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138)

<82화>

“그러게. 무리한 거 아니야, 혜라?”

참나, 이 사람들 보게. 내가 얼마나 유능한 직장인인데 겨우 기억 구현기 하나 못 살까 봐? 인센티브 받기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이거야.

“걱정들 말아. 얼마 전에 제이든이 상여금 줬거든. 그것도 아주 많이.”

나는 거만하게 다리를 꼬았다가 이 세계에 정형외과가 없다는 걸 퍼뜩 깨닫고 바르게 앉았다.

기억하자 혜라야. 한국에선 1700만 원만 내면 척추 수술도 가능했지만, 여기선 그만한 돈이 있어도 틀어진 척추를 고치지 못해.

아로네는 내 허세를 듣고도 묘하게 찜찜한 표정이었다. 아로네를 알고 지낸 지 1년이 넘어가니까 이젠 독심술사처럼 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보나마나 ‘기억 구현기 없어도 잘 살아왔는데 굳이 그게 필요한 걸까?’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영원했으면 하는 순간들이 있잖아. 기억 구현기는 그 순간을 위해 만들어진 거야. 과거를 떠올리는 데에 그림만으론 한계가 있으니까.”

“……너 혹시 에단한테서 따로 부탁받았어?”

나는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말을 경청하던 베키가 부연 설명을 해 주었다.

“방금 영업 사원 같으셨거든요.”

아하. 나는 고개를 주억이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네 사업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식으로?”

아로네는 내 의중을 가늠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가를 찌푸렸다.

“예컨대 네가 직접 옷 모델이 되는 건 어때? 잡지에 광고 내보내면 좋을 거 같은데.”

베키와 루나는 좋은 생각이라며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반면 아로네는 그의 사진이 전국에 떠돌아다니는 게 탐탁지 않은 기색이었다. 그러나 긴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홍보는 잘되겠네. 대신 사진은 네가 찍어 줘야 해.”

“당연하지. 애정으로 찍은 사진이 잘 나오는 법이니까 나만 믿어.”

나는 가슴을 퉁퉁 치고 자랑스레 말했다. 이래 보여도 고등학생 시절 사진 동아리 부장까지 했던 사람이다. 심지어 꽤나 큰 대회에서 상 타 본 적도 있다고.

그런데 왜 아로네는 갑자기 자기 발언을 후회하는 것처럼 보일까? 왜 베키와 루나는 날 의심스럽게 쳐다보는 걸까?

“좋아, 다들 못 믿겠다 이거지? 그렇다면 내 실력을 보여 줘야겠군.”

나는 내 기억 구현기를 꺼내 높은 선반 위에 올려놓고 우리 네 명을 모두 담는 구도로 렌즈를 조정했다. 그리고 7초 타이머를 걸고 재빨리 뛰어가 아로네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아로네가 이제 뭘 어떡하냐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나는 그 표정이 어리숙해 보여서 깔깔 웃었다.

“자, 다들 웃어!”

철컥하는 소리가 울렸다. 나는 인화된 사진을 보지 않았음에도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찍어 갈 수많은 사진들 중에서도 오늘의 것이 가장 최고일 거라고.

***

웃고 떠들다 보니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 어느새 밤하늘에 별이 총총히 박혔다. 베키와 루나는 피곤하다면서 먼저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갈 생각이었다.

나는 아로네 쪽으로 돌아누웠다.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문밖으로 사라지고 찾아온 고요함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동안 틈이 나지 않아 차마 하지 못했던 이야기의 물꼬를 텄다.

“다른 가족 반응은 어때?”

처음 반응이 어땠는지 기억한다. 직접 본 건 아니지만, 때로는 귀로 들어도 모든 게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법이다.

아로네가 사업을 하겠다고 덜컥 가게 계약을 하고 왔을 때 저택은 발칵 뒤집혔었다. 베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말 난리 난리 생난리였다고 한다.

당연히 아로네는 부자의 부정적인 반응을 싹 무시하고 꿋꿋이 사업을 강행했다. 그 과정 속에서 공작이며 데네브며 뒷목을 잡고 아로네를 설득하려 했지만, 어디 아로네가 그 강요와도 같은 헛소리에 넘어갈 애던가?

아로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장본인과 그 상처를 전해 듣고도 위로 한 번 안 해 준 방관자. 그들이 무슨 자격으로 아로네의 꿈을 저지하려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아로네는 귀 닫고 자기 일에만 집중했고, 최근에는 일이 너무 바빠서 아예 여기서 살다시피 했다. 그래서 그들과 마주칠 일은 극히 적었을 테지만,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니까.

“오늘 데네브가 편지를 보냈어.”

“뭐라디?”

“망신당할까 봐 기껏 걱정해 줬더니 기어코 일을 치르는 구나……라고 말하던데.”

나는 걱정스레 아로네를 살폈다. 더 이상 가망 없는 관계에 목매지 않겠다고 다짐한 아로네는 거짓 없이 덤덤했다.

“공작은?”

“사업하는 건 별말 없었는데, 혼자 살 집 계약했다고 하니까 그럼 아예 연 끊자고 하시더라고.”

“뭐?!”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너무 커서 입을 틀어막았다. 공작도 참 답 없는 걸로는 정말 세계관 최강이네. 아로네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예상했었어.”

