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138)

<77화>

물론 그 순응적인 태도는 어마어마한 계약금에서 비롯되었다. 벨라가 돈이면 다 되는 유형이라는 걸 깨닫고 제이든이 얼마나 마음을 놓던지.

제이든 성격에 부탁? 그 광경을 내 두 눈으로 봤다면 아마 난 자발적으로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렸을 것이다.

어쨌든 벨라와 제이든은 하늘이 맺어 준 인연 같았다. 급하게 체결한 계약인데 어느 한쪽도 손해 보지 않았다니.

서로가 서로의 강제 결혼을 늦춰 줌과 동시에 부모의 간섭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으니 정말 잘 맞는 짝이 따로 없다. 나는 그 사기극이 부디 해피 엔딩으로 끝나길 바랐다.

무도회 준비도 착착 진행되어 어느덧 결전의 날까지 하룻밤을 남기고 있었다. 나는 굳이 식물원에 가 보지 않아도 무도회장이 얼마나 근사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내게 예지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출퇴근할 때마다 식물원 쪽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더더욱 진해져서이다.

물론 지금 내 앞에 있는 레이의 말수가 갈수록 적어진다는 것도 결정적 단서이다. 레이는 막내 직원이라는 죄로 밤낮 할 것 없이 굴려졌다.

지친 기색으로 저녁을 먹는 레이를 보자니 재정부 신입 사원일 적의 내 모습이 생각났다.

나는 레이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볼살이 조금 빠진 것도 같았다. 레이가 수프 한 숟갈을 떠먹으려다가 내 시선을 느끼곤 싱긋 웃었다.

“왜?”

지친 일상 속에서 날 바라보는 표정은 한결같이 해맑아서 기분이 묘했다. 이상하네. 쟤는 항상 저런 눈으로 날 바라봤는데, 왜 오늘따라 유난히 신경 쓰이는 것 같지?

나 자신이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평소엔 잘만 나오던 아무 소리가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레이에게 오렌지주스를 건넸다. 그의 의아하다는 눈빛을 받자 버튼이 눌린 것처럼 의식의 흐름대로 말이 튀어 나갔다.

“……아니, 목 막힐 수도 있으니까 주스도 먹으라고.”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지? 수프 먹다가 목 막힐 일이 어디 있어? 간만에 바보 같은 짓을 하니까 낯이 다 뜨거웠다.

이럴 땐 더럽게 눈치 없는 할리가 개그 하는 거냐며 깔깔거렸다. 나는 테이블 아래로 할리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

“으억!”

“나 할 일 있어서 먼저 간다.”

엄밀히 말하자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일 무도회에서 입을 옷을 다려 놔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0분이면 끝날 일을 굳이 재촉하는 이유는 방금 내가 한 행동이 이해되지 않아서일까나.

레이가 내 속도 모르고 뒤따라 나왔다. 나는 달아오른 그의 귀를 모른 척하고 물었다.

“왜?”

“혹시 이따 잠깐 나올 수 있어?”

레이는 오늘 하루 종일 그 말을 하기 위해 기다린 사람 같았다. 그가 초조한 기색으로 내 입술만 쳐다봤다.

“이따 언제?”

“10시 괜찮아?”

그런 야심한 시각에 불러내는 이유가 뭘까. 나는 레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 만면에 드리웠던 피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슬 맺힌 나뭇잎처럼 싱그러워 보였다.

어떻게 존재 자체로 끼 부릴 수 있는 거지?

“……좋아. 1층 입구에서 만나자.”

“그럼 조금 있다가 보자.”

레이가 내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씩 웃었다. 구내식당을 갑자기 영화 시상식으로 만들어 버리는 미소였다.

나는 레이의 시야에 닿지 않은 곳에 와서야 오두방정을 떨었다. 뭐야? 쟤는 왜 저렇게 웃는 거야?

***

약속 시간에 맞춰 1층에 내려가자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레이가 보였다. 나는 잠깐 멀찍이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깔끔하게 넘긴 포마드 머리가 평소와 색달라서 첫 번째로 놀랐고, 훤하게 드러난 이마도 잘생겨서 두 번째로 놀랐다. 근사하게 꾸며서 그런가? 어쩐지 예민한 인상이 풍기는 것도 같았다.

옷차림도 꽤나 신경 쓴 티가 났다. 단정하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정장이 마치 어느 나라의 숨겨진 왕자님 같아서 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날 어디로 데려갈 계획이길래 저렇게 입고 나온 거지? 미리 언질이라도 해 줬으면 조금 더 좋은 옷을 입고 나오는 건데.

나는 괜히 옷 주름을 한 번 더 펴고 레이에게 다가갔다. 레이의 어깨를 두드리려던 순간, 그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멋쩍어진 손을 내리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네 향수 냄새가 나서.”

레이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 은은한 향을 눈치채다니. 진짜 여러모로 보통이 아닌 애다.

그는 별들의 향연이 펼쳐진 바깥을 눈짓했다. 가로등을 따라 걷다가 나는 무심한 척 말했다.

“옷, 갈아입었네?”

“마음에 들어?”

“그렇다고 해 둘게.”

레이는 그 정도 말도 감지덕지라며 헤실헤실 웃음을 흘렸다. 예민한 귀족 도련님 같은 모습으로 사랑을 갈구하는 강아지처럼 구는 게 모순되면서도 이상하게 잘 어울렸다.

“근데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가 보면 알 거야.”

레이는 보물을 숨겨 놓은 아이처럼 들떠 보였다. 도대체 뭘 보여 주려고 저렇게 신났을까? 내가 기뻐할 미래를 상상하며 되레 자기가 설레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이 세계의 밤하늘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우리는 각자가 아는 별자리를 손가락으로 그리며 조곤조곤 떠들었다.

