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다행스럽게도 베키가 1층 홀을 서성이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에 봤을 때와 달리 안색이 시체처럼 창백했다. 그가 나를 보자마자 반색하며 미리 준비해 놓은 타월을 건네주었다.
나는 성의 없이 물기를 털고 익숙한 계단을 올랐다.
“자세히 좀 말해 봐.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베키는 내게 말하는 것도 조심스러워 보였다. 그가 한껏 목소리를 죽였다.
“제가 설명해 드리는 것보다 아로네 님께 직접 들으시는 게 나을 거예요.”
그것참 불안함에 박차를 가하는 말이었다. 나는 베키 얼굴에 드리운 두려움의 그늘을 말없이 응시했다. 충격적 광경을 목격한 사람이 보통 저런 표정을 하지 않던가?
“여기서부턴 내가 알아서 할게. 얼굴색이 별로 안 좋다, 너. 가서 쉬고 있어.”
“괜찮을까요?”
중의적이었다. 아로네가 괜찮아질 것 같냐는 의문인지, 아니면 나 혼자 감당해도 정말 괜찮겠냐는 걱정인지 그 의미가 불분명했다. 나는 모호하게 미소 지었다. 당연히 어느 쪽이든…….
“괜찮고말고.”
***
“세상에, 이게 다 뭐야.”
방금 했던 말 취소하겠다. 나는 엉망진창이 된 방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멀쩡한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하나에 50골드를 호가하는 유리잔들이 산산조각 난 채 바닥을 굴러다녔고, 장인이 만든 고급 쿠션들은 속이 다 뜯겨 있었다. 발자취를 따라 유리 조각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집 한 채 가격의 그림이 반으로 부서져 있는 것을 보고 탄식했다. 흘러나온 와인에 축축하게 젖은 러그를 밟았을 때는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이곳은 혼돈 그 자체였다. 누군가가 손에 집히는 대로 던지고 부수고 찢어 놓은 혼돈. 그 누군가는 유일하게 멀쩡한 침대에 고개를 묻고 훌쩍거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술 냄새가 더욱 진해졌다.
나는 꿈꾸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 옆에 앉았다. 인기척을 느끼고 아로네가 고개를 돌렸고, 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 얼굴이 이게 뭐야!”
나는 부어오른 아로네의 뺨을 잡았다. 심지어 입술에는 옅은 생채기까지 나 있었다. 나는 몹시 분개하여 낮게 읊조렸다.
“누구야?”
“혜라…….”
아로네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나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도대체 누가 공녀씩이나 되는 애 얼굴을 이리 망쳐 놓은 거야?
“이름만 딱 대.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그의 말라붙은 입술이 차갑게 비소했다. 배신감과 분노로 얼룩진 자안을 마주하며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내가.”
“…….”
“내가, 사생아래.”
신이시여. 나는 차라리 혼절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
나는 겨우 한마디를 뱉었다.
“누가……. 누가 그래?”
아로네가 철자 하나하나를 짓씹듯 말했다.
“그 충격적인 비밀을 알고 있을 사람이 아버지 말고 또 있겠어?”
나도 모르게 다리가 덜덜 떨렸다. 그동안 잘 숨겨 왔던 비밀을 왜 이제야 말했을까? 공작의 진위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공작이 내 침묵 또한 말했을까 봐 걱정돼서 그런 내가 진저리 나게 혐오스러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왜 말해 주지 않았냐는 질책이 날아오지 않아서 안도를 느꼈다.
나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공작이 입 털 거라는 걸 진작 알았으면 일찌감치 아로네한테 털어놓는 거였는데. 나는 뒤늦은 후회를 하며 말했다.
“지금까지 일언반구 안 하다가 갑자기 왜?”
아로네가 신경질적으로 침대 옆 탁자에 올려놓았던 편지 봉투를 건넸다. 그 안에는 편지 한 장과 작은 초상화 한 점이 들어 있었다. 나는 꿀꺽 침을 삼키고 편지를 집어 들었다.
「님프 공작님께.
서면으로는 처음 인사드립니다. 민칠론 후작입니다.
갑작스러운 편지를 받고 놀라셨을 거라 짐작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귀하신 분의 시간을 빼앗는 게 송구하오니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는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황태자 전하와 공녀님 간의 결혼이 파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덧없이 흩어진 결혼 때문에 막막함을 느끼고 계시진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를 위한 무도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작금, 공녀님의 혼사 때문에 고민이 많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이전과 같았으면 득달같이 구혼서를 보냈을 영식들도 지금은 주춤거리고 있다는 것, 공작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라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다스리고 있는 겐솔리 영지는 풍부한 자원과 높은 잠재력, 경쟁력 높은 영지 사업 등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특히 보석 세공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지난 건국 기념 연회에서 어엿한 숙녀로 자라난 공녀님을 보았습니다. 마치 한 송이의 장미 같으셨죠. 그때 저는 공녀님께 첫눈에 반했습니다.
공녀님께 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바랄 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대가가 무엇이든 기쁜 마음으로 치를 수 있습니다.
