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138)

<63화>

제이든은 꽤나 구미가 당긴 눈치였다. 나는 초조하게 그의 말을 기다렸다. 하여간 제이든이 왜 정략결혼이란 주제만 나오면 이성을 잃는지 모르겠다.

……그래, 그 원인이 비틀린 유년기에 있다는 건 알다. 나라도 정략결혼을 부정적으로 생각했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제이든은 정도가 지나쳤다.

뭐, 할리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아마 그건 할리가 제이든에게 평생의 은혜를 입어서일 테다. 제이든이 할리의 비범한 두뇌를 알아보고 후원을 해 줬다고 했던가?

“……제이든 님?”

“그래, 나쁘지 않은 방법이군.”

제이든이 신중하게 말했다. 나는 등 뒤로 환호의 주먹을 쥐었다.

“그럼 참석자 명단을 입수해서 계약할 만한 사람을 알아볼게요.”

나는 10분 만에 기가 쫙 빨린 채로 사무실을 나섰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니까 탈주하고 싶었다.

“그래도 해야지……. 난 책임감 있는 어른이니까…….”

***

입소한 이래 처음으로 주말 아침 식사를 위해 구내식당에 내려왔다.

그릇을 들고 빈자리를 살피는데 사람들이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어느 방향을 곁눈질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건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보였다.

데자뷔야 뭐야? 반신반의하며 고개를 돌리자 홀로 밥을 먹고 있는 레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발 한 걸음을 내디뎠다가 처음 보는 무표정이 범접할 수 없는 서늘함을 담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쟤가 저런 얼굴도 할 수 있구나.

나한테 레이의 계절은 겨울보다 여름에 더 가까워서 그 찬 바람이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했다.

그런데 내가 너무 뚫어지게 쳐다봤나 보다. 수많은 시선들에 싫증 난 레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

단번에 눈이 마주쳤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고, 레이는 순식간에 짜증을 지워 내고 활짝 웃었다. 말간 얼굴에선 방금 보았던 싸늘함의 잔재를 찾아볼 수 없었다.

감정 컨트롤에 탁월한 건지, 아니면 연기의 귀재인 건지. 어느 쪽이든 참 대단하다 싶다가도 날 향한 미소가 빈말로도 연기라고 할 수 없어서 기분이 묘했다.

레이의 맞은편에 앉자 엄청난 양의 물음표가 날아와 뒤통수에 콕 박히는 게 느껴졌다. 이걸 정면으로 받고 있었다고? 소리 한 번 안 지른 게 신기하네. 나는 질색하며 말했다.

“네가 잘생기긴 정말 오지게 잘생겼나 보다.”

레이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그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정말?”

“응.”

“하긴, 내 얼굴이 네 이상형이라고 했었지?”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곱게 접힌 눈가에 장난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혜라, 네가 찾던 금발 미인의 존재가 하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는 거 몰랐어? 그들은 하루 종일 그 남자가 누구일지 토론했어. 내 귀에 안 들어왔으면 그게 더 이상했을 거야.”

“세상에…….”

그러니까 내가 생쇼 하는 걸 생중계로 들었다는 거 아니야.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아무나 붙잡고 주변에 아는 쥐구멍 있냐고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내가 레이를 묘사한답시고 장황하게 늘어놓았던 미사여구가 번뜩 떠올랐다. 눈앞이 아찔했다. 광신도처럼 예찬하던 내 모습도 전부 전해 들었겠지?

레이의 후두부를 강하게 치면 그 기억을 지울 수 있을까? 나는 진심으로 고민했지만 그래도 죄 없는 애를 치는 건 너무한 것 같았다. 나는 체념 어린 어조로 말했다.

“제발 잊어 주라.”

“네가 원한다면.”

레이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복숭앗빛 홍조는 그가 절대로 잊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

레이는 아직 주변 지리를 잘 모른다며 도와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라서 설명해 줄 겸 가벼운 산책을 제안했다. 그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하루 안에 전체 부지를 둘러보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나는 핵심 건물의 위치와 내가 좋아하는 장소 위주로 설명해 줬다. 그런데 의아한 점은, 어쩐지 레이는 낯설어야 할 길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 길 모르는 거 맞냐고 물을 때마다 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설명은 안 듣고 내 얼굴만 빤히 쳐다보다가 걸린 횟수가 한 손가락을 넘어가니까 확신이 생겼다.

“솔직히 말해. 너 그냥 나랑 있고 싶어서 거짓말한 거지?”

“응.”

레이는 그걸 이제 눈치챘냐는 듯이 능글맞게 웃었다. 시원하게 올라간 입매를 보니까 맥이 탁 풀렸다. 저 성격을 어떻게 누르고 산 거야?

“어휴, 너도 참…….”

나는 고개를 저으며 허탈하게 웃었다. 쟤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걸 자꾸 까먹는다니까.

레이는 내 웃음소리를 어쩐지 복잡한 표정으로 들었다. 그게 의아해서 입술을 떼려던 참에 레이가 내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넘기며 말했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지만 환장하게 좋은 목소리였다.

“줄곧 이 순간을 바라 왔었어.”