페가수스자리의 위치를 더듬는 나를 레이가 따스한 눈길로 지켜보았다. 그 눈빛이 언제나 낯설어서 나는 황급히 기억을 되살려 가을의 대사각형을 그렸다. 레이는 망설임 없이 내가 남긴 자국 위로 그의 흔적을 새겼다. 나는 조금 김빠져서 물었다.

“뭐야, 원래부터 알고 있었어?”

레이는 잠깐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근데 왜 모른 척했어?”

“네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애초에 화내려던 것도 아니었지만 힘이 쭉 빠졌다. 어디서 플러팅의 미학 같은 강의를 듣기라도 하는 건가? 왜 이렇게 거침없어?

우리는 식물원 앞에서 멈춰 섰다.

여길 왜 왔지? 나는 혼란스러워져서 물었다.

“우리한테 여기에 들어갈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거 알지?”

여기에 있다는 걸 들키면 좋은 꼴 못 볼 게 뻔해서 나는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물론 우리가 무도회장을 부수거나 망가뜨리거나 하진 않겠지만, 내일 있을 무도회에 꽤 깊숙이 관여된 나로선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찜찜했다. 하지만 레이는 믿는 구석이 있는지 자신만만했다.

“괜찮아. 나한테 열쇠가 있거든.”

“……뭐? 그래서 지금 여기에 들어가자고?”

아무도 몰래 무도회장에 침입하자는 미친 생각을 나도 아니고 무려 레이가 하다니! 우리랑 다니더니 그새 물든 걸까?

“들어 봐, 혜라. 알아본 바론 앞으로 2시간 동안 이 구역에 누가 들어올 일이 없어. 순찰 시간 꼼꼼히 확인했으니까 믿어도 돼. 무엇보다 나한텐 마지막 점검이라는 그럴듯한 핑계가 있으니까 설사 누가 온들 문제없어.”

“그 말은…….”

레이가 예의 그 얇고 가느다란 손을 내밀었다.

“나랑 춤 한 곡 출래?”

고요한 밤, 환상적인 공간 속 둘만의 무도회. 향수보다 강렬한 꽃들의 향기. 그리고 매력적인 남자. 예고 없이 찾아온 가을밤의 모험이라.

“그럼 딱 2시간만 있다가 튀자.”

***

레이는 오래전부터 오늘 일을 계획했던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꽃밭 아래에 와인과 잔 두 개가 담긴 상자를 숨겨 둘 리 없다. 레이가 와인을 따라 건넬 때 얼마나 어이없던지.

기분 좋게 취기가 오른 우리는 바닥에 누웠다. 레이는 내가 거듭 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겉옷을 깔아 주었다. 덕분에 짧은 잔디가 피부를 콕콕 찌르지 않았다.

둥근 유리 천장 너머로 우리가 경쟁하듯 읊었던 별자리들이 한눈에 보였다. 레이가 튼 마법 오르골은 잔잔한 선율을 노래했고, 간간이 풀벌레가 찌르르 울었다.

다소 쌀쌀했던 바깥과 다르게 온실 안은 불꽃 덕분에 아늑한 온기가 돌았다.

이 순간이 영원히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내심 소망할 정도로 모든 게 완벽했다. 나는 옆으로 돌아누워 레이를 빤히 응시했다. 그는 한참 전부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주친 눈이 반달을 그렸다.

그 습관적인 웃음이 보기 좋다고, 나는 무심코 생각했다.

우리는 한참 동안 서로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레이의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놀랍도록 푸르러서 매료되는 느낌이 있었다. ……어쩌면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도 그런 걸까? 아니면 외모에 홀린 것에 불과한 걸까?

나는 묘한 분위기가 멋쩍어서 벌떡 일어나 레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 춤 잘 못 추는 데 괜찮아?”

“괜찮아. 내가 잘 춰.”

우리는 가깝게 밀착하고 천천히 스텝을 밟았다. 나는 레이를 믿고 긴장을 풀었다. 잘 춘다는 말은 허세가 아니었다.

아카데미에서 고작 2년 배웠을 사교댄스였다. 하지만 레이는 여느 귀족 도련님이 그렇듯 주저함이 없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런 춤을 춰 본 사람 같았다.

“헉, 미안.”

딴생각을 하다가 레이의 발을 밟아 버렸다. 굽 없는 단화를 신고 와서 천만다행이었다. 레이는 괜찮다며 웃어넘겼다.

내가 두 번, 세 번, 어쩌면 그 이상 발을 밟아도 웃어넘길 수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런데 진짜로 그럴 것 같아서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아, 나 진짜 오늘 왜 이러냐. 적당히 취한 게 아니라 만취한 건가?

나는 레이의 리드에 따라 짧게 턴을 돌았다가 다시 그의 어깨를 잡았다. 레이가 잘했다는 듯이 눈웃음을 지었다.

꿈같은 풍경을 배경으로 저런 눈빛을 짓는 건 반칙이다. 나는 지금 느끼는 울렁거림이 분위기에 취한 것인지, 아니면 레이한테 호감을 갖기 시작했다는 증거인지 알 수 없었다.

“있잖아.”

음악은 이제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은 머릿속에서 뒤엉켜 명료한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응, 듣고 있어.”

박자가 점점 느려짐에 따라 레이와 눈을 마주하는 시간도 길어졌다. 나는 고작 춤 한번 추자고 레이가 언제부터 경비원 동선을 조사하고 계획을 짰을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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