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그게 죽음을 이겨 내는 네 방식이야?”
“응?”
“살아 있는 소중한 사람한테 더 잘해 주겠다는 거, 그게 네 방식이야? 난 내 부모님을 죽인 새끼가 밉고 또 미워서 현재를 직시할 여력이 안 되던데. 난 감정을 묻어 버리는 것 말고는 뭐 어떻게 할 수가 없겠더라. ……회피한 거야. 여전히.”
레이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그가 아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죽도록 미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소중한 사람이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화에 사로잡혔었어. 근데 누가 나한테 현재에 사는 법을 알려 줬거든.”
나는 답을 알 것 같으면서도 되물었다.
“그 사람이 누군데?”
레이가 멈춰 섰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스치며 익숙한 이름이 흘러나왔다.
“혜라, 너.”
“…….”
레이가 푸스스 웃었다.
“널 보다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 분노는 날 성장시키는 동시에 불행하게 하고, 희망은 날 살게 한다고.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지는 명백했지.”
“그럼 분노는? 그 강렬한 감정이 쉽게 없어져?”
“굳이 없앨 필요 없어. 회피하지도 않고, 압도되지도 않고, 그저 인정하면 돼. 난 여전히 그 일 때문에 화가 나고 억울해.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 때문에 현재의 희망을 놓칠 정도로 그 감정이 중요한 게 아니야. 정말 중요한 건 둘 사이의 균형을 잡고 우선순위를 두는 거지. 사실은 혜라 너도 이미 알고 있지 않아?”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고?
나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생각하지 않고 덮어 두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는데 레이의 말을 듣고 보니 아닌 것 같았다. 언제나 내가 옳다고 생각했는데 다 자만이었다.
……그래. 꼭 모든 시련과 감정을 이겨 내지 않아도 된다. 어떤 건 평생 안고 가야 할 숙제이기도 한 건데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감이 너무 컸던 모양이다.
부모님이 분노와 슬픔에 매몰된 내 삶을 지켜보고 있다면 그건 그분들에게 또 다른 죽음일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절대 사라지지 않을 감정을 차라리 부정했다. ……오판이었지. 사람이 어떻게 자기감정을 속이겠어.
나는 올곧은 시선을 다시 마주했다. 레이는 말없이 눈빛으로 나를 위로했다. 장황하게 말로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담겨 있는 위로였다. 무수한 것들을 잃은 사람만이 보낼 수 있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미안한데, 나 조금만 안아 줄래?”
레이는 숲의 초입에서처럼 숨이 막히도록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그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고 한참 동안 얕은 숨을 내쉬었다.
옅은 비누 향이 오랫동안 코끝에 감돌았다. 난 뿌리 깊은 강박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졌음을 느꼈다.
***
콧노래가 절로 나올 만큼 화창한 오후였다. 나는 할리와 자주 가는 산책로를 걷고 있는 중이었다. 여느 때처럼 가로수 길은 햇빛을 쬐러 나온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황궁에서 일한 지 한 분기쯤 지나니까 맨날 산책 나오는 사람들이 거기서 거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때문에 낯선 얼굴, 그것도 눈이 부시는 외모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의 시선은 한군데로 쏠렸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잘난 얼굴이 내게는 낯설지 않다는 점은 예외였다.
나는 그 요주의 인물이 나를 발견하기 전에 후다닥 튀려고 퇴로를 살폈다.
“야, 뛸 준비 됐어?”
할리가 의아해하며 돌아보았다.
“갑자기 웬 뛸 준비? 밥 먹고 바로 뛰면 배 아파.”
유감스럽게도 할리의 목소리는 유난히 컸다. 쥐 죽은 듯이 고요했던 몇 초 사이에 울려 퍼진 목소리는 요주의 인물의 관심을 이쪽으로 끌었다.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2시 방향을 눈짓했다. 할리는 아차 하며 탄식을 뱉었다.
“소공작님이 여긴 어쩐 일이시지……?”
“내 말이.”
참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며칠 전의 그날처럼 데네브와 눈이 마주쳤고, 그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곧바로 내게 다가왔다. 누가 보면 처음부터 날 찾아 산책로로 온 줄 알겠어.
코앞에 선 데네브는 왠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다는 직감이 들어서 할리를 먼저 보냈다. 나는 인적 드문 길을 가리켰다.
“좀 조용한 곳으로 갈까요?”
“바라던 바야.”
나무가 무성해지고 인기척이 잦아들다 못해 사위가 고요한 곳. 어느 봄날 우리가 마주쳤던 연못 앞에서 멈췄다. 사이좋게 앉아서 대화할 사이는 아닌 것 같아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날 신시아를 못 만났나 봐요?”
신시아가 어디 있는지 뻔히 아는 내가 이런 말을 하다니. 지금 심장이 뛰는 이유가 데네브를 기만한다는 행위에서 오는 고취감인지, 아니면 나로 인해 레이의 정체가 들킬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데네브는 다소 공격적으로 나왔다.
“꽤 확신하는 태도군. 내가 신시아를 못 찾을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나?”
“그럴 리가요. 다만 데네브 님이 절 찾을 이유가 신시아 말고 더 있겠어요?”
