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벌컥 문을 열자 어느새 기분이 좋아져서 과자를 먹고 있는 할리가 보였다. 나는 그것 보라는 양 레이에게 눈짓했다. 레이는 언뜻 감동까지 받은 것 같았다. 어떻게 사람이 저러냐는 중얼거림을 지나치며 나는 킬킬거렸다.
생각했던 것만큼 마찻길은 고통스럽지 않았다. 우리는 각자 싸 들고 온 주전부리를 한 곳에 쏟아붓고 질리도록 수다를 떨었다.
배도 적당히 불렀겠다, 1시간 즈음 지나니 슬슬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레이는 쌩쌩했지만 전날 야근한 나와 할리는 달랐다. 나는 꾸벅꾸벅 졸다가 결국 옆에 있던 할리에게 기댔다.
단단한 어깨에 머리가 닿자마자 정수리 위로 묵직한 느낌이 가해졌다. 할리도 골아 떨어졌나 보군. 나는 무아지경의 세계에 빨려 들어가면서 생각했다.
툭. 이번에는 상체 위로 부드러운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몽롱한 의식이 안개 같은 목소리를 간신히 잡아챘다.
“네 얼굴 보고 싶어서 여기 앉은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러지 말 걸 그랬네. 좋은 꿈 꿔.”
그의 말 덕분일까. 동화 같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을 마지막으로 나는 완전히 잠들었다.
***
“미친! 여기 완전 대박이다!”
나는 잔뜩 흥분해서 할리를 붙잡고 달달 흔들었다. 비몽사몽한 채로 마차에 내려서 처음에는 내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다. 할리도 덩달아 들떠서 내 손을 마주 잡고 방방 뛰었다.
“그치! 내 말 듣길 잘했지?!”
우리는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감격에 찬 눈으로 루디체 전경을 바라보았다.
거리를 빼곡히 메운 노점들과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타 소리, 코끝을 자극하는 먹임직스러운 음식 냄새, 단풍나무 사이를 잇는 은방울꽃 모양 연등.
그중 제일은 황혼으로 물든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유리 리오델라였다. 그가 날갯짓을 할 때마다 청아한 소리가 울렸다. 나는 내 머리 위로 가짜 리오델라가 지나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떻게 저게 가능하지? 속으로 의문하던 찰나, 익숙한 미성이 속삭였다.
“바람 정령술사 몇몇이 이 축제 준비에 파견됐었어.”
나는 홱 고개를 돌렸다. 분명 속으로 생각했던 것 같은데.
“방금 내가 입으로 말했어?”
“아니. 하지만 표정으로도 충분했어.”
레이가 눈꼬리를 휘었다. 방금 우리를 스쳐 지나가던 아저씨가 순간 시선을 빼앗기고 나무에 이마를 박았다. 나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넌 일상이라 눈치도 못 채는구나.”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충 얼버무리고 레이에게 왼쪽 팔을 내밀었다. 인파가 장난 아니라서 자칫 잘못하면 서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할리? 걔는 굳이 붙잡고 있지 않아도 현란한 모자 덕분에 상시 위치 추적이 가능했다.
레이가 잠깐 고민했다가 능글맞게 물었다.
“팔짱 말고 손잡는 건 안 되나?”
“……와. 기회를 놓치지 않는 저, 아야!”
우락부락한 덩치의 남자가 내 어깨를 세게 치고 지나갔다. 레이가 휘청거리는 내 팔을 잡고 이미 점처럼 멀어진 남자의 뒤통수를 살벌하게 노려봤다.
나는 얼얼한 어깨를 문질렀다. 어쩐지 내일 아침 일어나면 멍이 들어 있을 것 같았다. 레이가 걱정스레 내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괜찮아? 약 구해 올까?”
“아니, 괜찮아.”
레이는 안절부절못했다. 그가 추가적인 사고를 방지하고자 안다시피 어깨동무를 했다.
“아니면 아까 그 남자를 찾아다 사과하라고 시킬까?”
레이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즉시 남자를 찾아오겠다는 듯 눈에 힘을 줬다. 나보다도 아파하는 그를 보니 분노가 가라앉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말했다. 그의 몸이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됐어. 그냥 할리 찾아서 신나게 놀자.”
레이는 잠시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내 어깨를 조금 더 그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때마침 할리가 몹시 흥분하여 팔짝팔짝 뛰어왔다.
우리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대신 노점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길거리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하기로 했다.
노점이 늘어진 길을 한 바퀴 돌면서 원 없이 먹고, 아로네에게 줄 기념품도 샀다. 리오델라 모양의 머리핀이 아로네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베키와 루나에게 줄 선물은 계속 고민이 돼서 뒤로 미루다가 인체에 무해하고 보습력이 뛰어나다는 상인 말에 홀랑 넘어가 핸드크림 두 개를 샀다. 리액션 장인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벌써부터 기대됐다.
즐거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우리는 조금 지쳐서 야외 테이블에 앉아 쉬었다.
나는 이 지역 특산물로 만들었다는 푸딩을 세 개째 먹으며 관광 안내서를 정독했다. 할리가 자그마치 여섯 번째 푸딩을 주문하고 물었다.
“공연 시간 언제야?”
나는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무희들 사진 아래로 굵직한 숫자가 적혀 있었다.
“10분 남았네.”
“아싸! 그럼 리오델라가 깨어나는 시간은?”
할리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나는 리오델라 관련 페이지를 펴려다가 할리의 외침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어? 저 사람 소공작님 아니야?”
