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그리고 그는 창고 깊숙한 곳에서 아로네의 이름이 새겨진 보석함을 발견했다.
보석함에는 먼지가 자욱이 내려앉아 있었다. 아로네는 족히 20년은 더 되어 보이는 보석함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열었다. 그러나 보석함은 덜컹거리는 소리만 낼 뿐 그대로였다.
아무리 둘러봐도 잠금장치는 없는 것 같은데 보석함은 기이한 힘에 의해 봉인된 것처럼 무슨 짓을 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아로네는 한참 보석함을 관찰한 끝에 테두리를 따라 아주 작은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제국의 언어가 아니었다.
“……마법 언어가 이랬던가?”
아로네는 기이한 보석함을 에단에게 맡겼다. 그는 아로네의 손끝이 가리킨 생소한 문자를 보고 탄성을 질렀다.
“이걸 왜 이제 갖고 와?”
“이게 뭔데.”
“뭔지도 모르고 갖고 왔어? 이 문자, 마녀들의 언어잖아.”
“……마녀들의 언어라고?”
아로네는 순간 어머니의 초상화를 떠올렸다. 그를 낳자마자 저택에서 쫓겨난 어머니의 물건이 왜 지하창고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에단은 흑마법의 산물을 발견했다는 것에 마냥 들떠 아로네의 의문에 답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당장 연구하겠다며 아로네가 대답하기도 전에 순간 이동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겨진 아로네는 바닥에 떨어진 먼지 조각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머니가 내게 남긴 걸까? 언제부터? 어떻게? ……아버지는 알고 계셨을까?’
왠지 공작이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19년 동안 출생의 비밀을 숨긴 사람인데 친엄마가 남긴 마지막 물건을 숨긴 것 정도야 대수겠어.
격앙된 얼굴로 ‘나디아는 네 존재가 버거워서 죽었어! 너나 네 친모나 살인자나 다름없어!’라고 외치던 공작을 생각하면 어머니가 마녀라는 것도 이미 알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날 버린 건가? 나도 마녀일까 봐?”
안타깝게도 아로네는 마녀가 아니었다. 정말 아로네가 마녀였다면 공작과 말다툼을 하던 그날,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위해를 가했을 것이다. 그때 아로네는 진심으로 공작을 죽이고 싶었다.
공작은 그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본인의 실수로 가정이 파탄 나고, 사랑하던 부인이 병들어 죽고, 원하지 않았던 애를 가졌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죄 없는 사람을 탓하는 것이다.
“……이제야 알겠네.”
그는 사랑을 잃고, 행복을 잃고, 희망을 잃으며 제대로 살아가길 포기했다. 세상에 대한 분노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향했고, 공작은 그런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그 감정은 자기 자신을 혐오하도록 만드는 아이에 대한 더 큰 멸시로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더욱 크기를 불린 자기 모멸감이 돌아왔다.
“어머니가 저주를 내렸든 말았든 그건 상관없는 거였어. 진실인지도 확실하지 않고.”
애초에 아로네는 공작의 말을 모두 믿을 필요가 없었다. 아로네가 알아야 할 건 그의 친모는 아직 살아있고, 다른 세계 어딘가에서 그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는 것이었다.
에단은 가게 문을 닫을 즈음 다시 돌아왔다. 그가 아로네의 손에 보석함을 쥐여 주며 말했다. 굳은 얼굴과 진중한 목소리는 평소의 건방진 태도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내가 보면 안 될 것 같더라.”
에단은 혼자 있을 시간을 주겠다면서 오자마자 바로 떠났다. 아로네는 다소 얼떨떨한 기분으로 에단이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다가 보석함을 열었다. 저번과 달리 보석함이 딸각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이게 무슨…….”
그 안에는 전혀 예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는 것들이 들어 있었다. 수많은 편지가 작지 않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아로네는 떨리는 손으로 가장 위에 있는 편지를 집어 들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아이, 아로네에게.
이 편지가 너에게 닿을지 모르겠구나. 어쩌면 공작이 꽁꽁 숨기는 바람에 평생 못 볼 수도 있겠지.
그 인간이 너만 열 수 있도록 걸어 놓은 마법을 파손하겠다고 설치다가 오히려 주문이 얽혀서 평생 보석함이 열리지 않을지도 모르고 말이야.
그래도 이 엄마는 아주 작은 희망을 품고 너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단다.
공작 부인이 너를 잘 보살펴 주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 유약한 여인이 남편의 외도를 알아채고도 멀쩡히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구나. 혹여 충격에 못 이겨 병이라도 들면 큰일인데 말이야.
공작에게 길러지는 최악의 상황만 피했으면 좋겠거늘……. 설사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한들 이 엄마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너를 돕겠다고 약속하마.
앞으로 우리 딸의 미래에 함께할 수 없어서 아쉽고, 하염없이 미안하구나. 처음 말하는 단어는 무엇일까, 흥미로워하는 과목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을까, 좋아하는 사람은 있을까…….
궁금한 게 한가득인데 운명의 신은 딸과 엄마의 사이를 기어코 갈라놓을 셈인가 봐. 온 힘을 다해 운명에 저항했지만, 별다른 수가 없구나. 무능한 엄마라서 미안해, 우리 딸.
