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내가 받아 본 연서 중 가장 소름 끼쳤지.”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분명 난 명단 받자마자 한번 읽어 보라며 건네줬었는데. 그때 열외인 사람을 말해 줄 순 없었던 걸까?
험한 말이 튀어 나갈 것 같아서 이를 악물었다. 나는 명단 사본을 제이든에게 들이밀고 또박또박 말했다.
“그럼 여기에 줄 그어 주세요. 계약하기 싫은 사람이요.”
“그러지.”
제이든이 소리 지르고 싶을 정도로 산뜻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소리 지르고 싶었다는 말은 당연하게도 좋은 의미가 아니다.
제이든은 허파가 뚫린 사람처럼 자꾸만 피식거렸다. 거기서 제이든이 처음부터 날 놀릴 작정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참나, 요즘 데네브랑 안 싸우니까 그 자리를 쟤가 꿰차네?
상냥한 제이든이 그어 준 수많은 선 덕분에 후보는 더욱 줄었다. 그 말은 즉, 후보의 측근에 먹일 뇌물 또한 줄었다는 뜻이다.
정보 제공을 대가로 여기저기 뇌물을 뿌리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후보들의 순위를 바꾸었다. 그러는 사이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가 소득 없이 나오는 횟수도 어느새 다섯 손가락을 넘었다. ……쓸데없이 깐깐한 놈.
그리고 드디어 오늘. 나는 특단의 조치를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저 가문의 사용인들을 매수하는 것으론 충분하지 않다. 제이든이 단 하나의 오차도 없는 보고서를 원하니 결국 최후의 수단을 쓸 수밖에 없겠군.
나는 잊고 지냈던 한 소년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의 근황을 접했을 때도 그랬지만 여전히 로빈의 얼굴이 자세히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오래전이라 그런가?
그런데 지금 그런 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로빈이 나한테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말지가 중요하지.
나는 조금 참담한 심정으로 깃펜을 적셨다. 펜촉은 망설임 없이 아는 길드가 있냐는 글을 써 내려갔다.
범죄 소굴이라는 이노피아에서 살았으니 아무렴 길드 하나쯤은 알지 않을까?
나보다 한참 어린아이한테 불법 길드에 대한 정보를 묻다니. 어른으로서 죄책감이 들었지만 몇 번째일지도 모를 퇴짜를 받으니 이렇게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그러니까 다 제이든 때문이다.
***
“오래 기다렸어?”
나는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끝마쳐야 하는 일이 있어서 약속 시간을 오버하고 말았다. 내 앞의 인물은 조금 늦은 것 정도야 아무 문제 안 된다는 듯 빙긋 웃었다.
“그다지. 기쁜 마음으로 기다렸으니까 너무 미안해 마.”
며칠 사이에 아로네는 환골탈태한 것 같았다. 특유의 차가운 분위기가 걷히고 드리운 여유로움이 보기 좋았다. 나는 빨리 본론에 들어가고 싶어서 몸을 들썩였다.
그러나 노크 소리와 함께 군침 도는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워서 이야기를 듣는 건 조금 뒤로 미루기로 했다.
웨이터는 신속하게 음식을 세팅하고 나갔다. 커다란 테이블을 빼곡하게 메운 다양한 음식이 마치 우리만을 위한 작은 뷔페 같아서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아로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일단 먹자.”
나는 가장 먼저 랍스터 다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오동통하게 꽉 찬 속을 보자니 이거 하나만 먹어도 배부를 것 같았다. 물론 나는 고작 이 정도로 배부를 만큼 나약하지 않지만.
어색하지 않은 정적 속에서 우리는 한동안 식기만 움직였다. 그 침묵은 회피가 아니었다. 아로네는 그저 말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고, 나는 그를 존중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디저트가 나왔을 무렵, 우리 모두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나는 태연하게 레몬 셔벗을 떠먹다가 아로네가 날린 폭탄을 맞고 그만 수저를 떨어뜨렸다.
“나, 사업 하나 하려고.”
쨍그랑. 신경을 거슬리는 소음이 울렸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로네가 사업?
“……무슨, 무슨 사업?”
아로네가 차 한 모금을 마시고 여상하게 말했다.
“전에 네가 그랬었잖아. 네 세계와 달리 이곳은 일상용 바지가 없어서 불편하다고.”
“그랬었지…….”
“그래서 내가 한번 만들어 보려고. 그 바지.”
어쩜 저런 훌륭한 생각을 다 했을까? 나는 벌떡 일어나서 짝짝 박수를 쳤다. 아로네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우아하게 내 찬사에 화답했다.
손바닥이 불나도록 박수를 치고 다시 자리에 앉으니 문득 귀족 사회의 금기가 떠올랐다.
제이든을 따라다니며 자연스럽게 알게 된 그 금기는 귀족은 사업 따위의 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귀족은 평민을 다스리지, 결코 타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사업을 하지 않는다. 불문율과도 같은 그 풍조는 몇백 년 동안 깨지지 않았다.
물론 빈곤한 하급 귀족 중 몇몇은 생계가 힘들어 어쩔 수 없이 사업에 뛰어들었다지만 애초에 상급 귀족들에게 그런 급 낮은 것들은 같은 귀족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로네는 평범한 귀족도 아니고 무려 공녀다. 아로네가 사업을 하겠다고 선언하면 그 반향이 얼마나 클지 선명하게 그려졌다. 게다가 얼마 전 스캔들도 아직 가라앉지 않았는데, 아로네 멘탈이 정말 괜찮을까?