여기에 데네브가 있다고? 나는 할리의 손가락 끝을 바라보았고, 거짓말처럼 데네브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는 미로 속 이정표를 발견했다는 듯 이채를 띠었다.
“아이고 망했다.”
내가 절망스럽게 머리를 감싸 쥐는 사이, 데네브는 단숨에 다가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레이의 눈썹이 못마땅하다는 듯 꿈틀거렸다. 나는 가식적인 미소를 띠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런 곳에서 다 보네요! 여긴 어쩐 일이세요?”
데네브는 범죄자를 심문하는 형사처럼 날카롭게 눈을 떴다.
“업무차 왔다.”
“에이, 업무차 오셨으면 저한테 아는 척 안 하셨겠죠. 용건이 뭔가요?”
레이와 할리가 자기들끼리 눈빛을 교환했다. 대충 내가 미친 건 아닌지 묻는 것 같았다. 정작 데네브는 내 말투에 익숙해진 지 오래라 퉁명스레 대꾸할 뿐 분해하지 않았다. 나로선 아쉽게 됐다.
“여기서 신시아를 목격했다는 제보를 받았어. 그런데 네가 있군.”
내가 여기서 신시아를 만날 거라 생각하나 보지? 나는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전 아무것도 몰라요. 맹세할 수도 있어요.”
데네브가 보란 듯이 코웃음을 쳤다.
“널 믿느니 차라리 포기하고 말지.”
진짜 신시아를 앞에 두고 그런 말을 하다니. 나는 레이 쪽으로 시선이 굴러가는 걸 겨우 막았다. 하지만 반사적으로 나온 웃음은 차마 막지 못했다. 데네브가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가 웃기지?”
“어, 그게 그러니까……. 헐! 저거 봐요!”
팡! 폭죽 터지는 소리가 나며 사람들이 일제히 한곳으로 몰려갔다. 나는 벌떡 일어나 왼쪽엔 할리를, 오른쪽엔 레이를 끼고 달렸다. 타이밍 죽이네!
데네브는 숨 막히는 인파에 끼어 우리를 쫓아오지 못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돌리고 눈앞의 광경에 집중했다.
점선처럼 이어진 연등 길 한복판에는 원형 무대가 있었다. 폭죽의 파편이 바람을 타고 공기를 떠돌아다녔고, 무대 아래에서 소규모 악단이 신비로운 선율을 연주했다.
첫 음을 듣자마자 온정신을 빼앗겼다. 나는 넋을 놓고 무희들의 춤을 감상했다.
하얀색 서클릿이 찰랑찰랑 흔들리며 간간이 반짝였다. 양손을 이은 얇은 천은 나비처럼 날아올랐다가 바람결을 따라 아느작아느작 펄럭였다. 섬세한 손끝이 펴졌다가 다시 구부러지는 과정이 꽃의 개화와 닮아 있었다.
힐금 왼쪽을 바라보자 할리는 무대에 빨려 들어갈 듯 집중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레이는 그다지 공연에 집중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인파 때문에 딱 붙어 서서 불편한가?
“레이.”
“……응?”
“위험한 숨바꼭질을 하는 기분이 어때?”
“글쎄. 술래한테 집에 가도 된다고 알려 주고 싶더라.”
우리는 동시에 키득키득 웃었다. 그때, 새하얀 손이 우리 사이로 불쑥 끼어들었다. 가장 춤 선이 예쁘다고 생각했던 무희가 내게 말했다.
“저랑 춤 한 곡 추실래요?”
“……예? 저요?”
주위를 둘러보자 다른 무희들도 제각각 게스트를 섭외하고 있었다. 나는 레이와 할리를 번갈아 쳐다보며 제발 도와 달라고 간절한 눈빛을 쏘았다. 할리가 인심 써 준다는 듯이 대신 무희의 손을 잡았다.
“얘 심각한 몸치예요. 제가 흑기사 하죠.”
할리가 나중에 꼭 소원 들어줘야 한다며 신신당부를 하고 무대 한복판으로 나갔다. 나는 알겠다는 듯 오케이 표시를 보냈다.
악단은 몽환적인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샘물에 물방울이 톡톡 떨어지는 느낌은 다소 난해하기도 했다.
할리는 처음에는 부끄러워하다가 무희가 먼저 리드하자 천천히 선율에 몸을 맡기기 시작했다. 나보고 심각한 몸치라더니 할리도 만만치 않았다. 목각 인형처럼 삐걱거리는 모습이 웃겼다.
나는 낄낄거리며 기억 구현기를 꺼내 들었다. 이 진귀한 광경을 놓칠 수 없지.
한껏 집중한 표정의 할리 얼굴을 렌즈에 담고 셔터를 누르려던 순간, 그가 탄성을 터뜨리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뭐지? 고개를 올리자 잠에서 깨어난 리오델라 무리가 일제히 날아와 밤하늘을 수놓는 모습이 보였다. 가장 밝은 1등성 별도 흐리게 만들 만큼 리오델라는 찬란했다.
나는 멍하니 기억 구현기를 내리고 비현실적인 광경을 바라봤다. 빛 가루를 뿌리며 날아다니는 리오델라는 마치 동화 속의 팅커벨 같았다.
폭발적인 함성이 울리며 귀가 먹먹하고 현기증마저 이는 와중에 나는 고요히 내려앉는 빛 가루를 손바닥에 담았다.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던 레이가 나직이 말했다. 분명 소음에 묻혀야 할 목소리가 유독 선명했다.
“그거 알아? 리오델라의 빛 가루는 사랑을 이루어 준대.”
리오델라 한 마리가 계속 우리 위를 맴돌며 끝도 없이 가루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