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0/138)

<90화>

“……하지만 혜라, 네 능력은 굳이 더스크번이 아니…….”

안타깝게도 아로네의 말은 불청객의 의해 가로채졌다. 사실 내가 올 때부터 있던 사람이었지만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이제는 많이 하찮아진 에단이 말했다.

“너 제정신이 아니구나. 더스크번에 갈 일이 살면서 또 있겠어? 황금 같은 기회를 왜 버리라고 그래?”

에단이 내 편을 들어줘서 고맙긴 한데, 내 편을 들어준 사람이 에단이라서 문제였다. 친구야, 그렇게 들뜬 기색으로 말하면 아로네가 퍽도 마음을 바꾸겠다.

정신을 못 차리는 에단이 광기에 찬 눈빛을 띠었다. 어후, 쟤 또 저런다. 나는 질색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로네는 보기도 싫다는 듯 아예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할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가고 싶다. 야, 나도 따라가면 안 돼? 투명 마법 쓰면 안 들킬 텐데.”

“미친 마법사야, 그게 되겠어?”

에단이 부러 유혹적인 표정을 지었다. 나는 보란 듯이 코웃음을 쳤다. 제국에서 가장 잘생긴 사람이랑 매일 저녁을 먹는데 그 미인계가 통하겠어?

“꿈 깨셔. 하여간 수수께끼라면 사족을 못 써.”

“……진짜 안 돼?”

에단이 아직도 미인계를 포기하지 못하고 눈을 반짝였다. 노력은 가상했지만 미행을 허락해 주는 건 범죄나 다름없었고, 내 행실은 언제나 완전무결해야 했다. 나는 단호하게 팔로 엑스 자를 그렸다.

“절대 안 돼.”

“마법 상점을 평생 무료로 이용하게 해 줄게. 가격 제한 없이.”

이놈 봐라, 제법인데? 나는 잠시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그래도 안 돼. 하지만…… 경험담 정도는 얘기해 줄게. 그게 내 최선이니까 그걸로 감지덕지해.”

에단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찼다. 어쭈, 내 앞에서 혀를 차? 내가 눈썹을 씰룩이자 에단이 잽싸게 대답했다.

“그럼 약속한 거다? 안 지키기만 해.”

나는 갑자기 다 귀찮아져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내가 넘어야 할 산은 아직 남아 있었다. 아로네가 살벌하게 웃었다.

“글쎄, 나랑은 아직 얘기 안 끝났잖아? 그 약속은 두고 봐야지.”

나는 에단과 잠깐 시선을 주고받았다. 흠, 2 대 1이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

나는 공무원이 된 이래로 처음으로 도서관에 방문했다. 소중한 일요일을 자료 조사하는 데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피눈물이 흐르다가도, 도서관 내부를 보니 감탄이 쏟아졌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탁 트인 홀이었다. 반질반질한 대리석 위에 놓인 고급 탁자와 의자,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싼 거대한 책장들. 공부라면 질색하는 나조차 당장 의자에 앉아 책을 펼치고 싶었다.

공간을 구분하는 기둥에는 월계수 장식이 달려 있었다. 저게 진짜일까 가자미눈으로 바라보다가 시선을 올리자 천장에 그려진 정교한 그림이 보였다. 척박한 대지에 생명을 불어넣는 여신은 제국 신화의 주인공이었다. 덕분에 도서관에선 신화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도서관 주제에 이렇게 아름답기야?

“가자. 기밀 서고는 4층에 있어.”

넋이 나간 나를 레이가 이끌었다. 마지막 주말을 즐기겠다며 나를 내팽개친 누구와 다르게 레이는 처음 가면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며 같이 나섰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내심 코웃음 쳤는데 직접 와 보니까 충분히 이해됐다. 황태자 궁만큼 넓은 이곳이라면 미아가 될지도.

종교 영역의 서가를 지나니 나선형 계단이 나타났다. 레이는 자주 와 본 모양인지 거침없이 4층으로 향했다.

기밀 서고는 4층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10년에 한 번 대출될까 말까 한 책들을 지나면 딱 봐도 수상쩍은 문이 나왔다.

“저 문으로 들어가면 돼. 그동안 난 저기 앉아서 기다릴게.”

레이가 구석에 있는 탁자를 눈짓했다. 1층 홀에 있던 것보다 훨씬 노후하고 불편해 보였다. 나는 인상을 썼다.

“다른 층에 더 좋은 의자 많잖아. 나 한참 뒤에 나올 텐데 좀 더 편한 곳에서 책 읽지 그래?”

기밀 서고의 문서는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없다. 아무리 내가 황태자의 신임을 받는 사람일지언정 이곳에서 다루는 서류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괜찮아. 여기서 기다리고 싶어.”

왜 저렇게까지 하지. 내가 비밀 서고 앞에서 습격을 당할 리도 없는데.

결국, 나는 한숨을 쉬었다.

“마음대로 해. 그럼 이따 보자.”

똑똑.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불유쾌한 감각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일순 가슴이 답답하고 목구멍이 간질간질했다. 부작용을 보니 금속 탐지 마법이 제대로 걸린 것 같았다.

기다란 탁자에 앉아 있는 여자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나는 제이든이 써 준 증명서를 그에게 건넸다. 여자가 장부에 무어라 적곤 사무적으로 말했다.

“데이타스 약초 관련 서류 요청한 거 맞으신가요?”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의자 끌리는 소리가 울리고 여자는 그대로 뒤를 돌아 새하얀 벽을 통과했다. 문도 창문도 흔한 포스터 한 장도 걸리지 않은, 말 그대로 밋밋한 벽을!