지난 며칠간 나는 겉옷을 몇 겹씩이나 껴입고 한여름을 보내는 기분이었다. 한마디로 겁나 답답했다. 그래서 나는 재차 물을 수밖에 없었다.
“감당할 수 있겠어?”
그 일곱 글자 안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지 피차 알았다. 우리는 한참 동안 시선의 끝을 맞댔다. 초침마저 멈춘 순간 속, 나는 생각했다.
사람들은 더욱 신나서 네 이름을 떠들어 댈 거야. 네가 행하는 모든 일들은 잘게 분해되어 전문가라 쓰고 안티라 읽는 이들에게 낱낱이 평가되겠지.
이게 정말 맞는 결정일까? 스스로에게 묻는 순간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찾아올 거야. 부담감을 이기고 옳은 결정을 하려면 목표가 확고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개척자의 인생은 고단한 법이니까. 너도 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로네는 보란 듯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당연하지.”
잘 벼린 신념과 희망으로 가득 찬 제비꽃 눈동자가 눈부시게 빛났다. 확실히 아로네는 달라졌다고,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번데기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어 자유로이 하늘을 누비듯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
“넌 정말 멋진 아이야.”
아직 아로네의 계획을 듣지 않았음에도 그 애가 잘되리라는 당연한 확신이 들었다. 아로네가 푸스스 웃으며 살짝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턱을 괴고 물었다.
“그래서, 사업 계획은 어떻게 돼?”
아로네는 대수롭지 않은 것을 말할 때 으레 그러듯 무심하게 툭 던졌다.
“파혼 계약금으로 받은 걸 초기 자본으로 쓸 거야. 모자라는 돈은 장신구를 팔아서 마련할 거고, 가문의 돈은 일절 안 쓸 거야.”
“훌륭한 생각이야. 이왕 할 거면 확실하게 홀로서는 게 좋지.”
“그리고 디자인은 내가 직접 할 건데, 네 도움이 좀 필요할 거 같아.”
나는 아로네의 말뜻을 이해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내 세계의 옷차림이 어땠는지 알려 달라는 말이지?”
“응. 네가 두고 온 것들 중 하나라도 되돌려 주고 싶어.”
“세상에, 아로네…….”
나는 몹시 감동받아서 눈물 훔치듯 눈가를 쓸었다. 묻어 나오는 것은 없었지만 내 연극적인 제스처에 아로네가 피식 웃었다.
“근데 그럼…… 직원은 따로 안 둬? 물론 나는 최선을 다해서 개업 준비를 도와줄 거지만 그래도 인력이 너무 달릴 거 같은데.”
“맞아. 그래서 베키와 루나를 직원으로 고용하려 해. 몰랐는데 그 애들, 꽤나 재봉 솜씨가 좋더라고.”
“와, 걔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너한테 예쁨 좀 샀나 보네?”
전에는 꿈도 못 꿨던 그들 간의 신뢰가 흐뭇해서 나는 실실 웃었다. 아로네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 고해하듯 털어놓았다.
“또 있어. 에단도 나를 조금 도와줄 거야.”
“뭐?”
내가 잠깐 졸았던 건가? 나는 귀 옆으로 손바닥을 활짝 펼치고 의심스럽게 물었다.
“뭐라고?”
“에단이랑 거래를 했어. 마녀 혼혈인 날 연구하게 해 주는 대가로 기능성 옷을 만들 때 필요한 마법사 몇 명을 보내 주기로.”
너무 당황스러운 소식이라 할 말을 잃었다.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귀결되는 깨달음은 아로네가 이 사업에 사활을 걸었다는 것이다.
잘 해내겠다는 의지가 도리어 태풍을 불러들인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일순 들었다.
“걔랑 별로 사이 안 좋잖아. 괜찮은 계약인 거 맞아?”
“맞아, 안 좋았지. 따지고 보면 지금도 딱히 호의적인 관계는 아니야. 근데 에단은 다루기 어려운 것에 비해 가진 게 많아서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 역시나 장난감 하나 던져 주니까 물더라고.”
마녀 혼혈이라는 걸 장난감이라 치부하다니. 나는 아로네의 냉정함에 감탄했다. 확실히 못 본 며칠 간 아로네가 정신적으로 많이 성장한 것 같았다.
“에단 걔 생각보다 멍청한가 보네.”
“그렇다기보다는 시기가 좋았어. 마침 그 애, 감쪽같이 사라진 신시아 덕분에 또다시 권태에 시달리던 차였거든. 호기심이 과하게 많아서 마녀 혼혈을 연구할 생각에 과거의 악연도 뒤로 미뤄 뒀을걸.”
“하지만 나중에 걔가 널 신고라도 하면 어떡해?”
“그럴 일 없어. 그 애가 불량하고 거침없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사람 하나를 죽음으로 내몰 만큼 악하진 않거든.”
마치 미래를 보고 오기라도 한 양 확신에 찬 태도를 보자니 나도 그 자신감에 감화되었다.
그래, 아로네가 얼마나 똑똑한데 알아서 하겠지. 내가 할 일은 아로네가 도움을 요청할 때 달려가는 거다.
흠, 마차 탄 강혜라라. 꽤 마음에 드는데?
***
여느 때와 같이 할리와 레이와 함께 밥을 먹고 식당을 나오는데 레이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오랜만에 산책할래? 그동안 바빠서 밥도 같이 몇 번 못 먹었잖아.”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