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덕분에 이노피아 재개발이 시작된 이후로 사망자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당연히 고위층들은 그 통계를 쉬쉬했다. 내가 보좌관이 아니었다면 재개발의 이면을 평생 몰랐을 뻔했다.
세상에, 하마터면 로빈 같은 인재를 잃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뒷골이 당겼다.
그런 불상사는 주요 정책 결정자 중에 평민이 단 한 명만 있었더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나는 최대한 빨리 공적을 세워야겠다고 다시금 다짐했다.
개장식 이후에 주요 인사들을 위한 피로연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평소보다 일찍 업무를 마치고 이노피아로 향했다. 나는 개장식까지만 보고 퇴근할 생각에 들떠 속으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제이든은 밤늦게까지 능구렁이 귀족들을 상대할 생각에 벌써부터 머리가 아픈 것 같았다.
나는 제이든에게 얼마 전 입수한 포티오 사탕을 건넸다. 에단이 신상품이라고 몇 개 나눠 줬는데 효과가 꽤 좋았다.
제이든이 사탕을 떨떠름하게 내려다봤다.
“뭐야?”
“마탑이 새로 개발한 두통 완화 사탕이에요. 먹어 봤는데 효과 좋더라고요. 하나 드실래요?”
제이든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뭐가 문제지? 나는 저번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는 걸 기억해 냈다.
“에단이랑 따로 만나기도 하나 보군.”
“예? 그럴 리가요. 어쩌다 한 번씩 아로네 가게에서 보는 게 다예요.”
와우. 제이든은 방금보다도 더 심기가 불편해졌다. 이쯤 되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제이든 쟤, 아로네랑 에단이 나름 친하게 지내는 것 같아서 신경 쓰고 있었다. 자기가 왜 그걸 거슬려 하는지 깨닫진 못한 거 같지만 난 대충 알 것 같았다. 보나 마나 내가 가지긴 싫지만 그렇다고 남 주기는 싫은 심보겠지.
“그래서 사탕은 어떡하실 거예요? 제 팔 떨어지겠어요.”
“……필요 없으니까 저리 치워.”
제이든이 일부러 차갑게 대꾸하고 다시 신문에 집중했다. 하지만 난 제이든의 시선이 사탕에 미약한 아쉬움을 묻히고 지나가는 걸 보았지. 참나, 사탕 하나 먹으면 좀 어때? 그런다고 자존심이 깎여?
나는 사탕을 두 개나 입안에 털어 넣고 머리가 개운해지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화려한 미사어구에 영업당한 할리도 하나 먹고 극찬을 연발했다.
우리는 건치를 드러내며 상쾌하게 웃었다. 결국, 제이든은 참다못해 적당히 하라고 호통을 쳤다.
***
황궁 예산을 쏟아부었다고 하더니 새로 태어난 이노피아는 이전 세계의 유명 테마파크와 견줘도 전혀 모자라지 않을 만큼 호화로웠다. 오히려 마법이 더해진 이곳은 과학과 세월의 차이를 압도적으로 능가했다.
보는 순간 저절로 입이 벌어지는 거대한 신전 형태의 건물에서 제국 신화를 구현시키겠다는 포부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심지어 최초 신의 이름을 딴 건물은 공중 한가운데에 떠 있었다. 구름 양탄자를 사용해야만 닿을 수 있는 그곳은 오로지 높은 귀족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평민들은 그 안에 뭐가 있는지 영영 모르겠지? 세금이 어디서 나오는지 생각하면 다소 아이러니했다.
“최고 투자자가 누구라고 했지? 황금알 낳는 거위를 잡았네.”
할리가 슬쩍 다가와 물었다. 최고 투자자의 얼굴을 생각하자니 배알이 꼴려서 말투가 곱게 나가지 않았다.
“님프 공작.”
건설 초기 단계까지만 해도 제국 신화를 건드리는 건 리스크가 클 거란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역시나 많은 귀족들이 투자를 꺼렸다.
하지만 어느 날, 마냥 무관심해 보이던 공작이 어마어마한 투자금을 보내자 그 뒤로 몇몇의 귀족들이 공작의 안목을 믿고 조금씩 여유 자금을 운용했다.
결과적으로 공작이 옳았다. 그런데 그 선구안을 가진 사람이 도대체 아로네한텐 왜 그랬을까?
나는 개장식 가장 앞줄에 앉아 있는 공작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아마 그 질문의 답은 평생 미지로 남을 것이다. 내 의지로 공작을 찾아가는 일을 결코 없을 테니까.
제이든이 공작 옆에 앉자마자 개장식은 시작되었다. 나는 제이든 바로 뒤에 앉아 왜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지 않는지 고민했다. 분명 에단과 아로네도 주요 투자자에 속해서 오늘 참석할 텐데? 가게에 무슨 일이 있나?
은근슬쩍 주위를 둘러보는 사이 사회자가 연단 앞에 섰다. 할리가 쿡 옆구리를 찔렀고, 나는 아쉬워하며 정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제이든 오른쪽의 빈 두 자리가 자꾸 시야에 걸렸다.
여느 개장식이 그렇듯 지루한 연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30분 동안 건설 과정을 듣고 있자니 하품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흘긋 옆을 보니 할리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손등을 세게 꼬집으며 졸음을 이겨 냈다.
