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138)

<75화>

다만 다른 점이라고 하면, 일반 망원경보다 길이가 훨씬 짧고, 옆면에 열고 닫을 수 있는 조그만 덮개가 있다는 것이다. 포스터만 봐선 도대체 저걸로 어떻게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헤치고 가까스로 가게에 들어왔다. 휴, 왕년에 스탠딩 좀 뛰어 본 짬밥을 여기서 발휘하네.

소란스러운 바깥과 달리 내부는 조용했다. 마법 도구의 가격이 일반 서민의 월급으로는 턱도 없이 비싼 탓이다.

나는 고요한 분위기에 만족하며 천천히 가게를 둘러보았다. 가끔씩 시내에 나올 때 어쩌다 한 번 지나치긴 했지만 실제로 방문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어두운 주홍빛 조명이 고급스러운 원목 인테리어와 잘 어울렸다. 나무 선반 위로 가지런히 진열된 마법 상품도 클리셰적이라 만족스러웠다.

나는 스크롤 코너에 가서 쓸 만한 게 있나 살펴보았다. 얼마 전 내가 썼던 공격 스크롤도 있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값이 더 나가서 깜짝 놀랐다.

애정이 값으로 환산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만약 할 수 있다면 레이의 마음은 미지수일 거라고 생각했다. 거기까지 사고가 닿으니 문득 목구멍이 간지러웠다.

나는 괜히 좌우를 둘러보고 살며시 스크롤을 내려놓았다. 그때 위층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말은 바로 하자. 누가 졸졸 쫓아온 거지?”

맞다, 여기 네 가게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위를 바라보았다. 에단이 대단한 장난을 앞둔 악동처럼 눈을 빛내었다.

“왜 답이 없어?”

“기억 구현기 보러온 거거든? 네가 아니라.”

에단이 ‘정말?’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침묵으로 대신 답했다. 그러자 갑자기 에단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별안간 눈앞에서 튀어나왔다. 당연히 놀란 나는 뒤로 자빠졌다.

“으악!”

에단이 이상한 사람 보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손은 내밀어 주는 걸 보니 완전히 인성이 망하진 않았나 보다. 나는 그의 손을 마다하고 스스로 일어섰다. 에단이 뻘쭘해진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너 진짜 특이하다.”

“뭐래, 예고도 없이 순간 이동하면 놀라는 게 정상이거든?”

“아니, 그거 말고.”

그럼 뭐. 나는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털면서 에단을 째려보았다.

“왜 그렇게 편하게 굴지?”

“엥?”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겁 없이 구는 사람은 신시아 이후로 처음이야.”

눈치 주려는 의도가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궁금한 것 같았다. 나는 기가 차서 이마를 짚었다. 뭐야 지금? 나한테 내숭 안 떨고 털털한 여자는 오랜만이다, 뭐 이런 거야?

“설마 나한테 반한 건 아니지? 그럼 좀 곤란한데…….”

“내가 뭘 어쨌다고?”

에단은 필요 이상으로 정색했다. 뭔 농담을 저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인담? 나는 다 귀찮아져서 손을 내저었다.

“하……. 그냥 기억 구현기 설명이나 해 주라.”

에단이 전시용 기억 구현기를 집어 들고 옆면의 덮개를 열자 둥근 구멍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는 카운터 위 조그만 상자에서 유리구슬 하나를 꺼냈다. 눈물을 형상화한 것처럼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구슬이었다.

저게 뭘 어쩐다는 거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단은 묘하게 들뜬 어조로 설명했다.

“이 구슬에는 복잡한 마법이 걸려 있어. 말해도 이해 못 할 게 뻔하니까 설명은 건너뛸게.”

“그래.”

어휴, 다행이다. 언젠가 재미 삼아 마법 기본 이론서를 읽어 본 적 있는데 머리털 나고 그렇게 어려운 책은 처음 봤다.

“사용 방법은 간단해. 구슬을 넣고 크기를 조정한 다음.”

에단이 구현기 바깥을 감싼 톱니바퀴 모양의 링을 돌렸다. 드르륵거리는 소리가 나며 링 위에 새겨진 숫자가 점점 커졌다. 에단은 7에서 멈췄다.

“이 버튼을 눌러 주면 돼.”

덮개 반대쪽에 작은 버튼이 있었다. 버튼 위로 음각된 태양의 형상이 유니크해 보였다. 내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자 에단이 도로 구슬을 빼서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나는 점원이 빠릿빠릿하게 물건 정리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불쑥 든 의문에 에단을 바라보았다.

“그럼 사진은? 버튼 누르면 구슬이 사진으로 나와?”

“그럴 리가. 구슬은 그저 그 순간을 잡아채 줄 수단에 불과해. 인화하려면 여기서 해야 하고.”

에단이 카운터 옆에 있는 커다란 기계를 눈짓했다. 프린트처럼 생긴 기계 위에 여러 개의 구멍이 뚫려있었다. 딱 구슬이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매번 인화하러 오기 귀찮긴 하겠지만 사진을 찍을 수만 있다면 그 정도야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자, 이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할 차례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그래서 얼마야?”

“900골드.”

“900골드?!”

마법 상점의 악명을 질리도록 들어서 알고 있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제값 다 주고 사기엔 아무리 내가 월급을 많이 받는다 해도 너무 부담스러웠다. 하, 어쩔 수 없군.

“……지금 말고 나중에 사러 올게.”

나는 힘이 쭉 빠진 상태로 가게를 나왔다. 돈 많이 벌자, 혜라야.

