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그래서 제이든 님이 어쨌다고요?”
덩달아 벨라도 진지해져서 천천히 목격담을 풀었다. 이토록 긴장되면서도 흥분되는 순간은 수능 이후로 처음이었다.
“자꾸 쓸데없이 나한테 친한 척을 하더라. 사전에 협의한 것 이상으로 말을 붙이고 미소를 보내고. 마치 누구 보라는 듯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 설마! 말도 안 돼!”
벨라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설명을 요구하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우수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생각하는 그거, 맞아요.”
“어쩐지! 그래서 황태자가 직원 내버려 두고 굳이 공녀한테 이것저것 물어보고 시키고 그랬던 거구나. 나는 또 어디 아픈 줄 알았지.”
벨라가 이제야 이해가 된다며 중얼거렸다. 나는 아로네가 얼마나 당황스럽고 짜증 났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무신경한 아로네를 보고 제이든이 했을 생각을 짐작했다. 그가 바라는 결말이 뭐든 간에 쉽지 않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로네 반응은 어땠어요?”
“뭐든 간에 황태자가 기대하던 반응은 절대 아니었어. 덕분에 의상점을 나올 때 황태자 표정이 말도 아니었지. 뭐랄까…… 신경 써서 멋진 옷 입고 나왔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서 모든 게 엉망이 된 표정이었어.”
그것참 쓸 데 있게 자세한 묘사였다. 나는 한 글자도 빠트리지 않고 벨라의 말을 모두 받아 적었다. 수첩이 워낙 작아서 몇 문장 적었다고 벌써 절반을 써 버렸다.
나는 뻐근한 손목을 살살 돌리며 벨라를 비장하게 쳐다봤다. 자칭 눈치 빠른 벨라는 한 번에 내 뜻을 알아챘다.
“책도 간식도 따뜻한 차도 모두 준비됐어.”
“그럼…… 시작해 볼까요?”
우리는 하이파이브를 짝 치고 놀라운 속도로 각자의 소설에 빠져들었다. 지레 걱정했던 게 우스울 정도로 평화로운 밤이었다.
***
재수 옴 붙은 날이 있는가 하면 뭘 해도 잘되는 날이 있다. 따지자면 오늘은 후자에 속했다.
요 며칠 쌀쌀하던 기온이 조금 올라서 외투를 꺼내지 않아도 됐고, 정오의 레스토랑은 나와 레이가 1000번째 손님이라며 고급 와인과 무료 식사권을 선물했다. 오랜만에 다시 온 라크리마 호수가 전과 달리 한산했다는 점도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가을의 호수는 당연한 말이지만 봄의 풍경과 달랐다. 지난봄, 아로네와 함께 봤던 풍경은 요정이 뛰어다닐 것 같은 생기를 품고 있었다. 들판을 가득 채운 사람들도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개화의 계절을 즐겼었다.
그러나 지금 붉게 물든 잎사귀는 곧 휘몰아칠 겨울바람을 암시했다. 낙화의 징조가 아쉬워서 아련했고, 소복이 쌓일 눈이 기다려져서 애틋해졌다.
나는 돗자리에 편하게 드러누웠다.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쏟아지는 햇살에 눈을 찡그리자 레이가 손수 차양을 만들어 줬다. 그가 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며 말했다.
“무릎에 누워도 되는데.”
“너 정말 시도 때도 없구나.”
“그래서 싫어?”
싫을 리가 있나. 나는 대답 대신 레이의 팔을 쑥 잡아당겨 나와 마주 보고 눕도록 했다. 동그랗게 커진 눈이 장난스럽게 웃는 내 얼굴을 담고 덩달아 미소 지었다. 언제나 그랬듯 심장에 해로운 미모였다.
나는 홍조를 숨기려고 아무렇게나 머리를 헝클였다. 레이는 그저 내 얼굴을 잘 볼 수 없어서 아쉬운 기색이었다. 나는 그의 주의를 다른 데 돌리려고 순간 떠오른 생각을 옳다구나 하며 말했다.
“우리 밸런스 게임하자.”
“그게 뭐야?”
“둘 중 하나 고르면 돼. 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랑 미래로 갈 수 있는 능력.”
“너는 어느 쪽인데?”
“글쎄…….”
사실 어느 능력이든 상관없었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아무 걱정 없이 부모님과 수다 떨던 먼 옛날을 기억에 새기고 싶었다. 그래. 모든 게 안전하고 평화롭다 믿었던 그때가 조금 많이 그리웠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거. 넌 뭘 고를래?”
“난 미래로 갈래.”
“왜?”
레이가 도저히 못 참고 내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가 다정하게 말했다.
“과거에는 희망이 없는데 미래에는 있거든.”
내 착각일까? 레이가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마치 ‘네가 내 희망이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참. 저 꿀 떨어지는 눈빛 때문에 별생각을 다 하네.
“그럼 이번엔 클래식한 걸로. 우정 아니면 사랑?”
레이는 고민도 안 하고 말했다.
“이미 답을 알고 있지 않아?”
곱게 접힌 눈가에 장난기가 듬뿍 배어 있었다. 그가 코를 찡긋거리며 말했다.
“사랑이라는 말이야. 너는 뭐야?”
“무조건 우정.”
“그럴 줄 알았어. 그럼 이번에 내가 물어볼게.”
“그래.”
레이는 눈을 내리깔고 진지하게 고심했다. 문제 생각하는 데 얼마나 집중했냐면, 내가 코앞에서 괴상한 표정을 지어 대는데도 모를 정도였다.
