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이 겸손함과 완벽한 기승전결, 그리고 앙증맞은 그림까지……!”
모아 둔 돈의 절반 이상을 후원금으로 쓴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조금 충동적인 결정이긴 했다. 아로네는 이 일을 전해 듣고 거의 기절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애초에 국가가 의식주 중에서 식과 주를 공짜로, 그것도 고급으로만 제공해 주는 마당에 내가 월급을 어디다 쓰겠는가? 기껏해야 야금야금 저축하거나 아로네 선물 사주는 게 전부지.
어차피 잉여로 남을 돈, 여유 있을 때 좋은 곳에 쓰고 싶었다. 남의 도움 받아서 번 돈 주변에 나누면 좀 좋아?
……사실 이건 핑계고,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이런 방식으로나마 외롭고 막막했던 스무 살 강혜라를 위로하고 싶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편이라 생각했건만, 완전 그런 것도 아닌가 보다.
나는 로빈의 편지를 서랍 안에 고이 보관했다. 사는 게 막막할 때마다 이 편지를 읽어야겠다. 그럼 잿빛 인생도 조금 밝아지겠지.
“좋아, 그럼 레이 편지가 남는군.”
이 안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지 조금 기대되었다. 하지만 피로한 동공을 굴려 마저 편지를 읽기엔 봉투에서 느껴지는 무게가 상당했다.
도대체 편지지 몇 장을 쓴 거야? 조금 기가 질렸다.
“내일…… 내일 읽자.”
나는 봉투를 가방에 넣고 침대에 기어들어 갔다.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순식간에 몸에서 힘이 쫙 빠져나가고 암전이 찾아왔다.
짱인데. 그것이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
고대하던 점심시간. 나는 한 손으로는 바쁘게 식기를 놀리면서도 다른 한 손으로는 빠르게 편지를 훑어 내려갔다. 테이블은 음식과 마법 스크롤로 어지러웠다. 할리는 밥 먹는 것도 잊고 내 스크롤들을 정신없이 구경했다.
「혜라에게.
그 소식 들었어. 어떻게 알았냐고 반문하는 네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네. 너한테 고백했던 그날, 공녀가 오후 내내 심기가 불편해 보이더라.
공녀가 그렇게 살기 띤 모습은 처음 봤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보통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네 이름이 나오더라. 너한테 문제가 생겼던 거야.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을 아마 너는 평생 모를 테지.
많은 말을 하진 않을게. 하지만 진심으로 말하건대 네가 살아서 다행이지, 만약 안 그랬다면…… 됐다. 너 없는 세상은 상상도 하기 싫어.
당장 찾아가서 내 두 눈으로 네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었어. 하지만 네가 부담스러워할 게 분명했고, 나도 격앙된 내 감정을 통제할 자신이 없었지.
너도 알다시피 지금 난 네 호감을 따야 하는 입장이잖아? 그래서 이제야 편지를 보내. 제발 이게 맞는 선택지였으면 좋겠다.
내가 널 많이 걱정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줘.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동봉한 것들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그럼 조만간 보자. 안녕.
-사랑을 담아, 레이.」
나는 눈앞에 놓인 1급 방어 스크롤을 유심히 관찰했다.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마법 스크롤이었다. 그리고 그게 공격 스크롤을 포함해서 30장씩이나 내 수중에 있고.
4급짜리 스크롤도 10골드를 훌쩍 넘는데 1급으로만 30장이라니. 얘는 후원도 안 받으면서 도대체 무슨 돈이 있다고 이렇게 많이 산 거야?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이라는 문장을 빤히 바라봤다. ……직접 올 수 없으니 이런 식으로나마 성의 표시를 한다는 건가?
레이가 정말 영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애매한 관계에선 무턱대고 들이대는 것보다 이런 진심 어린 편지와 센스 있는 선물이 훨씬 효과적이지.
“꽤 제법인데.”
“뭐야…… 뭔데 최종 흑막처럼 말해……?”
할리가 떫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뭘?”
“……말을 말자. 그래서 이 스크롤의 출처는 누구야? 귓속말로 이름만 말해 줘. 나도 친구 하자고 하게.”
할리가 편지의 주인공을 확인하려고 엉덩이를 들썩였다. 나는 황급히 편지를 봉투에 집어넣고, 그것도 모자라 서랍 깊숙한 곳에 처박았다.
“쳇. 설마 연애편지인 건 아니지? ……헉, 설마 그때 그 꽃미남?”
할리는 제이든이 여장하는 걸 목격한 사람처럼 무척 충격을 받았다. 내가 러브레터 받는 게 뭐가 어때서? 정말 어이없는 건, 저 불신과 의심이 연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게 괘씸해서 나는 툴툴거렸다.
“그런 거 아니거든? 오늘 할 일도 많으면서 자기 일에나 집중하지?”
애정이 철철 흘러넘치는 편지를 쟤한테 들켰다간 관에 들어갈 때까지 놀림 받을 게 분명하다. 나는 앞으로 더욱 주의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철통같은 방어에도 불구하고 할리는 쉽사리 호기심을 꺾지 못했다. 하나밖에 없는 솔로 동지가 떠나갈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훤했다.
그러나 나도 사람인 지라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집요한 눈길이 슬슬 신경에 거슬렸다. 그리고 그때, 타이밍 좋게도 제이든이 할리를 호출했다. 처음으로 제이든이 마음에 든 순간이었다. 나는 킬킬거리며 비웃었다.
“힘내라.”