“……방금 뭘 본 거지?”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지만 벽은 여전히 평범해 보였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벽에 특수한 마법이 걸려 있을 거라는 추측이 들었다.

지정된 사람만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마법이라니. 과학을 와장창 깨부수는 세계에 사니까 이렇게 재미있는 일도 일어나네.

여자는 채 5분도 지나지 않아서 나타났다. 그가 내게 양피지 두루마리 하나를 쥐여 주곤 옆문을 가리켰다.

“저기로 나가면 독서실이 있어요. 충분히 읽고 돌려주시면 됩니다. 단, 읽기만 하셔야 해요. 필기나 사진 촬영 등의 행위는 엄격히 금지되고 있으니 유의하시고요.”

여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살벌하게 경고했다. 필기 한 줄이라도 했다간 손가락을 부러뜨릴 기세였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독서실은 고요했다. 나는 전세 낸 기분으로 카우치에 앉았다. 손목시계는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손안에 든 두루마리의 무게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좋아. 2시간 안에 끝낸다.”

두루마리의 끈을 풀자 양피지가 곧게 펴지며 점처럼 빼곡한 글씨가 보였다. 음, 생각보다 오래 걸리겠는데?

***

보고서 내용이 뇌에 각인될 때까지 읽고 또 읽다 보니 아슬아슬하게 6시를 넘기지 않을 수 있었다. 과장 보태서 거의 50번은 읽은 덕분에 난 이제 나름 데이타스 박사였다.

나는 허겁지겁 두루마리를 돌려주고 레이를 찾았다. 그는 기다리다 지쳤는지 엎드려 자고 있었다. 창밖의 노을빛이 그의 머리칼에 내려앉았다.

나는 레이를 깨우지 않으려고 신중하게 의자를 뺐다. 레이는 그토록 기다리던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새근새근 잘도 잤다. 규칙적인 숨소리를 듣자니 문득 나도 노곤해져서 레이를 마주 보고 엎드렸다.

가만히 레이의 눈꺼풀을 바라보다가 공연히 민망해져서 시선을 돌렸다. 마침 레이가 읽고 있던 책이 시야에 들어왔다.

무슨 책이지? 나는 제목을 보자마자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럼에도 입술 틈 사이로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짝사랑에 성공하는 100가지 방법》이라고?’

도대체 무슨 내용일지 짐작도 안 갔지만, 레이가 수많은 책들 가운데 굳이 저 책을 골랐다는 게 웃기고 귀여웠다. 나는 새삼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잠든 레이를 응시했다.

살짝 드러난 이마를 보니 한밤의 무도회가 떠올랐다. 긴 속눈썹은 상실을 위로하고 공감해 주던 남자를, 날카로운 콧대는 그를 귀신이라 착각했던 달밤을, 그리고 분홍색 입술은 고백하던 순간을 상기시켰다.

나는 충동적으로 레이의 콧방울을 툭 건드렸다. 레이의 미간이 일순 찡그려졌다가 펴졌다.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리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조금 더 욕심을 내서 천천히 그의 뺨을 감쌌다. 상상했던 대로 솜털처럼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이거 묘하게 중독되네.

나는 딱 5초만 더 이러고 있자고 멍하니 생각하다가 퍼뜩 놀랐다. 미쳤어? 5초는 무슨 5초?

나는 조금 아쉬워하며 손을 거두었고, 그 기막힌 타이밍에 레이가 눈을 떴다.

나는 너무 놀라서 괴성도 못 질렀다. 레이는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겨 주며 낮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졸음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눈동자에는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계속 모른 척하려다가 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궁금해서 눈 뜬 건데. 이렇게 놀랄 줄은 몰랐네.”

뭐야, 왜 저렇게 훅 들어와? 나는 2차 충격을 받고 눈만 깜박였다. 레이가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 말 별로야? 책에서는 효과 만점이라고 하던데.”

“……어후, 갑자기 배가 너무 고프네. 빨리 가자.”

나는 누가 봐도 어색한 몸짓으로 벌떡 일어나 삐걱삐걱 계단을 내려갔다. 등 뒤에서 청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자의식 과잉일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품기 시작한 호감을 그가 눈치챘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

오늘은 간만에 외부 일정이 있는 날이다. 여름 언젠가 제이든은 이노피아 재개발 제안서에 최종 승인을 내렸다.

나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이냐며 뒤에서 할리와 수군거렸지만, 어쨌든 재개발은 착착 진행되어 오늘 개장식을 앞두고 있었다.

할 말은 정말 많지만 그중에서 한마디만 하겠다. 이노피아에서 로빈을 먼저 빼놔서 다행이다.

만약 그때 로빈에게 돈을 부치지 않았더라면 지금 로빈과 그의 가족은 말 그대로 길거리에 나앉아 아사했을 것이다.

왜 그렇게 확신하느냐면 내가 그동안 들은 게 좀 있거든. 여기나 저기나 못 사는 사람들의 말로는 엇비슷하다.

거주민들은 쫓겨나고, 허름할지언정 그럼에도 보금자리였던 군락은 순식간에 허물어지며 그 위로 부자들을 위한 건물이 세워진다.

삶의 터전을 포기하는 대가? 애초에 이노피아에 사는 사람들은 패배자 혹은 인간쓰레기 정도로 낙인찍혔다. 황제는 결코 있으나 마나 한 인간들. 아니, 차라리 사라지면 속 편한 인간들에게 많은 돈을 쓰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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