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3/138)

<93화>

……아, 정말로 쟤는 사람 마음 뒤흔드는 데 뭐 있다. 호감을 사기 위해 의도적으로 헌신을 꾸며 낸 게 아니라는 걸 너무 잘 알아서 더 미칠 것 같았다.

나는 레이의 시선을 피하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붉어진 뺨이 노을에 물든 것처럼 보이기 바랄 뿐이었다.

***

나는 오늘 하루 종일 제이든의 눈치를 살폈다.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제이든 눈치 볼 일이 참 많았는데 그중 오늘이 제일이었다.

나는 한시도 긴장의 끈을 느슨히 하지 않고 최적의 타이밍을 찾았다. 기필코 퇴근 전에 어제 한두 번째 데이트가 어땠는지 물어봐야 했다.

아로네한테 직접 물어봐도 됐지만 아무리 그 애가 제이든을 잊었다고 한들 제이든이 딴 애랑 노닥거리는 모습이 어땠냐고 자세하게 캐묻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고로 남는 건 제이든뿐.

그런데 말이다. 제이든은 내 음험한 속내를 꿰뚫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는 내가 기회를 포착하고 다가갈 때마다 말도 안 되는 심부름을 시키거나 새로운 업무를 줘서 손쉽게 내 입을 막았다.

권력으로 날 막으려 하다니. 나는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제이든은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굳게 다물린 입매가 절대 내 술수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젠장!”

철옹성 같은 제이든 때문에 결국 아무 수확 없이 퇴근하고 말았다. 이렇게 후회남 관찰 일지를 쓰겠다는 내 소소한 꿈은 허무해지는 것인가? 나는 우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감쌌다.

하다못해 에단이라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애한테 물어볼 텐데. 하필이면 그날 에단은 마탑에 틀어박혀 후계자 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아무래도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할 듯싶다.

“……어라, 잠깐만.”

나는 그동안 간과하고 있던 마지막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 사람은 잊고 살았던 게 이상할 정도로 강렬한 존재감을 갖고 있었다.

“그래! 벨라가 있었지…….”

아로네를 소개시켜 달라던 모습이 생각나서 갑자기 등골이 송연해졌다. 내가 신경 써야 할 사람은 제이든이 아니라 벨라였을지도…….

아예 생각 없는 사람은 아니니 적당히 체면은 지켰겠지만, 그때 벨라가 지었던 표정을 생각하면 제이든 몰래 집 주소를 적어 주지는 않았을까 걱정됐다.

“오케이. 벨라를 만나자.”

그렇게 생각하며 우편함을 여는데 소름 돋게도 벨라로부터 편지 한 통이 와 있었다. 나는 닭살 돋은 팔을 쓱 문지르며 그 자리에서 봉투를 뜯었다.

「아끼는 동생 혜라에게.

쓸데없기만 한 겉치레는 다 생략하고 본론만 말할게. 너도 알겠지만 어제 황태자와 두 번째 데이트를 했어. 덕분에 공녀의 얼굴을 원 없이 감상하고 근사한 옷도 선물로 왕창 받았지.

다시 한번 확실히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공녀가 정말로 남자만 좋아하는 거 맞아? 잠깐만, 너 지금 화내고 있을 거 같은데 너무 그러지 말고 내 말부터 들어 봐. 직접 만나 보니까 공녀가 너무 내 취향이라서 그래.

《귀족의 모든 것》은 매번 공녀를 희대의 악녀로 그려 내던데 그것도 다 순 엉터리였어. 어디까지 자극적일 수 있나 궁금해서 봤는데 이제 구독 취소하려고.

참, 공녀 때문에 편지 한 건 아니고 혹시 금요일에 시간 되니? 엄청난 신간이 나왔는데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나랑 뜨겁게 밤을 불태우는 건 어때? 하하, 물론 책 읽으면서 말이야.

당연히 네가 올 거라고 생각하고 주방장한테 성대하게 저녁 만찬 준비해 놓으라고 말해 둘게. 그럼 그때 보자.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예쁜 벨라가.」

나는 너무 당황해서 편지 귀퉁이에 도장처럼 찍힌 립스틱 자국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시금 느끼는 거지만 내 기준으로 벨라는 세계관 최강자였다. 날 이토록 충격으로 몰아넣은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야…….

“내가 알기 쉬운 건가, 아니면 벨라 안목이 탁월한 건가?”

내 감정과 선택을 정확히 예측한 벨라가 놀라웠다. 엄청난 신간이 나왔다고 하니 시간을 만들어 내서라도 당연히 갈 테지만 과연 무사히 벨라와 하룻밤을 보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아, 어감 진짜 이상하네.”

내가 쓰레기인 거야?

***

벨라가 자신했던 대로 저녁 만찬은 기립 박수가 절로 나올 만큼 훌륭했다. 공작가에서나 맛볼 수 있었던 푸짐함과 다양한 음식이란!

나는 벨라의 입꼬리가 귀에 걸리도록 찬사를 늘어놓았다. 벨라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끊임없이 음식을 덜어 줬다.

“맛있어? 그럼 이것도 먹어. 혜라, 여기 있는 거 다 네 거야.”

분에 넘치도록 고맙긴 했는데 디저트 먹을 때도 그래서 나중엔 살짝 긴가민가했다. 쟤가 지금 날 포동포동하게 살찌워서 잡아먹으려는 건가?

“……언니, 저 배불러요.”

“뭐라고! 아직도 볼이 홀쭉하잖아. 자, 푸딩 하나만 더 먹고 끝내자.”