곧 새로운 업무가 몰려올 것을 직감하고 할리가 울상 지었다. 휴, 일단 오늘은 질문 공세에서 벗어날 수 있겠군.
***
레이가 조만간 보자고 말했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미처 몰랐다. 그 만남이 황태자 궁에서 이루어질 거라는 건 더더욱 몰랐고.
오후 5시. 그때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딱 1시간만 참으면 퇴근이다! 퇴근 후, 할리와 나란히 소파에 앉아 신간 만화책을 읽을 생각에 나는 무척 설렜었다.
맞은편 책상을 보니 할리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우리는 음흉한 미소를 주고받고 막판 스퍼트를 내었다. 야근만큼은 죽어도 싫었다.
요즘 제이든은 아로네와 파혼할 생각에 들떠서 우리를 방목하다시피 했다. 요컨대 일감이 더 늘었다는 말이다.
만약 제이든이 한 달 전에 이랬다면 나는 그 명치에 주먹을 꽂았겠지만, 아로네가 이젠 아무 미련 없다고 했으니 저 괘씸함도 조금 참아 줄만 했다. 물론 인내심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굳이 나한테 아로네와 약속을 잡으라고 명령한 건 짜증 났다. 사무실 밖에선 쿨한 척이란 쿨한 척은 다 하더니만. 하여간 제이든 쟤도 찌질한 구석이 있다.
명령이니까 군말 없이 아로네에게 편지하긴 했지만 그 애가 청량 가득한 사이다를 날려 줄 수 있을지 조금 걱정됐다. 제이든한테 한 방 먹여 주면 정말 좋겠는데…….
나는 평소 아로네의 고상한 말투를 떠올렸다. 그리고 제이든의 초상화를 부수고 때리고 난도질하던 모습을 회상했다. 음, 제이든이 공작가 간다고 할 때 떼를 써서라도 따라가야지.
나는 제이든의 콧대가 꺾이는 상상을 하며 시시덕거렸다. 1시간 내로 끝내야 할 서류가 많았지만 뉴비에서 고인물로 레벨 업한 내겐 그럭저럭 감당할 수 있는 양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꽤 평화로웠던 분위기는 뜻밖의 인물이 황태자 궁을 찾아오면서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문제의 주인공은 연락도 없이 찾아와선 다짜고짜 제이든을 호출했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근데 그 무례를 무려 황태자에게 범했다? 그 사람이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게 아니고서야 그는 절대 그래선 안 됐다.
하지만 ‘신시아’는 언제나 예외였다.
헛소리 가득한 보고서를 보고 화를 다스리던 제이든은 신시아의 방문 소식을 듣고 총알같이 뛰쳐나갔다.
그의 얼굴에서 먹구름이 순식간에 걷히고 볕이 내리쬐는 광경은 정말 눈 뜨곤 못 봐줄 것이었다. 정말이지, 정신 줄 놓고 있었으면 욕할 뻔했다.
그래도 불편한 상사가 사라지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나는 책상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간식을 집어 먹었다. 그리고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이노피아 재개발 회의록’을 꼼꼼히 읽었다.
코딱지만 한 알맹이에 비해 붙은 수식어는 얼마나 화려하던지. 덕분에 핵심을 간추리는 작업이 유독 성가셨다.
나는 초콜릿을 네 개나 먹고서야 비로소 회의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머릿속에서 온점이 찍히자마자 내가 비명을 지른 것은 어쩌면 불가항력적이었다.
“미친 거 아니야?!”
세상에. 빌어먹을 귀족들은 이노피아 거주민들을 모조리 몰아내고 그 자리에 마법과 접목된 대형 테마파크를 건설하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무식한 놈들이 권력도 가지면 위험하다더니. 지금이 딱 그 경우였다.
나는 할리에게 이 황당함을 공유하고자 했다. 그러나 할리는 내 고함도 못 들었던 것인지 창밖에 신경을 빼앗긴 채였다. 그래서 나는 친히 그 앞까지 가서 책상을 쾅 내려쳤다.
“이것 좀 봐! 귀족들이 정말 미쳤나 봐!”
“으악!”
할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홱 고개를 틀었다. 도대체 뭘 보고 있었길래 내가 코앞까지 왔는데도 눈치를 못 챘던 거지? 나는 할리에게 서류를 떠넘기고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목격한 장면은 꽤 흥미로웠다.
“와, 저게 뭐야?”
할리가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아니, 아까 제이든 님이 소리친 것도 못 들었어? 지금 사랑싸움 중이잖아.”
“뭐? 사랑싸움?”
제이든이라면 몰라도 신시아한텐 안 어울리는 단어였다. 우리는 창문을 활짝 열고 귀를 쫑긋거렸다. 끝내야 하는 서류는 기억 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왜 제 말을 못 믿으세요?”
신시아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신시아가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은 처음 봤다. 사랑싸움이든 뭐든 나는 이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나와 할리가 앞으로 구설수를 막는 데 진땀을 뺄 거라는 불길한 미래도 확신했다. 하여간 제이든은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
제이든은 비탄에 절어 쥐어짜 내듯 말했다.
“못 믿는 게 아니야. 믿기지 않는 거지. 난…… 그동안 우리 사이에 뭔가 통하는 게 있다고 생각했었어. 다 내 착각이었나?”
헐? 나는 입을 떡 벌리고 할리를 쳐다봤다. 그도 조금 역겹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제이든이 저런 절절한 말도 할 수 있는지 오늘 처음 알았다. 영영 몰랐다면 더 좋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