장난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진지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꽃을 스쳐 온 바람에서 향긋한 향이 났다. 나는 꽃보다 아름다운 남자에게 홀릴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에게서 쉽사리 눈을 뗄 수 없었다.

“무슨…….”

“네 미소가 보기 좋다는 말이야.”

레이가 싱긋 웃곤 앞서 걸었다. 나는 얼빠져 있다가 레이의 부름을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쟤, 내가 예쁜 얼굴에 약하다는 거 알고 저러는 거지?

날이 좋아서 우리는 조금 더 걸었다. 레이는 나와 있는 시간이 행복하다는 듯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사실 나도 이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레이는 꽤 잘 맞는 대화 상대였다.

일단 내 망한 농담에도 푸하하 웃어 준다는 점에서 100점 만점에 절반은 먹고 들어간 셈인데, 더군다나 그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재능도 갖고 있었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일반적이지 않은 첫 만남을 재구성하듯, 우리는 관계의 첫 단계부터 시작했다. 덕분에 나는 레이의 진면목을 하나둘씩 알 수 있었다.

그는 생각보다 시니컬한 편이었다. 특히 방긋 웃는 얼굴로 제이든을 까는 게 제법 장관이었다.

순간 인지 부조화가 일어 그가 제이든을 ‘본인 감정에 취해 남의 감정일랑 거들떠도 안 보는 얼간이’라고 평하는 게 환청인 줄 알았을 정도다.

또한 제국에서 까다롭기로 소문난 남정네들이랑 어울렸던 사람치고는 남의 눈치를 살피고 비위를 맞춰 줄 만큼 무던한 성격도 아니었다. 그런 애가 성심성의껏 내 말에 반응해 준다는 게 신기했다.

가장 놀랐던 점은 그가 달콤한 디저트를 좋아하지 않다 못해 질색한다는 것이다.

아니, 그럼 나랑 케이크 먹으면서 수다 떨었던 신시아는 누구야? 심지어 신시아는 유명 제과점의 파티셰와 안면을 틀 만큼 그곳을 자주 오갔다.

왜 그동안 좋아하는 척했냐는 질문에 레이는 그것이 당연하다는 양 말했다.

“네가 좋아하잖아.”

정말 얼토당토않은 말이었는데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말하니까 어쩐지 수긍이 갔다. 그러니까 나한테 맞춰 줬다, 이거 아니야.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결국엔 조금 감동이었다.

레이와 얘기하면서 든 생각이 있다. ‘신시아’에 대해서라면 제법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레이’에 대해선 새하얀 도화지처럼 깨끗했다. 아니,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나는 그 둘 사이의 교집합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좁아서 조금 놀랐다. 그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새로운 특징을 꾸며 냈다는 건데, 그걸 무려 8년 이상 해 왔다는 거잖아.

보통 그러면 자아를 잃어버리다 못해 다시 돌아올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거기에 매몰되지 않나? 근데 날 보고 자극받아서 가면을 벗겠다 결심했다, 이거지? ……내가 그 정도로 대단했던가? 이거 꽤 기분이 이상하네.

느린 발걸음에 맞추어 풍경도 천천히 바뀌었다. 방향을 가늠할 때 필수적인 중앙 시계탑, 더위 식힐 때 제격인 분수대, 점심시간에 할리와 자주 거니는 가로수 길, 삐걱거리는 그네 의자와 그 앞의 작은 연못.

레이의 새 직장으로 화제가 바뀐 것은 그네 의자에 앉았을 무렵이었다. 끼익. 듣기 싫은 쇳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며 나는 반문했다.

“그러니까, 지금 네 소속 부서가 물이 아니라 대지라고? 그게 가능해?”

“가능하더라.”

레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에게선 겸손도 잘난 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 놀라웠다. 그냥 한번 해 봤는데 성공했다는 거잖아.

“천재긴 천재구나…….”

그동안 물의 정령사로 이름을 날리다가 갑자기 다른 분야로 전향하다니. 그건 소설 쓰던 작가가 인공 지능 연구도 같이 병행하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어려운 멀티를 해내는 것도 모자라서 심지어 상급 정령사가 되었다고?

“진짜 부러운 재능이야. 어쨌든 축하한다.”

레이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햇빛이 내려앉은 귓가가 더욱 붉어 보였다. 능청은 잘만 떨더니만 정작 칭찬에는 면역이 없나 보군. 놀려 먹기 딱 좋은 타입이야. 나는 피식 웃고선 고개를 젖히고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차분한 분위기가 우리를 감쌌다. 나는 예기치 않은 침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아득히 먼 곳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솜사탕 같은 구름이 천천히 하늘을 항해했다. 평화로운 풍경 한가운데에서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내리쬐는 햇살이 슬슬 뜨겁다고 느낄 찰나, 감긴 눈꺼풀 너머의 세상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 나는 레이가 만들어 준 작은 그늘 속에서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레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더워? 이제 그만 들어갈까?”

“…….”

레이 쟤는 독심술이라도 하는 건가? 어쩜 저렇게 귀신같이 내 속내를 알아맞혀? 나는 레이의 손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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