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만약 내 인생 장르가 순정 만화였다면 여기서 에단에게 흥미를 느끼며 피식 소리 나는 웃음 한 번 흘려 줬을 테다.
그러면 정말 재미있었을 텐데 진짜 모르겠다는 표정을 보니 모든 의욕이 사라져서 나는 힘없이 손을 내저었다.
“됐다. 나는, 아니, 그게 아니라 저는…….”
새삼스레 나보다 어린 애한테 꼬박꼬박 존댓말 하는 게 환멸스러웠다. 아니, 면전에서 내 그림을 비웃은 애한테까지 격식을 차려 줘야 하나? 이제 난 아무것도 없는 평민이 아니라 그래도 나름 황태자 보좌관인데?
“이중인격자야? 하나만 해.”
와! 필터링 없이 말하네, 얘.
에단이 나와 데네브를 섞어 놓은 것 같다는 말이 왜 지금 떠오르는 건지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그 비유를 이해하고 싶진 않았는데. 나는 묘한 경쟁의식을 느끼며 도전적으로 말했다.
“내 이름은 혜라야. 아로네의 친구이자 상점 개업을 도와줄 조력자이지. 황태자 보좌관이라 불리기도 하고.”
이제야 에단은 우리가 어디서 처음 봤었는지 기억해 냈다.
“아, 전에 신시아가 소개했던 애?”
“신시아가 내 얘기 많이 했다며. 그 애 말을 잘 귀담아듣지 않았나 봐?”
나는 슬쩍 에단의 눈치를 보았다. 의외로 에단은 정말로 내 말투를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마탑 소속일지언정 본디 귀족 태생이라 이런 거에 엄격할 줄 알았는데. 역시 어딜 가든 예외는 있나 봐.
덕분에 나는 더욱 편해져서 거만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에단이 권태롭게 눈을 감았다 떴다.
“내가 궁금한 건 신시아였지, 별 이름도 이상한 여자애가 아니었거든. “
“저기요. 그 이름 이상한 애가 나인 건 알고 하는 소리지?”
“이젠 다 상관없어졌지만.”
애초에 에단은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오묘한 남색 눈동자가 누군가를 그리며 그리움의 빛을 띠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아로네를 쳐다보았다. 아로네가 텔레파시를 보냈다. ‘쟤 지금 뭐 하는 거야?’ 나는 답했다.
“얘 지금 완전 구남친 모드인데?”
……헉.
아로네가 눈을 크게 뜨고 날 쳐다봤고, 나는 내가 육성으로 속마음을 내뱉었다는 걸 깨달았다. 와장창 깨진 감성의 파편 속에서 에단이 겨우 빠져나왔다. 그리고 서늘한 목소리.
“뭐?”
나는 입을 틀어막고 아로네에게 구조 요청을 보냈다. 에단이 나를 무감정하게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멋대로 생각하지 마.”
“미안.”
오케이, 여기에도 아직 실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있군. 나는 에단을 외면하고 한참 방치되었던 내 소중한 스케치북을 집어 들었다.
“내 그림이 이해받지 못한 건 너무 슬프지만, 난 몇 세기 뒤에 태어났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에단은 내가 농담하는 줄 알고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하지만 나와 아로네는 그게 진담이라는 걸 알지 않은가? 조용한 분위기에 당황한 에단이 괜히 딴청을 피웠다.
나는 약 팔러 온 장수처럼 친절하게 말했다.
“자, 그럼 어떤 것부터 설명해 줄까?”
“음, 이거?”
아로네가 플리츠스커트를 가리켰다. 아니, 내 희대의 역작을 이해 못 했다고?
“왜 우산에 주름 나 있잖아. 그 주름을 스커트에 접목시킨 거야.”
“우산에 난 주름이라고? 난 또 피아노를 그린 줄 알았네.”
에단이 대놓고 즐거워하며 말했다. 웃는 얼굴에 침 뱉기 어렵다지만 그게 에단이라면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나는 험한 말이 튀어나오려는 입술을 집게손가락으로 잡고 방금 내가 한 말실수를 떠올렸다. 그래, 이 정도 시비는 참을 만하지. 아로네가 황급히 다른 페이지를 펼쳤다.
“그럼 이거는? 외투라고 짐작하긴 했는데 디자인이 좀 난해해서.”
내가 그린 건 하얀색 롱 패딩이었다. 에단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외투? 애벌레가 아니라?”
“방해 안 한다며.”
아로네가 인상을 쓰고 에단에게 주의를 주었다. 에단이 눈썹을 씰룩이곤 말없이 소파에 기댔다.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입으로만 하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그 뒤로도 에단은 죽은 듯이 존재하며 우리의 대화를 가만히 들었다.
아로네와의 열렬한 토의가 끝난 후, 에단은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참신한 사업 아이템 같다고 나름 칭찬을 건넸다. 그 쿨한 태도에서 내 그림에 끼얹은 이죽임이 나름의 복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브 앤 테이크라 이거지? 만약 나라면 두 배로 돌려줬을 텐데 내가 진심으로 화내기 전에 그만두다니. 어쩐지 에단에 대한 평가가 조금 수정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에단은 나와 데네브의 혼합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강혜라(데네브 향 첨가 20%)에 더 가까웠다. 어쩌면 그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아주 잠깐 동안.
***
아로네가 내 개떡 같은 설명도 찰떡같이 알아들어 준 덕분에 생각했던 것보다 해야 할 일이 빨리 끝났다.
나는 간략한 의상점 구조 설명을 들은 후 가벼운 발걸음으로 문을 나섰다.
나는 조금 더 오래 있다 가고 싶었지만 아로네는 개업까지 최대한 옷을 많이 만들어 둬야 했기 때문에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다.
