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138)

<81화>

어려운 주문이었던 만큼 케이크값은 만만치 않았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케이크까지 픽업했겠다, 이제 의상점에 가기만 하면 돼서 느긋하게 걸었다. 황혼의 마지막 색으로 물든 거리가 정말 가을 같아서 몽글몽글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악연의 손길이 내 팔뚝을 붙잡은 순간, 감상은 와르르 무너졌다.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역시 우린 운명인가 보오.”

게일이 왜 여기 있는 거야? 히죽 웃는 모습이 참 꼴 보기 싫었다. 나는 낭패감을 느끼며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그건 잘 모르겠고요. 지금 제가…….”

게일이 불쑥 말을 가로챘다.

“저번에 그렇게 가 버려서 아쉬웠는데 잘됐구만. 혹시 식사했나?”

쟤는 눈치가 없는 걸까, 아니면 없는 척하는 걸까? 온몸으로 바쁘다는 티를 냈는데도 꿋꿋이 자기 할 말만 하는 게 흥미로웠다. 그리고 저번에 헤어질 때도 딱히 좋은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근데도 말이 걸고 싶나?

나는 입꼬리에 힘을 주고 억지로 웃었다.

“죄송하…….”

“참, 그때 그 청년은 누군가? 어쩐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단 말이야. 그처럼 연한 금발은 흔하지 않으니 잊을 리가 없는데.”

나는 흘긋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약속 시간까지 5분밖에 남지 않았고, 게일은 쉽게 떠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냥 튀어 버리려다가 얼마 전 레이의 모습이 문득 떠올라서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만들어 주기로 했다. 게일의 관심은 웬만하면 피하는 게 상책이다.

“황궁 소속 정령술사예요. 먼 지방에서 올라온 데다 취직한 지도 얼마 안 됐죠. 제 생각에는 다른 사람이랑 착각하신 것 같네요. 말씀하신 대로 그 애 얼굴을 한 번 보면 잊기 쉽지 않잖아요.”

게일이 계속 대화를 이어 나갈 기색이길래 재빨리 말했다.

“그리고 제가 지금 많이 급해서요. 죄송하지만 먼저 가 보겠습니다.”

“혜라 양은 항상 바쁜 것 같군. 심지어 전번에는 인사도 없이 가 버리고 말이야.”

죄송하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게일은 내 반응도 아랑곳하지 않고 풋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생각보다 까다롭네. 충고 하나 해 주자면, 혜라 양 같은 여자는 항상 바쁘면 안 된다네. 가끔씩 여유로울 줄도 알아야 나 같은 사람과 식사도 하고…… 다른 것도 할 수 있는 법이지.”

‘다른 것’을 발음하며 게일이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그 역겨운 표정이 내 갈등을 종결시켜 줬다.

좋아, 결심했어. 나는 바리바리 싸 든 짐을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게일은 그런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면서도 헛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영원히 황태자 전하 밑에서 일할 수 있을 것 같나? 듣던 대로 정말 영리하다면 본인의 처지도 알겠지. 기회가 오면 잡을 줄 아는 것도 능력이네.”

게일에게는 남들보다 뛰어난 재주가 있다. 바로 개소리를 다채롭게 하는 재주. 나는 살살 손목을 돌리며 말했다.

“정말 순진한 건 제가 아닌 거 같은데요.”

“오호, 왜지?”

나는 게일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멸시에 찬 비소를 지었다.

“어린 여자 한번 꼬셔 보겠다고 애쓰는 게 안쓰러울 정도로 순진하지 않나요? 당사자는 쥐뿔만큼도 관심 없는데 그것도 모르고 구질구질하게 대화 이어 나가려고 하고……. 남을 가르치려 드는 사람이라면 제가 지금 누굴 말하고 있는지도 알겠죠.”

“……지금 내 얘기를 하고 있는 건가?”

게일은 모멸감을 느낀 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르고 콧김이 100m 밖까지 뿜어져 나갈 것 같았다. 이야, 곧 한 대 치겠는데?

나는 차라리 게일이 먼저 한 대 치길 바랐다. 그래야 내가 두 배로 돌려줄 명분이 생기지. 그러나 내 바람과 달리, 생각보다 게일은 화를 잘 참았다. 그래서 나는 기름을 붓기로 했다.

“제가 누구한테 말하고 있는지 아직도 이해 못 하시네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제 능력 하나로도 영원히 황태자 전하 밑에서 일할 수 있으니까 주제넘은 간섭하지 마세요.”

“보자 보자 하니까 일개 평민이 감히……!”

예스! 이성을 잃은 게일이 드디어 있는 힘껏 손을 들어 올렸다. 나는 덜 아픈 부위로 각도를 조정하고 곧 다가올 고통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뺨에서 불이 나지 않았다.

뭐지? 실눈을 뜨고 고개를 돌리자 게일의 손목을 비틀어 잡은 아로네가 보였다. 게일은 아프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그럴수록 아로네는 더욱 손에 힘을 주었다.

앙다문 입술에서 아로네가 간신히 이성의 끈을 잡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게일은 차마 공녀에게 욕설을 퍼붓지 못하고 대신 나에게 화살을 돌렸다.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건가?!”

부탁을 해도 모자를 판에 고함을 지르다니?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곤 그의 목소리가 쉬는 과정을 느긋하게 관람했다. 종국에 게일은 흐느끼기까지 했다. 겨우 5분 만에 말이다!