***

과금 소비에 실패한 나를 위로하고자 한 신의 작은 선물이었을까? 우편함에 대놓고 수상해 보이는 서류 봉투가 있었다. ‘영원한 비밀’로부터 온 것이었다.

나는 저녁도 포기하고 밤새도록 서류를 읽었다. 엄청난 페이지를 보니 제이든을 설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합법적인 선 안에서 조사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나는 전혀 몰랐던 귀족들의 비밀을 차근차근 읽으며 신중하게 최종 후보를 고심했다. 하지만 읽어야 할 양이 줄어들수록 나는 참담함을 느꼈다.

짜고 치는 게 아니고서야 어쩜 그리들 문제가 많을 수 있지?

꾸준히 순위권에 있던 에스핀 베이커는 심각한 허언증이 있질 않나, 평범하다 생각했던 플로렌스 터너는 알고 보니 마약 중독자이질 않나, 마지막 희망이라 여겼던 도로시 샌더스는 발연기의 대가이질 않나…….

나는 마지막 후보의 서류를 읽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제이든이 날 죽일 거야.”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버둥거렸다. 고작 한 명 남았는데 귀납적 결론에 따르면 걔도 그다지 좋은 후보일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돌려 눕고 하얀 천장을 멍하니 응시했다.

‘……하, 그래도 해야지.’

나는 의욕 없이 글을 훑었다. 수없이 후보 순위를 바꿀 때도 언제나 최하위권에 머물렀던 벨라 디아즈였다.

어쩌면 아로네보다도 평판이 안 좋은 여자다. 부모에게 반항하는 건 숨 쉬듯 쉽고, 마약과 담배는 거의 주식이며, 유흥가를 제집처럼 들락거리는 최악의 인간.

황후가 왜 벨라를 초대했는지 의문이다. 벼락 맞을 확률이라도 간절했던 걸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기대할 만한 사람한테 기대를 해야……. 헐? 헐!”

나는 너무 기뻐서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벨라는 장점보다 단점이 훨씬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를 선택해야만 하는 이유가 방금 생겼다.

마지막 페이지의 마지막 문장. 다소 특이한 필체는 말했다. 나는 감격하며 다시 한번 읽었다.

“벨라 디아즈는 동성애자이다.”

그보다 완벽한 ‘계약 연애’ 상대는 없을 것이다.

***

무도회까지는 일주일 남짓 남았다. 가짜 연애 계약을 맺으려면 무조건 이번 주 안에 끝내야 했다. 그래서 제이든은 여느 때보다 신중하게 보고서를 살폈다.

하나는 길드가 보내 준 벨라의 신상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내가 쓴 ‘벨라와 계약해야 하는 이유 일곱 가지’이다.

첫 번째, 벨라는 절대 제이든을 좋아할 일 없다.

두 번째, 애초에 벨라는 부모님과 사이가 무척 안 좋기 때문에 타인에게 휘둘려 원치 않는 결혼을 할 리 없다.

세 번째, 벨라의 계속된 일탈에 화가 난 부모님은 벨라를 아무에게나 시집보내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다.

네 번째, 벨라에겐 공교롭게도 그 남편 후보들은 모두 치명적인 결점을 갖고 있다. 조금 있으면 할아버지라고 불릴 나이거나 머리숱이 없거나 폭력적인 성격이거나…….

다섯 번째, 용돈 끊긴 벨라는 현재 귀족답지 않게 곤궁한 삶을 살고 있다. 물론 그 곤궁한 삶이라고 하면 그의 주식과도 같았던 담배와 마약을 강제적으로 끊었다는 게 전부지만.

여섯 번째, 마약 안 한 척 연기하는 실력이 아주 수준급이다. 제이든과 함께 대국민 사기극을 벌일 역량이 충분하단 뜻이다.

그리고 마지막, 벨라는 부모님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것도 아주 멀리.

세상은 돈으로 회유할 수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나뉜다. 벨라는 무조건 회유당할 사람이었다. 부모님을 피해 멀리 떠나려면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하고, 지금 그에겐 그런 돈을 얻을 만한 수단이 없으니까.

제이든이 어쩐지 착잡한 표정으로 서류를 내려놓았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어때요, 완벽하죠?”

“결점투성이인 여자지만. 그래. 벨라 디아즈보다 나은 상대는 없을 것 같군.”

예스. 나는 등 뒤로 주먹을 쥐었다.

“날짜는 언제로 잡을까요?”

제이든이 초조한 듯 책상 위로 손가락을 두드렸다. 짧은 고민 끝에 그가 말했다.

“이틀 뒤. 장소는 내 비밀 별장으로 하지.”

세상에, 말로만 듣던 비밀 별장! 나는 발랄하게 말했다.

“그럼 디아즈 영애한텐 마차 보내 준다고 할게요.”

“그래, 입단속 철저히 시키고 우리 쪽 신원은 밝히지 마.”

“당연하죠.”

나는 찡긋 윙크를 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편지를 쓰려고 깃펜에 잉크를 적시니 갑자기 방금 전의 제이든 표정이 떠올랐다.

그 찰나의 환멸감. 오랫동안 꽁꽁 숨기고 있던 저택이었을 텐데 어쩔 수 없이 오픈할 정도면 정략결혼이 정말 싫은가 봐?

“하긴.”

나도 모르게 수긍하고 말았다. 아무리 황태자일지언정 고작 열아홉 살이 떠안기에는 너무 큰 짐이 아닐까? 제이든에게 아주 조금의 연민이 들었다. 그의 만행이 곧바로 전두엽을 스쳐서 금세 사그라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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