간만에 시내에 나왔는데 바로 숙소로 돌아가기 아쉬워서 내키는 대로 걸었다. 그런데 내 옆에 이놈은 왜 날 따라오는 걸까? 조용히 햇살을 만끽하고 싶었는데 경국지색 에단 때문에 다 망했다.
나는 홱 고개를 돌리고 에단을 흘겼다.
“도대체 뭐야?”
“내가 뭘?”
“뭐기는. 왜 내 뒤를 졸졸 쫓아오냐 이거야.”
“내가? 널 졸졸 쫓아가?”
에단은 듣는 사람이 무안해질 정도로 크게 웃었다. 세상에, 설마 나 자의식 과잉한 거야? 에단이 눈물을 훔치고 말했다. 듣기 좋은 중저음 목소리에 아직도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기대했다면 미안한데, 이 거리 끝에 내 가게가 있어서.”
에단이 거만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주에 망신살이 꼈나. 어쩜 이렇게 쪽팔릴 수가.
에단은 수치심에 죽으려고 하는 나를 지나쳐 걸었다. 다시 되새김질해도 어이없는지 에단이 피식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꽂혔다.
“……하.”
그래, 이 자리에 아로네가 없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자. 나는 몸을 부르르 떨고 에단의 발자취를 그대로 밟았다.
스트레스도 풀 겸 두 블록만 더 가면 있는 디저트 가게에 들를 생각이었다. 치즈케이크 한 판을 사서 나 혼자 다 먹어야지.
참, 아로네 개업 선물도 준비해 놔야 하는데 뭘 사야 할까. 장신구? 품질 좋은 재봉틀? 사업을 하는 친구는 아로네가 처음이라 어떤 걸 선물해야 좋을지 고민이 많이 되었다.
가장 좋은 건 거물 손님을 물어다 주는 거지만, 나는 까치가 아니니까 그냥 무난하게 액세서리를 사 주자.
“좋았어. 기왕 사는 김에 기깔 나는 걸로 준비해야지.”
당차게 다짐하는 순간, 내 단골 가게에 도착했다. 유리창 너머 진열된 오늘의 케이크를 보자니 군침이 싹 돌았다. 저건 무조건 사야 해. 나는 굳게 결심하며 문을 열었다.
딸랑. 청아한 종소리가 울리고, 익숙한 낯의 점원이 천막을 걷고 주방에서 나왔다. 올리비아가 화색을 띠고 인사를 건넸다.
“혜라! 오랜만이네!”
“아, 언니. 그동안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나는 쓰러지듯 카운터에 몸을 기댔다. 올리비아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팩트 폭력을 날렸다.
“빈말은? 내가 아니라 내가 만든 케이크가 보고 싶었던 거잖아.”
“힛, 들켰다.”
“하여간. 참, 방금 구운 건데 한번 먹어 봐.”
나는 올리비아가 건네준 피넛 쿠키 한 조각을 베어 물었다. 갓 구운 쿠키는 언제나 진리였다. 내가 엄지를 치켜들자 올리비아는 기분 좋아져서 호호 웃었다. 나는 쿠키 하나를 더 집어 들며 말했다.
“오늘의 케이크는 뭐야? 처음 보는 종류인 거 같은데.”
“그야 오늘 처음 만든 거니까. 가을을 형상화한 건데 사실 겉에 크림만 화려하지 맛은 딸기 케이크랑 똑같아.”
나는 올리비아가 자랑하듯 가져온 가을 케이크를 유심히 관찰했다. 가을의 색을 띤 크림이 유화처럼 케이크를 덮고, 그 위로 낙엽 모양의 작은 사탕들이 알알이 박혀 훌륭한 풍경을 그렸다.
“그럼 이거랑 치즈 케이크 하나씩 줘.”
“어머, 두 판이나?”
“하나는 내가 먹고, 나머지 하나는 친구들이랑 먹을 거야.”
올리비아가 만든 케이크는 그다지 달지 않으니까 어쩌면 레이 입맛에 맞을지도 몰랐다. 할리는 뭐 말할 것도 없고.
“친구들이 부럽네.”
“그치? 나 같은 애가 어디 있어.”
올리비아가 푸스스 웃고선 케이크 두 개를 포장해 줬다. 맛보기로 먹었던 피넛 쿠키도 서비스로 같이 딸려 왔다. 그게 바로 내가 이곳을 단골 가게로 삼은 이유다. 올리비아가 참 장사 잘해.
지갑은 가벼워졌지만 마음은 더없이 풍족했다. 이제 시내에서 볼일도 없었기에 마차를 잡으려는데, 방금 스쳐 지나간 사람들의 대화가 내 심금을 울렸다.
“야 들었어? 이번 마탑 신상품 대박이야.”
“뭔데 그래?”
“그것만 있으면 우리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순간을 종이 한 장으로 남길 수 있대. 이제 화가의 시대는 가 버린 거라고!”
순간 나는 케이크 상자를 떨어뜨릴 뻔했다. 내 귀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방금 그들이 말한 신상품은 카메라가 틀림없었다. 맙소사, 드디어 이 지루한 세계에도 카메라가 발명되는구나! 그게 얼마건 무조건 사야 해!
나는 마법 상점을 찾아 헐레벌떡 달렸다. 상점 앞은 소문을 듣고 구경 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나는 까치발을 들고 쇼윈도에 붙은 큼지막한 홍보 포스터를 바라보았다.
‘기억 구현기’라는 이름의 장치는 의외로 내게 익숙한 형상을 띠고 있지 않았다. 원기둥 모양의 그것은 차라리 망원경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