무책임한 절연 통보가 당연한 게 아닌데 당연하다는 식으로 말하니까 마음이 안 좋았다. 나는 말없이 아로네의 팔을 토닥거렸다. 아로네가 고맙다는 듯 흐리게 웃었다.

나는 무거워진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자 화제를 돌렸다. 탁자에 놓인 기억 구현기가 마침 눈에 띠었다.

“에단이랑은 어때? 마녀 혼혈 연구는 잘돼 가?”

아로네가 화색을 띠고 말했다.

“생각보다. 짐 정리하다가 알게 됐는데 어머니가 나한테 남긴 물건이 있더라고.”

“설마 친어머니?”

“응. 평범한 물건은 아닌 것 같아서 에단한테 보여 주니까 흑마법의 산물이라고 좋아하는 거 있지.”

아로네는 감상에 젖어 혼잣말하듯 조곤조곤 읊조렸다.

“어떻게 보면 에단에게 그 물건들을 맡겨서 다행이야. 덕분에 보석함을 열고 어머니의 편지를 볼 수 있었거든.”

“……뭐라 적혀 있었는데?”

“그냥 뻔한 이야기. 미안하다, 사랑한다, 행복하게 살아라…… 이런 거.”

아로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무렇지 않게 친어머니 이야기를 하는 아로네가 왠지 어색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 받아들인 거야?”

아로네가 다정히 눈을 맞췄다.

“응.”

“괜찮아?”

“난 지금이 더 행복해. 이게 꿈이 아닐까 두려울 정도로.”

행복감으로 충만한 눈빛은 연기일 수가 없었다. 도대체 편지에 뭐라 적혀 있었길래 아로네가 저리 후련해 보일까?

나는 내심 드는 호기심을 죽이고 마주 웃었다. 아로네의 꿈이 언제까지고 현실로 남아 있을 수 있길 바랐다.

《아로네 외전: 보내지 못하는 편지》

JMT공금

「네 말을 믿고 한번 용기를 내 볼까 싶어. 난 지긋지긋한 ‘님프’로부터 벗어날 거야. 내 삶은 언제나 가십과 외로움의 연속이었어. 이젠 그것도 다 끝이야. 앞으로 난 독립할 계획이야.」

아로네는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았다. 그를 둘러싼 온갖 풍문들은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갑자기 알게 된 어머니의 정체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겨 냈었던가? 잊고 싶었던 건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가십으로부터 초연해진 건 사실이다. 감당할 수 없는 헛소문이 크기를 불려 항간을 돌아다니니 화가 나다 못해 팡 터져 결국 해탈한 것이다.

아로네는 더 이상 사람들의 반응과 시선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게다가 그들은 몇 주 지나니 금세 다른 가십에 열광했다.

그토록 우매한 것들에 오랫동안 신경을 기울였다니, 아로네는 일순 허탈하기까지 했다. 혜라가 말했듯 애초에 그들의 말은 가치 없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어머니가 어떤 연유로 혜라의 세계에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나마 물어볼 사람이라곤 공작뿐인데, 그 위선자의 얼굴을 보느니 차라리 모른 채 살아가는 게 훨씬 나았다.

확실한 게 있다면 어머니가 그의 불행한 삶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공작이 그를 버린 15년 전부터 계속.

어머니는 자기 자식이 철저하고 순조롭게 망가지고 있는 걸 분명 알면서도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숨 막힐 것 같은 외로움에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던 수많은 밤들 속,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넌 혼자가 아니야’라는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혜라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래. 너한테 직접 갈 수 없으니까 날 대신 보낸 거야. 비록 그는 소위 말하는 귀한 혈통도 아니고, 너와 같은 하늘 아래에 서 있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어머니는 언제나 널 아끼고 사랑했던 거야. 난 알아. 왜냐면 내게 부탁하던 그 목소리에는 절실함이 어려 있었거든. 그러니까 아로네, 넌 완전히 혼자가 아니었어.’

어떤 사정이 있든 영영 나타나지 않은 어머니가 여전히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영원히 함께 있어 주겠다고 말하던 혜라를 떠올릴 때마다 그 애를 대신 보낸 게 어머니의 최선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생각하니 원망이 가라앉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 애는 친구이자 가족이자 부모였다.

“……이제 보니 정말 천사가 맞았네.”

천사치고는 말투도 행동도 경박하기 그지없지만 아로네의 행복을 누구보다 기원하고, 힘들 때마다 온 힘을 다해 도와준다는 점에서 신화 속 천사들보다 훨씬 나았다.

그래서 아로네는 분노, 슬픔, 원망의 단계를 지나 감사함으로 친어머니에 대한 사색을 마쳤다. 그리고 현실로 나오며 출생의 비밀과 그 무게를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했다.

어머니의 얼굴이 다시 떠오른 건 한참 시간이 흐르고 출가를 위해 짐을 싸던 중이었다.

아로네는 가족의 냉담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손길이 닿은 모든 물건을 챙겼다. 마치 이 저택에 그의 흔적을 조금도 남기지 않겠다고 결의한 사람처럼.

따라서 루나가 생전 처음으로 지하 창고에 내려간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방치된 창고에 아로네의 물건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혹시 몰라서 거미줄을 걷어 내고 쥐를 쫓으며 제 주인의 흔적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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