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138)

<59화>

나는 귀를 틀어막을지 말지 고민하며 신시아를 바라보았다. ‘레이’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고 너무나도 ‘신시아’ 같은 모습이 기묘했다. 이런, 올해 연기 대상은 쟤한테 넘겨줘야겠군.

신시아는 원망스러운 의문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더 마음을 굳게 먹은 것처럼 보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말씀드릴게요. 네, 그 감정은 오직 제이든 님만의 것이었어요. 저는 단 한 번도 제이든 님을 연애 상대로 고려해 본 적 없어요.”

제이든은 너무 충격을 받아서 탄식도 제대로 못 뱉었다. 신시아는 그런 제이든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격한 감정이 희석된 채였지만 떨림은 여전했다.

“전 호감이었어요. 누구에게나 베푸는 종류의 호감이요. 제이든 님은 그걸 곡해하신 거 같네요.”

“그럼 그동안 같이 웃고 떠들고 정원을 거닐었던 건 뭐지? 그것도 아무 의미 없었나?”

“적어도 연애적인 의미는 없었죠.”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제이든은 쌍방이라 생각했던 감정이 사실은 일방이었다는 걸 깨닫고 배신감을 느낀 것 같았다.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길이 거칠었다.

신시아는 놀랍게도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모든 울분을 풀고 갈 작정인 듯싶었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분명 전 신호를 보냈는데. 수없이.”

“……신시아, 솔직히 말해 봐. 공작의 후원을 더 이상 받지 않겠다고 한 걸 알아. 그리고 지금은 날 상처 주려고 하고.”

어쩐지 다음 대사가 예상되었다. 보나 마나 아로네를 엮겠지.

“만약 이 모든 게 네 의지가 아니라면 지금 말해. 배후에 공녀가 있다면 그렇다고 말하라고.”

그럼 그렇지. 제이든이 너무 뻔해서 재미없었다. 이게 드라마였다면 시청률이 아주 저조할 게 분명했다.

할리가 나를 툭 치며 저게 사실이냐고 소곤거렸다. 제이든 밑에서 너무 오래 일했더니 분별력이 떨어졌나? 나는 대답 대신 칠색 팔색을 했다. 와중에도 비운의 커플은 여전히 설전 중이었다.

“어떻게 하면 그런 결론이 나오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제 모든 걸 걸고 이 모든 게 제 의지라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신시아는 몹시 피로해 보였다.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는 행동이 그가 지금 상황을 얼마나 환멸스러워 하는지 알려 주었다.

“……그동안 감사했다고 마지막 인사드리러 온 건데 이렇게 얘기가 길어질지 몰랐어요. 솔직히 조금 지치고요.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몸조심하세요.”

신시아는 인사도 듣지 않고 뒤돌았다. 나는 그 박력과 패기에 감탄했다. 그러나 제이든은 순순하지 않았다.

“난 널 진심으로 사랑했어.”

드디어 전개가 좀 재미있어진다고 생각했다. 제이든이 저렇게 구질구질하게 구는 걸 오늘 아니면 또 언제 보겠어? 팝콘이 없는 게 유일한 옥에 티이다.

“아니요. 제이든 님이 절 정말 사랑했다면 더 신중하게 행동하셔야 했어요.”

그래, 확실히 제이든은 일방적으로 자기감정을 강요했다. 그건 사랑보단 집착에 가까운 행동이자 제이든이 혐오하던 누군가가 하던 사랑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로네는 잘못됨을 인지하고 고쳤지. 아마 그게 제이든과 아로네의 가장 큰 차이일 것이다.

“난 너한테 최선을 다했어. 사랑이 뭔지 정말 알긴 해? 현실은 동화가 아니야.”

“그걸 왜 모르겠어요.”

신시아는 슬쩍 고개를 들어 내가 있는 창문가를 응시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주 먼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시아와 눈이 마주쳤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고개를 빼꼼 내밀었을 땐 신시아가 마차에 올라타려던 참이었다. 제이든이 우두커니 선 채 윽박질렀다.

“황태자로서 명령한다. 당장 멈춰.”

하지만 신시아는 들은 척도 안 하고 마차에 올라탔다. 그는 혹을 떼어 버리기라도 한 듯 후련해 보였다.

제이든은 신시아가 굴복할 거라 확신했던 모양이다. 그는 미련 없이 떠나는 마차를 망연히 응시했다. 타이밍 좋게도 소나기가 내렸다. 완벽한 비극의 막이 내린 것이다.

새드 엔딩을 맞은 남자 주인공의 심정은 어떨까? 나와 할리는 시선을 교환하고 후다닥 책상 앞에 앉았다. 제이든이 오기 전까지 일을 끝내 놓지 않으면 역대급으로 갈굼당할 것이다.

***

24시간이 모자라서 하루가 48시간이었으면 좋겠다가도, 정말 그랬다간 과로사할 것 같아서 결국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마침내 찾아온 주말, 나는 허리가 뻐근할 때까지 푹 숙면하고 정오를 한참 지난 뒤에야 침대를 벗어났다. 이번 주는 유난히 사건 사고가 많았다. 그중 최고를 뽑으라고 하면 단연 제이든의 실연이다.

