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138)

<86화>

레이가 내 쪽으로 살짝 고개를 숙이자 빛 가루가 바람을 타고 내게 흘러왔다. 덕분에 레이에게서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어때? 뭔가 좀 달라진 것 같아?”

레이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는 그가 농담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바로 부정할 수 없었다.

***

나는 창가에 기대 바깥 풍경을 바라봤다. 시가지 중심에 위치한 여관은 축제의 전경을 한눈에 보여 줬다.

해는 이미 오래전에 저물었지만, 연등의 빛이 태양처럼 밝아서 마치 이 거리에만 일찍 새벽이 찾아온 것 같았다. 덕분에 한밤의 거리는 여전히 활기찼다.

“아, 지금 좀 행복한데.”

간간이 불어오는 밤바람이 기분 좋게 앞머리를 건드렸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별자리를 헤아렸다.

“카시오페아 자리가 그러니까 여기랑 저기랑……. 어?”

마지막 선을 이으려던 참에 리오델라 한 마리가 불쑥 나타났다. 몇 시간 전, 군중 앞에서 묘기를 부리고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그중 한 마리가 길을 잃은 모양이었다.

나는 홀린 듯이 손바닥을 펼쳤다. 리오델라가 탐색을 하듯 빙빙 돌다가 이윽고 검지 위에 살포시 안착했다.

대박. 나는 소리 없이 감탄하며 리오델라를 관찰했다. 자세히 보니 황금빛 날개 위에 물결 같은 무늬가 굽이치고 있었다.

“리오델라야.”

아주 작은 목소리로 부르자 리오델라가 응답하듯 날개를 펄럭였다.

“친구들은 어디 가고 왜 너 혼자 여기 있니?”

그러자 리오델라는 천천히 부유하고선 어둠 속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나는 몹시 아쉬운 눈으로 리오델라의 날갯짓을 지켜봤다.

“쳇, 나랑 말 섞기 싫다 이거지? 그래, 잘 가라.”

나는 뚱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리오델라는 한 곳에 못 박혀 고요히 날갯짓을 할 뿐 아무리 기다려도 떠나지 않았다.

“친구야, 내가 쿨하게 보내 줄 때 그냥 가.”

확실히 리오델라는 내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았다. 내가 어떻게 확신했냐면 리오델라가 내 주위를 한 바퀴 빙 돌고선 무언가를 기다리듯 날 바라봤거든.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같이 가자는 거야?”

리오델라는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마치 긍정하는 것 같았다. 내가 미친 걸까?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마법 생물과 인간의 우정? 이럴 수가 있어? ……세상에, 너무 재밌겠다. 무조건 따라가야지. 무조건.”

나는 습관적으로 주절거리면서도 가방을 뒤적거렸다. 아 씨, 분명 비행 스크롤이 있었던 것 같은데.

몇 분 사이에 리오델라가 날 두고 떠날까 봐 마음이 급했다. 나는 가방을 탈탈 털어 스크롤 두 개를 잽싸게 잡아챘다. 그리고 하나는 주머니에 넣고 다른 하나는 바로 찢었다.

툭. 스크롤이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발이 지면과 점점 멀어지는 광경을 토끼 눈을 하고 바라봤다.

“……내가, 내가 지금 날고 있어!”

부지불식간에 희열감이 차올랐다. 내가 이래서 마법을 사랑해.

조심스럽게 창문 바깥으로 나가자 리오델라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시 날 기다리는 게 맞았어.

리오델라는 자신이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듯했다. 빛나는 나비를 따라 어둠 속을 비행하자니 문득 숨겨진 세계에 초대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충동적인 선택이 전혀 후회스럽지 않았다. 머리칼을 헝클이고 지나가는 바람 또한 웃음이 절로 나올 만큼 시원했다.

흥겨운 노래는 점점 뒤로 사라지고 고요함이 찾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한한 어둠이 시야를 채웠다.

눈앞에 별보다 밝은 리오델라가 있어서 무섭지는 않았다. 정말 무서운 건 별안간 내가 스크롤의 지속 시간을 깨달았을 때였다.

“아, 미친! 이거 15분짜리였지?”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유레카를 외치지자마자 몸이 덜컹였다. 마법의 효력이 소멸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허접한 순간 이동 능력자처럼 눈을 깜박일 때마다 점점 아래로 추락했다. 너무 무서워서 비명도 안 나왔다.

풀썩. 환장할 운동 신경을 가진 나는 안정적으로 착지하지 못하고 흙 위를 데굴데굴 구르다 정확히 네 번째에서 멈췄다.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가 지금 꿈을 꾸나……?”

내게 벌어진 일이 믿기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자 까마득한 숲의 어둠만 보였다. 나는 허공을 노려봤다.

“리오델라, 너……! 어떻게 친구가 사라진 것도 모르고 홀랑 가 버리냐?”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누굴 탓해, 아름다움에 홀려 선뜻 따라나선 내 잘못이지.

“흠……. 계속 북동쪽으로 날아왔으니 정확히 그 반대로 가면 되겠지?”

나는 남은 비행 스크롤을 찢으려고 주머니를 뒤졌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양피지의 감촉이 느껴져야 할 주머니에서 먼지만 잡혔다. 나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말했다.

“아, 나 망했구나.”

***

나는 비행 스크롤을 잃어버렸다는 죄로 여관까지 걸어가야 한다는 형량을 선고받았다. 고로, 지금 난 30분째 온갖 욕을 하며 숲길을 걷고 있었다.

