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138)

<66화>

“네 일기장을 주고, 우리의 세계를 잇고, 날 여기로 보낸 사람은 모두 동일 인물이야. 이 세계에 오던 날, 그가 내게 물었어. 네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겠냐고. 그래. 네 어머니가 나한테 부탁했고, 나는 기꺼이 수락했어. 그래서 우리가 만날 수 있었던 거야.”

“네 말은…… 내 친어머니가 마녀라고?”

아로네는 슬픔도 잠시 잊고 넋 나간 채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는 뜻밖의 진실을 알게 되었던 그날을 떠올렸다.

공작은 아로네가 공작 부인을 죽였다고 확신했다. 아마 아로네의 친모가 마녀라는 것을 알고 있던 거겠지.

마녀가 공작 부인에게 저주라도 내렸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래서 세상에서 사라진 여자가 아닌, 그의 산물인 아로네를 대신 탓했던 걸까?

하지만 공작 부인은 적어도 아로네가 네 살이 될 때까지 멀쩡히 살아 있었다. 그리고 마녀가 정말 누군가를 벌하고 싶었다면 그 대상은 공작 부인이 아니라 공작이었을 것이다.

그때도 생각했었지만 차라리 우울증으로 속이 곪아 죽었다는 가설이 더 그럴듯하다. 나는 불확실한 말 대신 확신할 수 있는 말을 했다.

불행한 유년 시절이 운명이었다고 생각하는 애한테 널 위했던 사람이 분명 있었다고 말해 줘야 했다.

“그래. 너한테 직접 갈 수 없으니까 날 대신 보낸 거야. 비록 그는 소위 말하는 귀한 혈통도 아니고, 너와 같은 하늘 아래에 서 있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어머니는 언제나 널 아끼고 사랑했던 거야. 난 알아. 왜냐면 내게 부탁하던 그 목소리에는 절실함이 어려 있었거든. 그러니까 아로네, 넌 완전히 혼자가 아니었어.”

나는 머리가 하얗게 세고 등이 굽어 있던 노인을 떠올렸다. 어떤 연유로 그가 아로네와 닿지 못하고 내 세계로 왔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한정적이고 그조차 별거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 작은 단서가 아로네에게 앞으로 나아갈 힘이 되어 줄 거라고 감히 믿었다.

“그러니까 외로웠던 과거의 원인이 너나 너희 엄마한테 있다고 생각하지 마. 공작이 네게 매정했던 건 그냥 그 인간 성격이 글러 먹어서 그래. 네가 데네브처럼 완전무결한 피를 타고나지 않아서가 아니야. 네 엄마가 하녀여서도 아니고, 공작 부인이 죽어서도 아니야.”

내가 아로네 옆에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분이 날 여기로 보내 주지 않았다면 아마 아로네는 발버둥 한 번 못 치고 단숨에 무너졌겠지.

“공작 부인이 죽은 건 네 탓이 아니야. 정말 잘못한 건 공작이지.”

나는 잠시 말을 골랐다. 아로네는 더 이상 울 기력도 없다는 듯 잔뜩 지친 얼굴을 했다.

“어떤 단어가 널 규정하느냐, 그게 너한테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알아. 사람들은 재미있다며 네 얘기를 밖으로 나르겠지. 그러니 그럴 때일수록 더욱 기억해야 해. 원래 사람들은 불행에 열광해. 그리고 금방 새로운 화젯거리로 갈아탈 거야. 어차피 너한테 중요한 사람들도 아니잖아. 우리 가치 없는 것들에 신경 쓰지 말자.”

“그런다 한들 사생아인 줄도 모르고 온갖 잘난 척했던 공녀라는 별칭이 사라지는 게 아니잖아.”

아로네가 목이 졸린 듯한 소리를 내었다. 모든 걸 포기한 자 특유의 무력함이 그의 주위를 아른거렸다. 나는 부러 극적으로 말했다.

“새로운 별명으로 덮으면 돼. 아주 좋은 걸로.”

“……불가능해. 그리고 나는 사교계에서 매장당하겠지.”

“아니, 가능해.”

“네가 어떻게 알아?”

아로네가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그러나 흔들리는 동공은 희망을 갈구하고 있었다. 나는 산발이 된 아로네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며 말했다.

“처음 네 일기를 읽었을 때까지만 해도 난 네가 제이든과 파혼할 거라 생각도 못 했어. 하지만 넌 해냈지. 또 네가 정령술에 대한 열등감을 미술로 해소할 거라는 생각? 전혀 못 했어. 하지만 넌 또다시 해냈지. 아로네,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아?”

아로네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저었다.

“넌 이미 방법을 알고 있어. 그저 계기가 필요했던 거지. 아로네, 너한텐 불운을 이겨 내는 재능이 있어. 내가 지금까지 봐 온 너는 이 시련도 훌륭하게 이겨 낼 거야. 물론 그 옆엔 내가 있을 거고. 민칠론도 신경 쓸 필요 없어. 결혼하기 싫으면 하지 마. 공작이 화내도 그냥 한 귀로 듣고 흘려. 나 너 하나 먹여 살릴 정도는 돼.”

아로네가 마른세수를 했다. 여전히 마음이 착잡해 보였다. 그가 한참 고민하다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그건 신에게 기도하는 신도의 간절함과 닮아 있었다.

“……약속할 수 있어?”

나는 할 수 있는 한 밝게 웃었다. 웃음에도 빛이 있다면 저택 전체를 밝힐 기세로. 그래서 아로네에게도 희망이라는 빛이 깃들 수 있도록.

