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나는 그대로 열쇠를 돌리려다가 불현듯 언젠가 봤던 첩보 영화를 떠올리고 침음을 삼켰다. 영화에선 문 열자마자 총 맞고 죽던데…….
“……참나, 내가 누구인 줄 알고 다짜고짜 죽이겠어?”
나는 픽 웃고선 벌컥 문을 열었다. 그리고 마주한 광경에 그만 어이가 나가 버렸다. 도대체 길드가 얼마나 크길래 또 복도가 나와?
어두운 런웨이 위로 발걸음 하나가 닿을 때마다 등불이 순차적으로 켜졌다. 긴 런웨이의 끝에는 가면을 쓴 여자가 서 있었다. 흑장미 같은 입술이 사무적으로 말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의뢰할 게 있어요.”
“앉아서 기다리시면 길드장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어처구니없어하며 반문했다.
“도대체 여기 어디에 앉을 곳이…….”
여자가 대충 손을 휘젓자 내 바로 뒤에 소파가 생겨났다. 마법사인가? 나는 점점 멀어져 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여자는 기쁜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나는 길드장에게 안내해 주겠다는 그를 따라 동굴 같은 길을 걸었다. 내일 일어나면 발바닥이 부어 있을 거라 확신했다. 의뢰하러 왔다가 도대체 얼마나 걷는 거야.
우리는 남청색 문 앞에서 멈췄다. 여자가 들어가라는 듯이 고갯짓하고선 눈 깜박이는 사이에 사라졌다.
허, 나는 헛웃음을 뱉었다. 꿈꾼 기분이었다.
몇 번째일지 문을 여니 화려한 가면을 쓴 여자가 날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의 손짓 한 번에 문이 닫히고 텅 빈 잔에 차가 따라졌다.
선혈처럼 붉은 눈동자가 사람 같지 않아서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색채가 너무 강해서 똑바로 눈을 마주 보는 게 조금 힘들었다. 빨리 끝내고 가야겠다고 다짐하던 순간, 여자가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황태자 전하의 보좌관이 여기까지 왜 왔을까?”
여기, 길드가 아니라 점집이었던 건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나는 로브를 끌어 내리며 말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
“속이고 싶어 하니 속아 줘야지. 그래서 자기는 무슨 일로 왔어? 문서 조작? 신상 조사? 뭐든 말해.”
여기 문서 조작도 해 주는 곳이었어? 나는 별의별 곳이 다 있다고 생각하며 준비해 온 리스트를 내려놓았다.
“신상 조사요.”
“어머, 꽤 많네.”
여자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 사람들의 모든 걸 알고 싶어요.”
“모든 걸이라…….”
“여기가 정보 면으로는 가장 명망 높다고 들었어요. 그러니 다른 길드와 차별화된 품질을 기대해도 되겠죠?”
여자가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날 당돌하다 여기는 것 같기도, 조금 욱한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여자의 진초록색 머리칼이 자연적으로 가능한 색인지 고민하다가 돈주머니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기한은 일주일. 대신 보수를 많이 쳐 드릴게요.”
여자가 검지로 원을 그리자 주머니가 허공 위로 떠오르더니 내용물을 책상 위로 우르르 쏟아 냈다.
금화로 이루어진 작은 산이 희미한 전등 빛을 받고 번쩍였다. 여자가 흡족한 듯 휘파람을 불었다.
“좋아. 조사 내용은 일주일 뒤 자기 주소로 보내 줄게.”
이걸로 의뢰는 끝이다. 나는 말없이 나가려다가 고개를 틀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있잖아요. 처음 보는 사이인데 아는 척하는 거 기분 나빠요. 스토킹당했다는 걸 알고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여자가 변심해서 거래를 파기할까 봐 후다닥 나가려고 했는데 그가 뜬금없는 말로 내 팔을 붙들었다.
“안타레스.”
“예?”
“그게 내 이름이야. 왠지 자기를 한 번 더 볼 거 같아서. 참, 의뢰인 신원 보장은 걱정 안 해도 돼.”
안타레스가 찡긋 윙크를 날렸다.
뭐야, 이상한 사람이야. 나는 그를 외면하고 문고리를 돌렸다.
그런데 말이다. 그때는 헛소리라 생각한 말이 자꾸 마음에 걸리는 것이 아니던가.
여자가 괜히 그런 말을 한 것 같지 않아서 침대에 누워서도 자꾸 생각났다. 진담이든 아니든, 사람 신경 쓰이게 만들 목적이었다면 성공했다고 말해 주고 싶다. 아, 오늘 잠은 텄네 텄어.
***
똑 부러지는 아로네는 결심을 한 순간부터 부지런히 움직여 벌써 의상점 내부 인테리어를 끝마친 상태였다. 진짜 부러운 추진력이었다.
나는 주말을 맞아 그의 의상점으로 향했다. 그의 가게는 핫 플레이스 중에서도 가장 중심에 위치했다. 어후, 임대 계약할 때 돈을 얼마나 썼을지 상상도 안 됐다.
외부 공사는 조금 남은 상황이었는데도 사람들은 벌써 흥미로운 시선으로 가게를 흘깃거렸다. 공기처럼 떠도는 루머는 여전했지만, 나는 그 또한 노이즈 마케팅의 일환으로 활용할 수 있을 거라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나는 아로네의 짱친이라는 특권을 갖고 있었기에 모두가 궁금해하는 가게에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텅 빈 1층을 가로질러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자 진홍빛 벨벳 소파에 앉아 있는 아로네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저게 뭐야?”
