.

나는 망연히 금고를 받아 들었다. 손안에서 느껴지는 무게가 묵직했고, 내 눈가에는 점점 눈물이 차올랐다. 이럴 수가. 정말 나 혼자 가는 거야……?

제이든이 곧 세상을 하직할 사람처럼 요란하게 기침했다. 의원이 한달음에 달려와 제이든을 살피려 했지만 제이든은 됐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대신 그는 내게 가까이 오라는 제스처를 했다. 귓가를 가까이 가져다 대자 제이든이 간신히 정신 줄을 붙들고 명령을 내렸다.

“금고 안에 더스크번과 데이타스 약초에 대해 정리해 놓은 서류가 있어.”

“……금고는 어떻게 여는데요?”

제이든이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의 고갯짓을 따라가니 파헤쳐진 잠옷 앞섬 사이에서 로켓 목걸이가 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목걸이를 풀고 바지 앞주머니에 넣었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테지.”

제이든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의원이 안절부절못하며 몸을 들썩거렸다. 제이든이 한참 입술을 달싹거리다 무기력하게 눈을 감았다.

“잘 해내리라 믿는다.”

정말 죽을 때가 다 됐나? 아니면 그사이에 제이든한테 감기가 옮아서 환청을 들은 건가?

“방금 저한테 뭐라고…….”

제이든은 한계에 다다라서 인상을 썼다. 의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로건이 내게 눈짓했다. 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침실을 나왔다. 처음으로 제이든한테 인정받아서 기쁘긴 했지만, 그게 하필 오늘이라서 슬펐다.

***

나는 어디 끌려가는 사람처럼 창밖을 바라봤다. 나 혼자 더스크번에 가는 상황이 악몽 같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넋을 놓고 있었는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먼지만 날리던 광장이 활기를 띠고 북적북적했다. 반면 마차 안은 내가 내뿜은 우울함으로 곧 장마가 내릴 것 같았다.

“애들 반응이 어떨지 무서워서 상상도 못 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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