그리고 마침내 개장식의 마지막 순서, 리본 커팅식이 다가왔다. 제이든은 사회자의 호명에 따라 연단으로 나가 금색 가위를 잡았다. 평민 사진사가 연단 바로 아래에 무릎을 꿇고 기억 구현기의 구도를 맞췄다.
나는 꺼림칙한 기분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무릎을 꿇은 사진사와 연단 위 제이든, 배경처럼 존재하는 공중 신전. 절묘한 구도였다.
“썩 기분이 좋진 않네…….”
“뭐가?”
할리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충 얼버무리고 제이든이 비즈니스용 미소를 짓는 것을 지켜봤다. 사회자는 감정이 복받쳤는지 물기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로써 구 이노피아, 현 유토피아의 막이 올랐습니다!”
싹둑, 가위질 한 번에 리본은 덧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요란스러운 폭죽이 터지고 사진사는 정신없이 여기저기를 찍어 댔으며 나는 오물 하나 없는 유토피아의 바닥을 응시했다.
“유토피아라……. 이름 한 번 기깔 나네.”
***
축하 피로연은 모헤나 여신의 신전에서 할 예정이라 했다. 무도회와 연회를 위해 만들어진 그곳만큼 적절한 파티 장소는 없을 것이다.
신전을 구경하고 싶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평민이었기에 초대받지 못했다.
이제 와서 서운하진 않았다. 다만 조금 아쉬웠을 뿐. 그래도 퇴근하고 친구들이랑 술을 마실 생각에 기뻤다.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제이든 님, 저희는 이만 퇴근해 볼게요.”
“그래.”
제이든이 담백하게 대꾸하고 신전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몇 걸음 못 가고 다시 되돌아왔다. 그가 문 너머로 사라지길 오매불망 기다렸던 나는 다소 김빠진 채로 말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제이든은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머뭇거림에서 그가 본인이 생각하기에 쓸데없는 질문을 하리라는 걸 눈치챘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이제 제이든의 속마음을 읽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제이든이 평범한 질문을 하듯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공녀도 참석자 명단에 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새삼 제이든이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신기했다. 처음 보좌관이 됐을 때까지만 해도 제이든한테 아로네는 그저 성가신 존재에 불과했는데.
“그러니까요. 오늘 오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무슨 일이 있는……. 제이든 님?”
제이든이 내 말을 집중해서 듣다가 별안간 주의를 잃고 내 등 뒤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사람이 말을 하면 눈을 쳐다봐야지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제이든은 대꾸도 않고 넋 나간 채로 한 곳만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 눈길에는 얼핏 충격이 서려 있었다.
나는 어떤 놀라운 광경을 봤길래 저런 표정을 짓나 싶어서 고개를 돌렸다.
“와우…….”
주인공은 마지막에 나타난다 이거지?
눈이 마주친 아로네가 미소를 보냈다. 나는 아직도 내가 보고 있는 게 믿기지 않아서 아로네에게 다가갔다. 내 의문을 해결하는 데 급급해서 이 순간 벙 찐 제이든은 안중에도 없었다.
“세상에, 에단이랑 같이 오다니! 설마 협박당한 건 아니지?”
“야, 나랑 같이 온 게 뭐가 어때서?”
에단이 발끈해서 투덜거렸다. 나는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느냐는 의미를 담아 에단을 쳐다봤다. 나를 제외한 수많은 사람들이 경악하여 이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니, 너희 둘만 개장식에 불참하더니 피로연에 함께 나타…….”
나는 등 뒤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배턴 터치하듯 감미로운 미성이 말했다.
“둘이 함께 오다니 의외군.”
누가 들어도 비꼬는 어투였다. 제이든이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아서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지금 제이든은 이 상황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로네는 당황하지 않고 여유롭게 받아쳤다.
“친우끼리 오는 게 뭐가 의외인가요?”
“최근 공녀의 상황을 고려하면 자중하는 게 맞지 않았나 싶어서.”
에단이 끼어드려는 기색이길래 나는 아무도 몰래 그의 발을 지그시 밟았다. 에단이 눈을 부라리며 내게 ‘미쳤어?’라고 물었다. 와중에도 아로네는 여유로운 태도로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글쎄요. 금세 다른 사랑을 찾으신 전하가 하실 말은 아닌 것 같네요.”
아, 마음 같아선 아로네에게 합격 목걸이를 걸어 주고 싶었다. 봐라, 저 정곡을 찌르는 한마디를!
에단은 그 멘트가 마음에 들었는지 짧게 휘파람을 풀었다. 하지만 그 아무 의도 없고 욕구에 충실했던 행동이 어떤 형태로든 제이든을 자극했다. 제이든은 에단을 살벌하게 쏘아보다가 휙 뒤돌아 신전 안으로 사라졌다.
“왜 저래?”
에단이 비웃듯 말했다. 나는 모르겠다며 고개를 흔들었지만, 사실은 스치듯 보았다. 제이든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가리려 세게 주먹을 말아 쥔 것을.
나는 손꼽아 기다려 온 일이 첫 장에 들어섰다는 걸 예감했다.
***
유토피아 개장식 이후로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제이든이 아로네를 볼 때 느꼈던 불편함의 실마리를 잡아채고, 마침내 명쾌한 정의를 내리기까지 충분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