“응. 우린 결국 다시 웃을 거야.”

《제7장: 당분간 포근한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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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로네는 혼자 있을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출생의 비밀과 더불어 그의 친엄마가 마녀라는 엄청난 사실까지 알게 되었으니 상당히 지쳤을 법도 했다. 이것저것 생각할 거리도 많을 테고.

그래서 나는 군말 없이 저택을 떠났다. 물론 정적 속에 홀로 남겨질 아로네가 걱정되긴 했지만, 난 그가 의연하게 마음을 추스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지옥 같은 저택에서 살아남은 것만 해도 이미 아로네의 강인함은 증명된 거나 마찬가지니.

내가 아로네를 믿고자 한 또 다른 이유로는 처음의 절망 어린 빛이 다소 사그라졌다는 데에도 있다. 내 최선의 위로가 마냥 효과가 없지는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나는 아로네가 먼저 연락할 때까지 기다리자고 다짐했다. 그가 보내올 편지가 긍정적인 소식을 담고 있길 바라며 나는 정신없던 하루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다음 날, 구내식당이며 길거리며 온갖 곳에서 아로네의 이름이 들렸을 땐 당장이라도 어젯밤의 다짐을 철회하고 싶었다.

핸드폰도 없는 나라에서 스캔들 퍼져 나가는 속도가 어찌나 빠르던지. 그 일이 벌어진 지 아직 24시간도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할리는 그 비정상적인 속도의 원인으로 동이 트자마자 속보를 내보낸 잡지사를 꼽았다.

‘공녀의 충격적인 비밀’이라는 헤드라인은 평소 잡지를 읽지 않는 사람들도 선뜻 지갑을 꺼낼 만큼 흥미로워 보였다. 정기 구독을 신청한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왜 아로네가 그토록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꼴좋다는 뉘앙스의 말을 출근 시간 내내 듣자니 열이 뻗쳐서 쓰러질 것 같았다.

고작 15분 남짓한 출근 시간 동안 아로네 욕을 얼마나 많이 들었던지. 나는 한 보 걸을 때마다 들려오는 험담에 씩씩거리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하지만 할리가 온몸으로 뜯어말려서 싸움은 내 바람에서 그치고 말았다.

황태자 궁의 사용인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는 간식 상자를 채울 초콜릿을 챙기다가 난데없는 요리사의 물음에 왈칵 얼굴을 구겼다.

“공녀님이랑 친하다고 했죠? 혹시 알고 있었어요? 그분이…… 사생아라는 거?”

순간 쌍욕이 튀어 나갈 것 같아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살기 어린 눈빛만큼은 나도 어쩔 수 없어서 요리사는 짜증이 덕지덕지 묻은 시선을 받고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네가 선 넘은 말을 했다는 건 아나 보지?

나는 짜증스러운 한숨을 뱉고선 할리에게 초콜릿 더미를 떠넘겼다. 그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나와 요리사를 번갈아 보았다.

“무슨 사람이……. 됐다. 안녕히 계세요.”

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하고 곧장 주방을 나갔다. 내가 입을 떼던 순간 쏟아지는 눈빛들이 소름 끼쳤다.

그 과분한 관심에서 요리사는 그저 총대를 멘 것에 불과했고, 사실 그곳에 있던 모든 이가 내게 그 질문을 하고 싶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내가 아로네한테 실언한 것 같다. 당사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화병 나서 죽을 것 같은데, 아로네는 오죽할까?

아로네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사람들은 그의 이름만을 이야기하며 수위 높은 험담을 쏟아 냈다. 그중 몇몇은 아로네의 과거 행적을 사생아라는 단어와 연결 지으며 그럴싸한 루머를 만들었다. 말로 사람 한 명 죽이는 게 너무 쉬워서 화가 났다.

하지만 그게 바로 지금껏 아로네가 살던 세상이었고, 그 세상은 어제를 계기로 더욱 혼란해졌다. 가치 없는 것들에 신경 쓰지 말자고?

나와 달리 아로네는 책장 덮듯 단숨에 사념을 잘라 내지 못한다. 나는 나한테나 통할 멘트로 아로네를 위로하면 안 됐다. ……그러니까 앞으로 조금 더 신경 쓰자 혜라야.

아직 사무실 의자에 앉지도 않았는데 벌써 지쳤다. 나는 계단을 오르며 우울하게 말했다.

“할리야.”

“왜?”

“아로네 이름이 언제까지 사람들 입에 오르락내리락할까? 네가 나보단 사교계를 잘 아니까 한번 말해 봐.”

“솔직하게?”

할리의 눈동자가 도르르 굴러갔다. 솔직하게 말하고 자시고 이미 그 반응에서 비관적인 미래를 읽었다.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손가락을 접었다 펴길 반복하다가 현명하게 말했다.

“아마 평생?”

“뭐?”

순간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할리는 더없이 진지했다. 그가 사무실 문을 열며 말했다.

“2주 정도 지나면 떠들썩한 건 조금 가라앉겠지만 최소 반년 동안 누구든 공녀님을 보면 무조건 그 기사를 떠올릴걸? 무도회 같은 공식 석상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말은…….”

나는 푸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사무실 안 제이든과 눈이 딱 마주치고 입을 닫았다. 제이든이 고개를 까닥이곤 개인 사무실로 들어갔다. 할리가 파이팅하라는 듯 엄지를 치켜들었다.

나는 뒷짐을 지고 제이든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제이든이 책상 위로 펜을 탁탁 두드리며 뜸을 들였다. 무슨 용건으로 날 불렀는지 대강 짐작이 되서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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