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도와주겠다고 한 거죠 방금? 정말 고마워요 혜라 씨. 내가 콩팥 하나를 떼는 한이 있더라도 무조건 이 은혜 갚을게.”
“아뇨,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
조금 덜렁거려도 나름 카리스마 있었던 내 팀장님 어디 갔어. 나는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살인적인 업무량이 어떻게 사람을 망치는지 이런 식으로 알고 싶진 않았다.
나는 침통한 마음으로 익숙한 사무실의 익숙한 의자에 앉았다. 끝내주는 쿠션감이 그대로라서 조금 반가웠다.
하지만 그 몽글몽글한 감정은 스칼렛이 엄청난 양의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는 순간 증발되었다. 어째 전에 일할 때보다 양이 늘어난 것 같았다.
나는 진심이냐는 의미로 스칼렛을 째려보았다. 그도 잘못을 알긴 하는지 멋쩍게 웃었다. 그러나 끝까지 서류를 덜진 않았다. 이런 건 안 변했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지긋지긋한 검산 작업을 시작했다.
처음 펜을 잡았을 때까지만 해도 딱 2시간만 도와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막상 정말 가려니까 남은 서류들이 내 발목을 붙들었다. 마치 똥 싸다가 끊긴 기분이었다.
나는 눈물을 삼키며 마지막 서류까지 도와줬다. 아, 강혜라. 이렇게 착해서 이 험난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지?
일을 모두 마쳤을 때는 자정을 넘기고서였다. 우리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사무실을 나왔다.
숙소로 향하는 길은 고요했다. 숨 막히는 정적 속, 별안간 스칼렛이 작게 탄식을 뱉었다.
“맞다. 늦었지만 몸은 괜찮아요?”
“네?”
“오늘 기사 봤거든요. 피해자가 혜라 씨였다니……. 가만히 넘어갈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적개심이 그 정도로 클지는 몰랐어요. 난 또 황태자 전하 바로 밑에서 일하는 사람을 건드릴 줄은 미처 몰랐지.”
스칼렛은 내가 당한 일에 유감을 표하면서도 그리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그의 일이 아니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더 있는 걸까?
“제가 황태자 전하의 보좌관으로 일하지 않았다면 그 즉시 살해 위협을 받았을 거란 말씀이세요?”
스칼렛은 침음을 삼켰다. 그 머뭇거림에서 내 무지를 깨달았다.
“음, 생각보다 혜라 씨가 순진한 구석이 있네. 귀족 나리들 생각하는 거야 뻔하잖아요. 감히 평민이 귀족의 뒤를 파고 고발하고 바닥으로 추락시키다니. 뭐 이런 거?”
“제가 주제도 모르고 나댔다, 이거죠?”
“그렇죠. 어떤 사람들은 평소 그들이 무시했던 존재에게 역관광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감방에 들어가는 게 나아요. 그 대표적인 예시로 신문 1면을 장식한 귀족들이 있죠.”
가득이나 평민을 멸시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평민에 의해 명예도 부도 뭣도 다 잃고 감방에 가게 생겼으니 내가 얼마나 증오스러웠을까?
난 나였을 뿐인데 그 단순하고도 당연한 이유로 날 경멸하는 자들이 있다. 이 사회에 처음 발을 내딛었을 때부터 부당한 차별이 있었다. 내 능력과는 상관없다. 오직 ‘성’이 없다는 이유로 나는 나일 수 없었다.
영원히 이 세계에서 살아가야 하는 한 어느 정도 타협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내 안전을 위협받은 상황에서 타협하는 게 최선일까? ……무시를 받지 않으려면 더 높은 자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어떻게? 막막함이 들었지만 나는 곧바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일단 결심을 한 것만으로 첫 발걸음은 내딛은 셈이다. 마음속에 품은 의지가 어느 날 우연히 나타난 기회를 잡아챌 거라 믿는다.
사색하는 사이 우리는 갈림길에 다다랐다. 스칼렛이 말했다.
“참. 오늘 제가 혜라 씨한테 도움받은 거 비밀로 해 줄 수 있나요? 다른 부서 사람이 업무에 관여했다는 게 알려져서 좋을 건 없으니까요.”
“네.”
“고마워요. 그럼 좋은 꿈 꿔요. 아, 나중에 내가 도울 일이 생기면 주저하지 말고 연락 주고요.”
대답할 기력도 없어서 힘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스칼렛이 내 어깨를 토닥이곤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샤워도 하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오늘 손목이 부러져라 일하고 얻은 게 겨우 기약 없는 은혜 갚음이라니.
만약 스칼렛이 날 도울 일이 생긴다면 이자까지 쳐서 본전을 뽑아야겠군. 나는 굳게 다짐하며 눈을 감았다.
***
오지 않았으면 했던 월요일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나는 죽상을 하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가 그 안에 나보다도 더한 죽상이 있어서 재빨리 얼굴을 폈다. 주말이 지났는데도 제이든은 여전히 음울해 보였다.
그래, 썸이라고 착각한 짝사랑이 도대체 몇 년이야. 후유증이 긴 게 이해는 된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일은 똑바로 해야 할 거 아니야. 공과 사 구분하라고 입이 닳도록 말했던 사람이 누구더라? 제이든은 아침 내내 사색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조차도!
“제이든 님.”