“……흑, 제발 부탁하네!”

진작 그럴 것이지.

“그만하면 됐어, 아로네.”

“이렇게 쉽게?”

아로네는 아직도 분이 안 풀렸는지 게일의 추한 절규를 아쉽게 바라보았다.

“우리 오늘 할 얘기 많잖아.”

“네가 정 그렇다면.”

아로네가 손을 떼자 게일은 다리에 힘이 풀려서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게일을 보고 수군덕거렸다.

나는 바닥에 내려 뒀던 짐을 들고 남는 손으로 아로네에게 팔짱을 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간간이 훌쩍거리는 소리가 유쾌했다.

***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완전 신의 한 수였어, 네 등장.”

나는 게일이 도망치듯 떠난 것을 확인하고 말했다. 아로네의 억센 손아귀 힘과 비명 지르는 게일. 길이길이 남을 로맨틱한 순간이었다. 아로네가 빙글 돌아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약속 시간이 지났는데도 안 오길래 무슨 일이 있나 싶었어. 그런데 베키가 창밖을 가리키더라고.”

“베키 그 예쁜 것.”

정말 신이 내린 타이밍이군. 아무리 게일이 맞을 짓을 했어도 어찌 되었건 그는 황후 쪽 사람이고, 나는 황태자의 수족이었기 때문에 내가 정말 그에게 죽빵을 날렸다면 무조건 징계가 돌아왔을 것이다.

최악은 게일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는 것이고, 차악은 보좌관 자리에서 잘리는 걸까나.

누가 때렸든 어차피 게일은 한 대 맞았겠지만, 그 처단자가 아로네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아로네는 내 인생의 빛이야.

나는 새삼 가슴이 벅차올라서 아로네를 끌어안았다. 아로네는 질색하면서도 굳이 날 밀어내지 않았다. 그런 걸 보면 아로네도 은근 내 포옹을 즐기는 게 분명했다.

의상점 문 앞에서 아로네가 뜻 모를 미소를 보냈다. 그 이유 있는 자신감에 나는 기대하며 문을 열었고, 정돈된 1층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근사해서 감탄했다.

아로네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옷들은 마치 박물관의 전시품처럼 밝은 조명 아래 서 있었다. 비슷한 색채끼리 묶고, 그 구역에 하나의 테마와 스토리를 부여한 게 놀라울 정도로 창의적이었다.

나는 무채색 계열 옷들 주위로 인조 눈송이가 공기처럼 떠다니는 것을 보고 박수쳤다.

“됐어! 이미 됐어!”

잔뜩 열광하는 나를 보고 아로네가 작게 웃었다.

“뭐가 됐어?”

“내일 개업하자마자 사람들이 밀어닥칠 거야. 예언 능력 따위 없어도 확신할 수 있어.”

아로네가 입가에 미소를 달고 나를 층계 쪽으로 밀었다.

“호들갑은 나중에 떨고 일단 올라가자.”

나중으로 미루기에는 1층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나는 뒤로 계단을 올랐다. 세상에, 저게 가능한 일이야? 물빛 계열의 옷들 뒤로 작은 폭포가 흐르고 있었다.

에단이 도와준 게 확실한데 도무지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걔가 이 사업에 진심이었다니.

3층 휴게실 문을 열자 베키와 루나가 벌떡 일어났다. 그들이 꺅 소리를 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제대로 보는 건 오랜만이라 그런지 텐션이 정말 대박이었다.

“이게 얼마 만이에요!!”

“으헉.”

두 여성의 몸통 박치기는 생각보다 데미지가 컸다. 나는 뒤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두 다리에 힘을 꽉 주었다.

속으로 5초 정도 세니까 베키와 루나가 흡족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긴 5초는 세상에서 처음이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케이크 상자를 놓고 말했다.

“케이크는 내가 준비했고……. 저녁은 준비되었나?”

“훗, 당연하죠.”

“저희 어머니의 비밀 요리법도 전수받아 왔다고요.”

루나와 베키가 차례대로 말했다. 역시 배운 사람들이라니까.

나는 그들이 미치도록 자랑스러워져서 한 번씩 끌어안아 줬다. 아로네는 우리 셋끼리 까르륵 웃는 것을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파워 외향성 인간 세 명 사이에 낀 내향성 인간의 숙명인 것을.

***

자신만만하던 말마따나 베키와 루나가 준비한 음식은 저세상에 가서도 계속 떠오를 만큼 환상적이었다. 잠깐만, 여기가 바로 극락? 이런 극락이라면 평생 착하게 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가져온 케이크도 극찬을 받았다. 착한 베키와 루나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내 어깨를 우주 끝까지 솟게 해 줬고, 아로네도 진심으로 감명을 받아서 내게 따스한 눈길을 보냈다.

장식으로 들어간 프리지아 꽃이 ‘응원’이라는 꽃말을 갖고 있다는 걸 말했을 때는 더욱 감동 게이지가 높아졌다. 달아오른 분위기를 틈타 나는 아로네에게 선물을 건넸다.

“이게 뭐야?”

“네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는 선물. 한번 뜯어 봐!”

당사자인 아로네보다도 지켜보는 사람들이 더 호들갑을 떨었다. 아로네가 기대 어린 눈으로 차근차근 포장지를 뜯고 요즘 장안의 화제인 그것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기억 구현기?”

“어머, 이거 엄청 비싼 거 아니에요?”

루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로네가 상자에 기억 구현기를 내려놓고 우려하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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