정말 대단한 걸 물어보려나 보군. 나는 유리알처럼 반짝이는 녹안이 날 바라볼 때까지 간간이 깜박이는 눈꺼풀을 바라봤다. 얼굴이 재미있으니까 기다리는 시간도 재미있었다.
잠시 후, 레이가 약간 긴장한 기색으로 물었다.
“준비됐어?”
“당연하지.”
“어느 날 네 애인의 비밀을 알게 된 상황이야. 범죄자였다는 비밀과 신분을 속였다는 비밀 중 어떤 게 더 최악이야?”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데?”
레이가 조금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살인죄. 근데 진짜로 사람을 죽인 건 아니고 누명 쓴 거야. 하지만 그걸 증명할 수단은 없어.”
오래 고민하더니 디테일이 상당했다. 은근히 이 밸런스 게임이 재미 들렸나 봐?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둘 다 상관없는데.”
“……상관없다고?”
레이는 내 대답이 이해되지 않는지 눈가를 찡그렸다.
“응. 내 애인 자리를 꿰찼을 정도면 걔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얘긴데 그런 애가 정말로 범죄를 저질렀을 리 없어. 신분 속인 것쯤이야 변명 한 번 들어 보지 뭐.”
게다가 나도 따지자면 신분을 속이고 있는데 누가 누구한테 화를 내겠는가.
“상관없다는 말이지…….”
레이가 멍하니 중얼거리다 피식 웃었다. 나는 허파에 구멍 뚫린 사람처럼 하하 웃는 그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세상에, 점심에 마신 와인 취기가 이제 올라온 건가?
***
내 인생이 누군가의 펜촉에 의해 쓰인 것이라면 분명 작가는 내게 완벽한 하루를 선물해 주려 했을 테다. 청명한 하늘과 딱 적당한 온도 속에서 우리는 밸런스 게임을 지나 각자가 바라는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레이는 내가 아무 생각 없이 툭툭 내뱉는 말들을 진지하게 들었다. 세계 일주를 하고 싶다는 말에 레이는 좋은 생각이라며 환히 웃었다. 그러고선 같이 가자며 은근슬쩍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레이가 내 말을 성의껏 경청해 줘서 나는 무척 들떠 있었다. 굴러가는 낙엽만 가리켜도 하하 웃어 주는 사람은 최고의 대화 상대였다. 나는 민트 초코아이스크림이 얼마나 환상적인지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잘 들어, 레이. 세상은 민트 초코를 좋아하는 사람과 안 좋아하는 사람들로 나뉘어. 전자는 뭘 좀 아는 사람들이고 후자는 그냥 사람이야. 자, 너는 어느 쪽이지?”
레이는 뜬금없는 말에도 신중하게 답했다.
“당연히 전자지.”
나는 진심으로 안타까워서 무릎을 탁 쳤다.
“이런! 경쟁자가 한 명 더 늘었군!”
“……다시 생각해 보니까 그냥 사람인 것 같다.”
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레이가 당황해서 눈알을 굴렸다.
“방금 내 친구 레이가 그냥 사람이 되겠다고 말한 거야? 정말로?”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레이가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냐며 울상 지었다. 역시 놀리기 좋은 타입이었다.
나는 깔깔 웃으며 바로 앉았다. 레이가 밉지 않게 나를 흘기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혜라, 있잖아.”
“응?”
“내일 더스크번에 가는 거 말인데…….”
이게 무슨 일이지? 여태껏 레이에게 집중했던 탓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 갑자기 시야에 걸렸다. 신이 둔감한 나를 위해 친히 그 사람한테 형광펜을 칠해 준 것 같았다.
“미안한데, 잠깐만.”
나는 레이의 어깨를 달래듯 툭툭 쓰다듬곤 처음 존재를 인지한 순간부터 애타게 보고 싶었던 인물에게 다가갔다. 긁지 않은 복권을 우연히 잡았다는 희열에 심장이 콩닥거렸다.
그 여자는 점점 가까워지는 날 보고 얼굴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그의 손에 양피지가 형편없이 구겨졌다. 나는 여자 쪽으로 상체를 숙이고 해맑게 웃었다.
“처음 뵙네요, 로벤스 영애. 제 소개는 굳이 안 해도 익히 알고 계실 테죠?”
나는 로벤스가 구긴 양피지를 내려다봤다. 양피지 한 면을 빼곡히 메운 글을 모두 읽지 않아도 결코 긍정적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상단에 박제하듯 크게 써 놓은 가제를 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테다.
“세 번째 특집, 평민 출신 여성 보좌관의 난잡한 사생활? 우와! 제 얘길 쓰고 계셨나 봐요?”
로벤스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보였다. 나는 걱정 말라는 듯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가 뜨문뜨문 문장을 잇고자 노력했다.
“그러니까…… 나는……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
나는 로벤스와 눈높이를 맞추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뭘 생각하고 있는데요? 아, 로벤스 영애가 《귀족의 모든 것》의 기자이자 사장이라는 거?”
나는 싱글벙글 웃었다. 로벤스가 나와 아로네에 대해서 어떻게 썼는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는 특히 평민인 나를 신명 나게 까 댔다.
첫 번째 특집에선 경이로운 승진 속도를 의심했고, 두 번째 특집에선 미래 제국을 이끌어갈 주축 세 명과 친밀해 보인다며 주제를 모르는 것 같다고 매도했다.
덕분에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천하의 여우 혹은 낙하산 보듯 바라봤었지. 뭐, 처음에는 낙하산이긴 했지. 그런데 지금은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