도대체 몇 번째일지 모를 부름이었다. 그의 이름을 크게 불러도 보고, 눈앞으로 손을 흔들기도 하고, 심지어 반말도 한번 해 봤지만 제이든 이놈은 도대체 무슨 생각 중인지 내리깐 눈을 들어 올릴 기미가 없었다.
“혹시 눈 뜨고 주무시는 중인가요?”
이따금씩 깜박이는 눈꺼풀로 봐선 깨어 있는 게 분명한데 말이지. 열댓 번 즈음 씹히니까 슬슬 열이 올랐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책상을 쾅 내려쳤다.
“얼음 땡!”
“……뭐지?”
화들짝 놀라는 모습 다 봤는데 제이든은 꿋꿋이 멀쩡한 척을 했다. 미쳤냐고 혼내기는커녕 용건부터 묻는 걸 보니 본인도 쪽팔리긴 한가 보다. 나는 붉어진 귓가를 슬쩍 쳐다보곤 말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길래 제가 앞에서 별 난리를 쳐도 눈길 한번 안 주세요?”
“……말이 길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용건이나 말해.”
그래, 저래야 제이든답지. 저 싸가지 없는 말투도 이젠 익숙해져서 타격감은 없었다. 오히려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제이든을 하찮게 여기고 있는데, 얼마 전의 사건이 그 가차 없는 취급에 큰 기여를 했다. 그래서 나는 욕을 들어먹고도 발랄하게 말할 수 있었다.
“네! 그럼 30분 뒤에 황제 폐하 뵈러 가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볼일을 마치자마자 나가려고 하는데 제이든이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잠깐.”
제이든 본인조차 왜 나를 멈춰 세웠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는 한참 동안 입술만 달싹거렸다. 나는 속으로 노래를 부르며 그를 기다려 줬다.
“지난 토요일에.”
헉! 스칼렛 도와준 걸 들켰나? 분명 건물을 빠져나올 때 주위에 사람은 없었는데.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토요일이요?”
“그래. 그날 신시아가 공작가에서 완전히 떠났다고 하던데.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아나?”
깊은 슬픔이 드리운 벽안이 낯설어서 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쟤 진짜 신시아 사랑했구나.
“신시아가 떠났다는 것도 방금 말씀하셔서 알았는걸요.”
“……그렇군. 그럼 나가 봐.”
한숨 짙은 목소리에는 체념 또한 어려 있었다. 신시아의 행방을 못 찾아서 답답한 모양이었다. 사무실 문을 닫으며 나는 생각했다. 모아 둔 것도 없을 그 애가 도대체 어디로 떠났을까?
바쁘게 일하는 도중에도 불쑥불쑥 레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레이가 계획 없이 행동할 타입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최근 한 연락이라고는 걱정 가득한 편지가 전부라서 그의 근황이 궁금했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생각했던 것보다 의문은 빨리 풀렸다.
평범한 퇴근길이었다. 평소와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면 새로 출시된 보드게임을 할 생각에 할리와 정신없이 떠들며 걸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만을 바라본 채 경쟁하듯 기쁨을 내뿜었다. 그 와중에 발은 착실하게 정확한 길을 밟았다.
먼저 이상을 발견한 것은 할리였다. 그가 침까지 튀겨 가며 말하다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그제야 나는 할리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이 얼음처럼 굳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이하게도 그들의 시선은 오직 한 곳에서 멈추었다.
“뭐야, 왜 그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시선의 끝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모든 이의 눈길을 단숨에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운 남자가 있었다. 그는 줄곧 나만 바라보고 있었는지 바로 눈이 마주쳤다. 난 내 눈을 의심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조만간 보자고 내가 말했었지?”
아, 그 조만간이 저번 주가 아니고 오늘이었어? 레이가 얼빠진 날 보고 활짝 웃었다. 이 표정을 보고도 멜로 눈빛을 할 수 있다니. 정말 콩깍지가 단단히 꼈구나 싶었다.
레이는 아주 자연스럽게 나와 할리 사이에 섰다. 그러고선 하는 말이 능청스럽기 그지없어서 나는 실소했다.
“우리 이제 매일 볼 수 있겠네.”
***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보기와 달리 낯을 가리는 할리를 보내주고 내가 한 말이었다. 레이가 턱을 괴고 나른하게 웃으며 눈을 맞췄다.
“네가 허락만 해 주면 앞으로도 여기서 마주 보고 대화할 수 있어.”
그가 말하는 ‘여기’란 기숙사의 구내식당을 의미했다. 나는 한 번에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잠시 멍을 때렸다. 오늘따라 머리가 안 돌아가는 이유는 필시 저 잘난 얼굴과 우리를 향한 부담스러운 관심 때문일 것이다.
나는 식당 저 멀리서 할리가 엄지를 척 들어 올리는 것을 보고 다시 레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할리 쟤는 내가 지금 미팅이라도 하는 것처럼 굴고 있다. ……젠장, 차마 부정하진 못하겠네.
“그러니까 네가 취직했다는 거야? 나처럼? 아니, 어떻게?”
물음표 살인마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내 물음표들은 합당했다.
보육원에 들어갈 때부터 신시아로 살았던 거면 지금 레이로서의 신분은 수상한 이방인에 지나지 않는다. 근데 어떻게 그 불분명한 신원으로 여기에 취직할 수 있었을까? 분명 입사 전에 신원 검사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