부디 제 구혼서를 긍정적으로 고려해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민칠론 후작 드림.」
“이런 별 또라이 같은…….”
나는 편지를 찢어 버리려다가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았다. 그러니까 이 민칠론 후작이라는 놈은 아로네가 파혼하면서 신부로서의 가치가 하락했으니 자기가 아로네를 데려가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자기 말고는 아로네를 선뜻 원할 사람도 없고, 설사 있다 한들 자기만큼 조건이 좋지 않을 게 분명하니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좋을 거라고 은근히 압박하고 있었다.
나는 난도질 된 초상화를 내려다봤다. 익숙한 얼굴 같더니만 연회 때 아로네를 음흉하게 쳐다봤던 놈팡이였다.
왜 아로네가 답지 않게 술에 잔뜩 취해서 방을 엉망으로 만들어 놨는지 알겠다. 나 같아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기껏 제이든한테 탈출했는데 그보다 더한 놈이 나타나다니. 적어도 제이든은 보는 맛이라도 있었지만 민칠론 후작은 정말 생기다 만 것 같았다. 근데 출생의 비밀까지 알았다, 이거지?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가 폭파할 것 같았다.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공작이 결혼하래? 이 느끼한 수염 아저씨랑?”
아로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술병을 기울였다. 나는 황급히 술병을 빼앗고 바닥 한구석에 널브러져 있는 약을 들고 왔다. 베키가 가져온 약을 아로네가 내동댕이쳤나 보다.
내가 조심스럽게 상처에 약을 바르자 아로네가 혼잣말하듯 주절거렸다. 숨결에 알코올 냄새가 가득 섞여 있었다.
“아버지한테 처음으로 대들었어. 전에는 관심 좀 가져 달라고 악쓰는 거였다면, 이번은 진심이었지. 아버지는 내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나 봐. 안 그래도 내가 멋대로 파혼해 버려서 화가 나신 상태였는데 내가 장작을 던진 셈이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아로네가 날 위해 희미하게 웃고선 말을 이어 나갔다.
“분위기는 점점 과열되었고, 결국 아버지와 난 모든 걸 내려놓고 고성을 질렀어. 뺨 한 대를 얻어맞으면서도 난 말했지. 제발 내 말 좀 들어 달라고. 당신이 내 아버지가 맞다면 단 한 번만이라도 아버지 구실을 해 달라고. 아버지는 격노하여 충격적인 말을 했어. 사생아인 나를 지금까지 키워 준 것만 해도 자신이 할 도리는 다 했다는 거야.”
아로네가 울음을 참으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공작의 상상을 초월한 막 나감에 아연함을 느꼈다.
“그리고 뭐라는 줄 알아? 내가 어머니를 죽인 거나 다름없대. 아버지는 모든 진실을 털어놓았어. 그동안 어떻게 참아 왔는지 모를 만큼 단 한 번의 쉼표도 없이. ……이게 믿겨져? 혜라, 내 친어머니가 하녀였대.”
아로네는 생전 처음 보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는 상처로 얼룩진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생아라는 진실이 주는 괴로움, 공작의 말 한마디가 일으킨 혼란과 죄책감, 삭막한 유년 시절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수긍, 안개처럼 흩어진 자신감, 그리고 막연한 두려움. 나는 그에게서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세상에. 아로네…….”
“근데 웃긴 건,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이 초상화를 보니까 차마 그럴 수 없다는 거야.”
아로네가 품 안에서 한 여자의 그림을 꺼냈다. 그는 아로네와 비슷한 이목구비를 갖고 있었다. 나는 뚫어져라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말도 안 되지만 어디선가 이 얼굴을 본 적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중요한 무언가를 자꾸 놓치고 있는 것 같았다. 저 통찰력 있는 눈빛을 내가 어디서 보았지? 기억의 페이지를 넘길수록 나는 여자가 초면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분명 이 세계에서는 아니다. 그렇다면 다신 돌아가지 못할, 멀고 먼 그 세계라는 건데…….
“말도 안 돼.”
순간,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기적처럼 떠올랐다.
‘앞으로 아로네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해 줄 수 있겠니?’
그는 단순히 수상한 노파가 아니었다. 분명 언젠가 아로네가 그 노파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 사람이 마녀라면 모든 의문이 설명돼. 마녀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거든.’
공작은 아로네를 방치하는 데 타당한 이유가 있다는 식으로 변명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게 자기 연민으로 점철된 궤변이라 여겼다.
‘……그 애는 내 아내를 죽였어.’
‘고작 네 살짜리 애가요?’
‘……어찌 되었건 그 애가 원인이었네.’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작은 퍼즐이 모여 하나의 완성된 그림을 만들어 냈다. 아름답고도 슬픈 여자의 얼굴을. 나는 홀린 듯이 말했다.
“그 여자가 네 엄마였어.”
“뭐?”
나는 아로네의 두 손을 잡고 눈을 맞췄다.
“날 여기로 보낸 사람, 그 여자가 네 엄마였다고. 확실해.”
“그게 무슨…….”
아로네는 당황스러워 보였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내가 위로해 주기는커녕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고 있으니. 하지만 난 지금 당장 이 말을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