“미치겠네. 고작 15분 동안 날아왔을 뿐인데 얼마나 멀리 온 거야?”

게다가 알고 보니 이곳은 맹수 출현 구역이었다. 5분 전, 곰 그림이 그려진 표지판을 보고 얼마나 식겁했던지.

나는 비상용으로 항시 들고 다니는 공격 스크롤을 꼭 쥐었다. 곰이든 뭐든 튀어나오면 재빨리 찢고 바로 튀어야지. 아니, 차라리 나무 위를 오르는 게 나으려나?

“언젠가 곰이 나무 타는 영상을 본 것 같은데. ……와, 곰 만나면 난 그냥 죽겠는데?”

안 그래도 곰이 튀어나올까 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짐승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덜덜 떨며 뛰다시피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숲을 빠져나오던 참에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길쭉한 인영을 목격했다. 나는 반색하며 양팔을 붕붕 흔들었다.

“저기요! 혹시 마을로 가는 길 아세……. 레이?”

쟤가 왜 여기서 나와? 그렇게 의문하던 찰나 레이가 잠시 멈칫하더니 순식간에 달려와 날 세게 끌어안았다. 귓가에 닿는 숨소리가 거칠었고, 빈틈없이 내 등을 감싼 손의 온기는 뜨거웠다. 평소의 레이답지 않았다.

나는 물음표를 잔뜩 달면서도 일단 레이의 등을 토닥였다.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어.”

“나한테 무슨 일이 왜 생겨?”

레이가 진심이냐는 눈빛으로 지그시 나를 쳐다봤다. 그래, 지금 내 꼴이 엉망이긴 하지.

나는 좀 멋쩍어져서 그를 밀어내고 대충 머리를 묶었다. 레이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가볍게 한잔하기로 약속했었잖아. 그럴 애가 아닌데 30분이 지나도록 안 오고. 자는 건가 싶어서 정령을 보내 확인하니까 가방은 뒤집어져 있지, 창문은 활짝 열려 있지. 그러니 내가 미치지 않고 배겨?”

아 맞다. 우리 자정에 만나기로 했지. 하도 정신이 없어서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미안. 우연히 리오델라를 보고 따라갔다가 이렇게 됐네.”

레이가 내 몸 곳곳을 살피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무사했으면 됐지. 일단 여기서 나가자.”

그가 깍지를 끼고 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나는 그의 상기된 뺨을 흘긋거리며 숙소와 이곳까지의 거리를 가늠했다. 1시간은 훨씬 더 걸렸을 텐데. 레이는 설마 그 거리를 뛰어온 걸까?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창틀에 빛 가루가 묻어 있더라고. 혹시나 싶어서 리오델라의 동선을 따라와 봤는데 다행히도 네가 있네.”

레이가 운이 좋았다며 혼잣말했다.

“그러면 내가 습격을 받은 게 아니라는 것도 짐작한 거 아니야?”

“그래. 하지만 네가 있던 숲은 맹수 출물 구역이었고, 넌 혼자였잖아.”

“내가 항상 비상용 스크롤 들고 다니는 거 알면서.”

나는 1급 공격 스크롤을 들어 보였다. 레이가 정말 모르겠냐며 새삼 애틋한 눈빛을 지었다.

“내가 널 많이 좋아한다는 거 알잖아. 네가 어디서 뭐 하고 있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안심하겠어, 내가.”

저 눈빛과 멘트는 반칙이다. 나는 술렁이는 마음을 진정시킬 요량으로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여기까진 어떻게 왔어?”

“마차 타려면 최소 30분은 기다려야 한다더라.”

“……그래서 그 먼 거리를 뛰어왔어?”

레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낭패감을 느꼈다. 이거 원. 전진하면 플러팅이고, 후진하면 감당할 수 없는 진심이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내가 민폐 끼쳤네. 다시 한번 미안해.”

나는 한숨을 쉬었다. 설레고 자시고 결국엔 죄책감이 들었다. 레이가 시무룩한 내 얼굴을 보고선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그러지 마. 내가 걱정이 많아서 유난스럽게 군 건데 왜 네가 그런 표정을 지어.”

“다음에는 꼭 쪽지 남기고 나갈게. 오늘은 내가 너무 생각이 없었어.”

하여간 리오델라에 눈이 돌아가서는. 나는 괜히 돌멩이를 툭툭 차며 속상한 마음을 달랬다. 완벽했던 하루를 내가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가 말없이 나를 쳐다보다가 장난스럽게 내 콧방울을 건드렸다. 적막을 깨트리는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혜라, 그거 알아?”

“……뭘?”

“내 사람들을 모두 잃고 난 후 내가 한 결심이 있어. 앞으로 또 소중한 사람이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생긴다면 그 사람만큼은 무조건 지키자고. 가능한 위험의 싹은 조기에 잘라 버리자고. 그래서 내 욕심대로 굳이 뛰어온 거야. 나 되게 미련하지?”

나는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리오델라보다도 더 빛나는 녹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내가 민폐 끼쳤다는 생각에는 변함없었지만, 레이의 다정함이 어쩐지 죄책감을 희석시켜 주는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곧 엄마 생일이라는 게 생각났다. 나는 희미한 달빛이 내 그늘을 가려 줄 거라 믿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레이에게 처음 내보이는 깊은 속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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