그날, 사람들이 숨죽여 지켜보는 와중에 굴욕적인 실연을 당한 제이든은 예상외로 침착해 보였다. 나와 할리는 제이든이 우리에게 화풀이할까 봐 잔뜩 긴장했지만, 이게 웬걸. 그는 아무 말 없이 조기 퇴근을 명령했다.

무사함을 기뻐해야 마땅했지만, 도리어 우리는 더욱 겁에 질렸다.

제이든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았다. 전에는 최소한 안전핀이라도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주 작은 자극에도 폭발할 듯 아슬아슬했다.

덕분에 우리 보좌관 듀오는 제이든의 심기를 거스를 일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능력이 닿는 한 입단속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게 정말 효과가 있을 진 의문이나, 뭐든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훨씬 나은 법이다.

“……잠깐, 쉬는 날인데 뭐 하러 그 잘난 낯짝 생각을 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오늘 자 신문을 펼치자 손꼽아 기다렸던 소식이 1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암살 길드를 비롯해 그와 관련된 몰락 귀족들이 모조리 사형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사형 집행 날짜를 무감정하게 내려다보았다. 나흘 뒤, 내 멱살을 잡고 지옥 한가운데로 끌고 갔던 사람들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잘됐네.”

사형제의 옳고 그름? 그런 건 잘 모르겠다. 난 단지 분명한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되어 기쁠 뿐이다. 날 울게 했으면 네 눈에선 피눈물이 흘러야 공평하지.

하지만 날 죽이고자 한 사람이 무려 스무 명이나 된다는 사실은 좀 우울했다. 나는 신문을 쓰레기통에 처박고 나갈 채비를 했다. 어디 한적한 곳에 가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

기숙사 건물을 나가자마자 후덥지근한 열기가 온몸을 덮쳤다. 양산을 갖고 나와서 정말 다행이군. 나는 양산이 효과 있길 바라며 익숙한 길을 밟았다. 황금빛 오후 햇살이 산책로를 비추었다.

나는 한참 걷다가 분수대 앞에 앉아 멍하니 물 냄새를 맡았다. 햇빛이 투과된 물줄기가 반짝거리니 아주 예뻤고, 간간이 얼굴에 튀는 물방울이 시원했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입을 헤벌리는데 가까운 곳에서 대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코를 훌쩍이곤 몸을 일으켰다.

나는 발이 닿는 대로 걸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가끔씩 할리와 거닐었던 가로수 길 초입이 눈앞에 있었다.

날이 더워서 그런지 평소 붐비던 가로수 길은 한적했다. 덕분에 이 끝없는 길을 통째로 빌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람이 앞머리를 흐트러뜨리고 지나갔다. 나는 눈을 감고 가만히 심호흡을 했다.

요즘 이처럼 평화로웠던 적이 있었던가? 지금 이 상태라면 누구를 만나든 기쁘게 대꾸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설마 혜라 씨?”

“……팀장님?”

부서 이동하고 처음 보는 거였다. 얼떨떨한 나와 달리 스칼렛은 구세주라도 만난 표정이었다. 오랜만에 부하 직원을 만난 사람치고는 과도하게 환희하는 태도가 매우 미심쩍었다.

턱 끝까지 내려온 다크서클과 푸석푸석한 피부가 그 불신에 근거를 더해 주었다. 불길한 예감에 일가견 있는 사람으로서 말하건대, 나는 지금 당장 도망가야 했다. 그러나 사회생활의 노예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일이 바빠서 연락 한 번 못 드렸네요. 죄송해요.”

그 말을 듣자마자 스칼렛 눈에 이채가 돌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칠 각을 재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자 스칼렛이 내 어깨를 강하게 틀어쥐었다. 그 악력에서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느껴졌다. 스칼렛이 과장스럽게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혜라 씨 연락을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요? 황태자 전하 밑에서 일하면서 적응은 잘했는지, 일이 많이 힘들지는 않은지, 동료랑 갈등은 없는지……. 내가 먼저 편지하면 부담스러울까 봐 그동안 꾹 참긴 했지만 그래도 몇 달씩이나 연락 없었던 건 너무했어. 그쵸?”

스칼렛은 그 긴말을 숨 한 번 내쉬지 않고 했다. 장황한 서문 뒤에 나올 말이 조금 두려워졌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스칼렛이 저렇게 변한 거야? 내가 아는 스칼렛은 적어도 억지스러운 사람은 아니었다.

“아, 예…….”

“그쵸? 그럼 내 사과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게요. 혹시 오늘 시간 있으면 나 좀 도와줄래요?”

이건 또 무슨 헛소리지. 나는 가감 없이 인상을 찌푸렸다.

“예?”

“딱 3시간만. 아니, 제발 2시간 만이라도.”

목적이 이거였군. 나는 애잔한 마음으로 스칼렛을 바라보았다. 다시 보니까 스칼렛의 몰골은 정말 말이 아니었다. 옷에 커피 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보니 철야를 한 것 같기도 하고.

간절하게 두 손을 모으고 날 응시하는 스칼렛이 몹시 측은했다. 그래도 한때 상사였는데, 얼마나 일이 고됐으면 자존심까지 다 버리고 이럴까?

침묵이 길어지자 스칼렛이 절절하게 외쳤다.

“혜라 씨 제발! 사람 한 명 살린다 치고 재능 기부 한 번만 해 줘요…….”

저렇게까지 비굴하게 나오는데 거절하는 것도 어려웠다. 나는 재수 옴 붙었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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