이 편지를 읽을 즈음이면 우리 딸이 공작에게 사건의 전말을 듣고 난 후겠지. 그가 무슨 말을 했든 모든 걸 믿지 마렴. 그는 반듯한 외양과 달리 생각보다 추잡하고 위선적인 인간이란다.
진실을 알고 싶다면 다음 장을 읽고, 그렇지 않다면 그대로 이 편지를 봉투에 넣어 고이 보관하렴. 이 엄마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읽지 않는 게 나을 것 같구나. 어떤 진실은 과거 속에 묻어 두는 편이 나은 법이야.」
아로네는 무심코 다음 장으로 넘기려다가 멈칫했다. 알고 나면 후회할 수도 있는 진실이다. 그러나 아로네는 어머니가 그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알고 싶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다음 장을 펼쳤다.
「과거에 묻으라고 말했거늘. 호기심 많은 모습을 보니 날 닮았나 보구나.
내가 기억하는 그날은 공작이 부인과 호되게 다툰 날이었단다. 우연이 겹쳐 악운을 만든 날이기도 했지. 공작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술을 마셨고, 나는 술과 안주를 끊임없이 공작의 침실로 날랐단다.
혹시 내 초상화를 본 적 있니? 그렇다면 눈치챘을 거야. 내 외양이 놀랍도록 공작 부인과 닮아 있다는 것을.
공작은 술에 취했고, 나를 그의 부인이라 착각했지. 그 뒤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마.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당황한 것도 사실이란다. 갑작스러웠고 두려웠지. 공작이 죽도록 원망스럽기도 했어.
하지만 너를 향한 애정만큼은 고결했고 헌신적이었단다. 난 단 한 번도 널 가져서 절망스러웠던 적이 없어.
비록 공작이 내게서 널 뺏어 갔지만 나는 언제나 아로네, 너를 생각하고 그리워할 거란다. 네가 세상 밖으로 나오던 그 순간, 나와 스치듯 눈을 마주쳤던 그 순간을 나는 평생 기억할 거야.
그러니 부디 기억해 주렴, 아로네. 엄마는 세상 어딘가에서 너의 행복을 간절히 기도하며 살아 있다는 것을, 네가 혼자라 느낄 때조차도 사실은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네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분명 있다는 것을.
사랑해, 우리 딸.
-엄마가.」
“아…….”
아로네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한참 동안 미동하지 않았다. 이 편지를 이제야 읽은 게 억울했다. 조금 더 일찍 어머니의 마음을 알았다면. 조금 더 일찍 지하 창고에 내려갔더라면.
“……어쩌면 난 덜 외로웠을지도 몰랐는데.”
그의 어깨가 들썩거리기 시작하더니 가냘픈 울음소리가 잇새 사이로 흘러나왔다. 하염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치마폭에 둥근 지도를 만들었다.
비는 쉽사리 그치지 않았다. 아로네는 창밖의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지고 어둠이 세상을 덮을 때까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JMT공금
***
월요일 아침, 나는 간만에 맑은 정신으로 할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할리가 날 보자마자 입을 벌렸다.
“너…… 그 옷은 설마……?”
나는 거만하게 픽 웃고선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내 옷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대답해 주는 게 인지상정이지. 나는 허리에 척 손을 올리고 고개를 치켜세웠다.
“어때, 본새 작렬이지? 아로네가 만들어 준 거야. 세상에 단 한 벌밖에 없는 정장이라고.”
“세상에 단 한 벌이라고? 크흑, 겁나 부럽다!”
할리가 내 옷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무심코 뱉은 감탄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할리가 간절하게 내 팔을 붙들었다.
“남성복은 안 만든대? 나도 하나 갖고 싶다.”
나는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안타깝지만 아로네는 여성복만 만들어. 아직까지는.”
“……나만큼 말랐으면 여성복도 맞지 않을까?”
할리가 희망을 품고 그의 마름을 한껏 어필했다.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였다. 나는 친구의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애잔하게 지켜보았다.
할리가 마른 편인 건 사실이고, 잘 찾아보면 그의 사이즈에 맞는 옷도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아로네가 주 고객층을 귀족 혹은 무지하게 돈 많은 평민으로 잡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할리의 지갑 사정은 옷 가격을 버틸 능력이 안 됐다. 나는 할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쯤 하고 이제 가자. 늦겠다.”
할리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내 뒤를 총총 따라왔다. 우리는 한동안 침묵을 즐기며 걸었다.
나는 상쾌한 아침 공기를 폐부로 밀어 넣었고, 할리는 가시지 않은 졸음기를 밀어내느라 혼자만의 사투를 벌였다. 그러나 8분 뒤, 나는 진저리를 치며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어휴 진짜!”
“왜, 왜 그래?”
할리가 완전히 졸음기가 가신 표정으로 되물었다. 나는 애꿎은 돌멩이를 힘껏 찼다. 웁스, 너무 세게 찼나? 한참 앞에 있는 사람이 꽥 비명을 지르며 뒤돌았다.
이럴 수가. 그 지지리 운 없는 사람이 하필이면 게일이라니.
나는 할리를 끌고 재빨리 나무 뒤에 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