생각해 보니 진짜 그러네. 오랜만에 만나서 할 얘기가 떠나간 신시아밖에 없어? 나는 정말로 조금 서운해졌다가 곧바로 그런 나 자신에게 소름을 느꼈다. 세상에, 혜라야. 데네브한테 도대체 뭘 바라는 거야?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오신 거세요?”
“신시아가 목격된 곳에 네가 있었던 거, 설명할 수 있나?”
아 또 그 얘기야? 너무 뻔한 질문이라서 따분했다.
“그날은 운 좋게 빠져나갔지만 오늘은 똑바로 대답해야 할 거야.”
데네브는 혹여나 내가 또 도망갈까 봐 내 앞을 막아섰다. 데네브가 실패에서 깨달음을 얻은 덕분에 난 더 곤란해졌군. 아주 좋아.
“그거 진짜 우연이에요.”
“증명해 봐.”
사랑에 눈먼 남자는 저렇게 변하구나. 나는 억지를 부리는 데네브 때문에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힐긋 시계탑을 보니 점심시간이 20분이나 남아 있었다. 고로 최소 10분 동안은 그럴듯한 변명도 못 대고 데네브를 상대해 줘야 했다.
“데네브 님, 도대체 우연을 어떻게 증명해요? 그런 걸 할 수 있었으면 보좌관이 아니라 점쟁이를 했을 거예요.”
나는 억울해서 미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데네브는 평소와 달리 발끈하기는커녕 침묵을 지켰다.
연못은 쨍쨍한 햇빛을 받고 윤슬을 한가득 만들어 내는데 데네브 얼굴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낯설지 않은 어둠은 멀지 않은 과거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맙소사. 쟤 진짜 간절한가 봐.
“제 말 잘 들으세요.”
데네브가 미운 건 사실이지만, 저렇게 골골거리는 모습을 보니 아주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신시아가 사라진 게 내 탓은 아닌데 괜히 내 탓 같았다.
그래. 제대로 고백 한 번 못 해 봤는데 짝사랑 상대가 증발하듯 사라졌다? 나라도 미친 듯이 그 애를 찾아다녔을 것이다. 연적이었던 제이든과 에단이 제각각 다른 것에 눈을 돌린 지금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그건 의미 없는 숨바꼭질이다. 누군간 그에게 이제 그만 찾아도 된다고 말해 줘야 했다. 어휴, 레이가 못 하니 나라도 해야지.
“신시아가 데네브 님한테 정확한 목적지를 말해 준 적 있나요?”
“……아니.”
데네브가 절망에 찬 표정으로 대꾸했다. 나는 나름 누그러운 말투로 질문했다.
“앞으로 구체적으로 뭘 할 거다, 이런 거 말해 준 적 있나요?”
“아니.”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다시 만나자고 말한 적 있나요?”
“아니.”
물음표가 차곡차곡 쌓일수록 데네브는 더욱 고통스러워했지만 역설적으로 눈에는 총기가 돌기 시작했다.
“신시아는 우리 모두를 떠난 거예요. 그래서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은 거고요. 데네브 님, 앞으로 우린 그 앨 못 봐요. 아무리 전국을 뒤진다고 해도 영영. 이제 받아들이실 때 됐어요.”
“……네가 뭘 안다고 그렇게 쉽게 말해.”
상처받은 영혼이 가장 경멸하는 사람 앞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데네브는 몹시 분노한 것도 같았고, 한편으로는 조금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게요. 제가 뭘 안다고 이렇게 말하는지. 신시아가 정말로 우리를 떠났는지 아닌지는 그 애를 찾아 루디체까지 간 데네브 님이 더 잘 아시겠죠. 아무튼…… 전 이만 가 볼게요.”
나는 격려하듯 데네브의 팔을 툭 치고 뒤돌았다. 시계를 보니 건성건성 뛰어가면 점심시간 끝나기 전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까지도 데네브는 분노로 시작된 문장을 끝맺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왜냐면 데네브는 날 눈엣가시로 생각하면서도 내가 이런 걸로 거짓말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거든.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끝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 이번 기회에 데네브는 완전히 신시아를 정리할 수 있을 테다.
그러면 비로소 레이도 신시아의 망령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막 한 발자국 내딛는데 데네브가 황급히 날 불러 세웠다.
“잠깐, 한 가지 더.”
“예?”
여기서 대화 마무리 짓고 헤어지면 딱 완벽했을 텐데 이번엔 또 뭐람? 나는 반쯤 돌아섰다.
방금 전의 우울한 분위기가 허상이었던 것처럼 데네브는 전매특허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재수 없었다.
“친구라는 애가 아로네 말리지 않고 뭐 한 거야? 안 그래도 평판이 바닥을 기었는데 이젠 완전히 회생 불가라고.”
됐다, 말을 말자. 나는 대꾸하지 않고 그냥 뛰었다. 잠깐이라도 쟤한테 동정심을 느꼈던 내가 어리석다 어리석어!
***
황후가 고대하고, 제이든이 오지 않길 바랐던 날이 왔다. 그렇다. 오늘 드디어 벨라와 첫 번째 데이트를 하게 된다.
아무래도 첫 번째니까 가볍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벨라를 궁에 초대하기로 했다. 티타임을 가진 뒤 제이든 소유의 갤러리를 구경시켜 주고 정원을 산책하는 게 오늘 계획이다. 어휴, 누가 짠 계획인지 참 기똥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