나는 꾸역꾸역 푸딩을 한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벨라는 턱을 괴고 내가 푸딩을 꿀꺽 삼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집요하고 호감 서린 눈빛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진짜로 내가 벨라의 가장 아끼는 동생이 된 것 같았다. 몇 번 봤다고 이렇게나 좋아해 주는 걸까? 정말 오랜만에 연상한테 귀여움을 받는 거라서 괜히 머쓱했다.

배가 터지도록 먹고 난 뒤 벨라는 내 손을 잡고 개인 서재로 이끌었다. 방범 마법으로 굳게 잠긴 그곳은 주인만 열 수 있었다.

벨라가 주머니에서 열쇠 네 개를 꺼냈다. 열쇠 머리에 달린 잎사귀 개수가 각각 달랐다. 벨라는 잎사귀 개수 순서대로 불규칙적으로 나 있는 구멍에 열쇠를 꽂았다.

네잎클로버 모양의 열쇠까지 모두 꽂히자 문은 톱니바퀴 굴러가는 소리를 내며 옆으로 열렸다.

“멋진데요?”

“그치? 매번 열쇠 구멍이 바뀌어서 보안도 훌륭해. 자, 들어와.”

신난 벨라가 어깨동무를 하고 서재를 구경시켜 줬다.

생각 외로 장르를 불문한 책들이 서가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특히 경제서는 책등이 헐다 못해 곧 떨어질 것 같았다.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벨라를 바라봤다. 마냥 놀기만 하는 철부지 아가씨인 줄 알았는데 다 내 편견이었구나.

“여기 앉아 있어.”

벨라가 침대처럼 긴 소파를 가리켰다. 나는 편하게 자세를 고쳐 앉고 데이트가 어땠냐고 물어봐도 될지 고민했다.

벨라는 너저분한 책상을 한참 뒤져서 겨우 신간을 찾았다. 나는 벨라의 기대에 부응하여 첫 장을 펼치는 대신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근데요, 언니.”

“응, 왜?”

“어제 데이트할 때 어땠어요?”

“어땠긴? 완전 환상적이었지.”

벨라가 과거를 회상하며 허공을 몽롱하게 응시했다. 그 꾸준한 가벼움이 경이로워서 나는 일단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희대의 악녀는 무슨, 내 평생 공녀 같은 끝내주는 여자는 처음 봤다니까. 에이미 로벤스를 조금만 덜 믿었더라면 진작 공녀랑 친해졌을 텐데.”

왠지 익숙한 이름이었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건국 연회 전 머리가 빠져라 외웠던 가계도를 떠올렸다.

“로벤스 영애가 여기서 왜 나와요?”

“흠……. 궁금해?”

벨라가 저 말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딱히 아무 생각 없었는데 지금 그의 표정이 너무나도 의미심장해서 갑자기 답을 알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나는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벨라가 인심 쓴다는 듯 거만하게 웃었다.

“로벤스가 《귀족의 모든 것》의 기자이자 편집자이자 사장이야.”

“……헐? 아니 진짜로요?”

“그렇다니까.”

잠깐. 나는 불현듯 어떤 구절을 상기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아로네가 아카데미 다닐 때 같이 어울렸던 애들 중 한 명이 에이미 로벤스 아니었나? 세상에! 그래서 《귀족의 모든 것》이 유독 아로네한테 박했구나.

“근데 그걸 언니는 어떻게 알았어요?”

“말하자면 길어. 궁금해?”

벨라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을 보니 아까와 달리 순식간에 모든 욕구가 증발했다. 딱 봐도 깨끗한 스토리는 아니었다.

“갑자기 안 궁금해졌어요. 그거 말고 우리 제발 다른 이야기 해요. 의상점에서 제이든 님 어땠어요?”

나는 벨라를 간절하게 쳐다봤다. 벨라는 입맛을 다시더니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뭐 이상한 점 없었어요?”

벨라가 무언가를 생각해 내고 상체를 기울였다.

“확실히 이상했지. 마치 감사라도 나온 것 같은 태도였어.”

우리 둘밖에 없는데 왜 목소리를 낮추는 건지 모르겠다. 벨라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나도 모르게 같이 속삭였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공녀를 되게 의식하더라. 본인은 티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내 눈치가 워낙 빨라야지.”

벨라가 의기양양하게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나는 그의 잘난 체를 능숙하게 건너뛰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나는 주머니에서 조그만 수첩을 꺼냈다. 펜을 들고 눈을 반짝이자 벨라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지금 뭐 하는……?”

나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술술 내뱉었다.

“언니한테만 말해 주는 건데, 사실 비밀리에 제이든 님의 자서전을 집필하고 있어요. 기밀 서고에 보관될 만큼 아주 중요한 작업이에요. 근데 그중 계약 연애 이야기가 빠질 순 없잖아요.”

나는 미끼를 던졌고 벨라는 옳다구나 하며 미끼를 물었다. 월척이었다.

벨라가 화색을 띠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날 했던 대화까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모조리 기억해 낼 기세였다.

“그럼 내 얘기도 들어가는 거야?”

“그럼요.”

“잘 써 줄 거지?”

나는 능청스레 손사래를 쳤다. 하하, 이 언니도 참.

“우리 사이에 그런 걸 굳이 말해야 하나요?”

“제국에서 가장 멋지고 똑똑한 사람이라고 기록해 줘.”

“어휴, 당연하죠!”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깔깔거렸다. 벨라가 내 등을 팡팡 두드리며 나를 한껏 귀여워해 줬다. 나는 술 취한 사람처럼 어깨를 들썩이다가 웃음을 뚝 그치고 은근하게 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