나는 여기서 마주칠 거라 생각 못 했던 얼굴을 보고 돌처럼 굳었다. 아로네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가 만면에 화색을 띠고 다가왔다.
“왔구나, 혜라.”
나는 아로네에게 딱 붙어서 속삭였다. 아직도 내 시력이 심히 의심스러웠다.
“혹시 내가 꿈꾸고 있는 건가? 왜 여기에 에단이 있어?”
“마침 그걸 묻던 참이었어.”
아로네가 못마땅하게 에단을 흘겼다. 에단은 두 여자의 강렬한 시선을 받고도 뻔뻔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민간인과 맺는 첫 번째 계약인데 어떻게 일하는지 내 두 눈으로 봐야 할 거 아니야. 왜, 자신 없어?”
나는 아로네를 바라보았다. 아로네가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에단을 노려보다가 결국 길게 한숨 쉬었다.
“좋아, 네 마음대로 해. 대신 일하는 거 방해하지 마.”
“내가 왜 그러겠어?”
에단이 머리를 쓸어 넘기고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와우.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쟤처럼 벨벳과 잘 어울리는 사람은 또 처음 보네.
“혜라!”
“……어?”
아로네가 정신 차리라며 단단히 엄포를 놓았다. 에단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가 곧 흥미를 잃고 빠르게 흩어졌다.
나는 조금 부끄러워져서 황급히 스케치북을 찾았다. 아로네가 나를 금색 테두리 장식이 멋진 테이블로 데려갔다.
나는 아로네와 에단을 앞에 두고 마치 면접 보러 온 취준생의 심정으로 스케치북을 펼쳤다. 아로네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이거야?”
나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안에는 지난 며칠간 틈날 때마다 스케치한 현대 복장 디자인이 들어있었다.
각 잡고 그리는 그림은 처음이라 연필을 들 때까지만 해도 약간 자신이 없었는데, 그리다 보니까 재미가 붙어서 나중엔 과감한 색을 사용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이 공책에는 내 예술혼이 담겨있다.
나는 잔뜩 기대하며 아로네의 표정을 살폈다. 그런데 이게 웬걸.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의외로 아로네는 혼란스러워했다. 코딱지 맛 젤리를 먹기라도 한 표정이었다. 반면 곁눈질로 같이 스케치를 구경하던 에단의 입매는 점점 호선을 그렸다.
왜 저렇게 반응이 극과 극이지? 아, 설마 여기 감성으로는 호불호가 나뉘는 디자인이라서 그런가? 그런 거라면 이해할 만했다.
나는 아로네가 충격을 가라앉힐 때까지 기다려 주며 2층 인테리어를 구경했다. 보아하니 1층에는 옷을 디피 하고, 2층에서는 주문 제작 상담 등의 보다 개인적 업무를 처리할 모양이었다.
그럼 3층은 뭐지? 나는 나중에 아로네에게 물어보자고 생각하며 시선을 멀리 두었다.
벽 한 면을 통째로 차지한 가지각색의 옷감이 언뜻 보면 커다란 팔레트 같았다.
탈의실 바로 옆에 있는 전신 거울은 아프로디테가 쓸 것처럼 신화적이면서도 화려했고, 진홍색 혹은 금색으로 깔 맞춤한 가구들에서는 고급스러운 느낌이 물씬 났다.
대리석 바닥도 반질반질하니 질이 좋은 걸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가장 시선을 잡아 끌었던 부분은 아로네 등 너머의 개인 작업실이었다. 마호가니 문 뒤를 어떻게 꾸며 놓았을지 기대되었다.
천장에 그려 넣은 그림에 시선이 닿았을 즈음, 드디어 아로네가 입을 떼었다.
“……혜라, 혹시 요즘 일이 바빴어?”
“음, 바쁘긴 했지만 그림 그릴 때는 제정신이었는데. 왜?”
아로네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뭐지? 저 상대방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 고민하는 듯한 태도는? 아로네는 고민한 것이 무색하게도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뭔데 그래? 그냥 솔직하게 얘기해.”
“그러니까……. 네 그림이 뭘 의미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
“엥? 그럴 리가.”
나는 아로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완곡하게 돌려 말했지, 사실상 너 그림 진짜 못 그린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아로네가 위로하듯 내 손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런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던 에단이 갑자기 풉 웃음을 터뜨렸다. 한번 터진 웃음은 멈출 기세도 없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가 간헐적으로 몇 개의 단어를 내뱉었다. 그걸 하나로 이어 보자면 다음과 같다.
“태어나서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그림은 처음 보네.”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저건 내 시간과 노력에 대한 도전이다.
나는 테이블을 쾅 내려쳤다. 아오, 테이블이 어찌나 단단하던지 손바닥이 알싸하게 아렸다.
나는 빨개진 손바닥을 조용히 말아 쥐고 에단을 노려보았다.
“거참 말이 너무 심하네. 거의 초면인 사람한테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거의 초면? 우리가 본 적 있었던가.”
에단이 미간을 찌푸리고 고민했다. 농담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나를 처음 봤다는 반응이었다. 뭐야 이 상황. 설마 나만 기억하고 있는 거야?
참나. 살다 살다 이런 사람을 다 보네. 날 기억 못 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다, 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