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138)

<57화>

어휴 뻔해라. 데네브가 신시아를 좋아하는 마음이 한여름 밤의 꿈이 아닌 것 같아서 조금 안타까웠다. 신시아랑 헤어지기가 얼마나 싫으면 그토록 혐오하던 나한테 부탁을 할까?

하지만 데네브가 꽤 딱해 보이는 것과 별개로, 나는 그의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솔직히 내가 설득하는 것도 웃기다. 애초에 나 때문에 저택을 나오는 건데 무슨 설득?

“죄송하…….”

“그동안 네가 나한테 했던 언행들, 모두 귀족 모욕죄에 해당한다는 거 아는지 모르겠네.”

데네브에 대한 동정심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 넌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데네브는 내가 알겠다고 할 때까지 붙잡고 늘어질 기세였다.

저택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줄도 모르고 멍청하게 데네브를 불러 세우다니. 10분 전의 내가 미웠다.

나는 정치적으로 행동하기로 했다. 일단 저질러 놓고 나중에 나 몰라라 하겠다는 뜻이다.

믿음직스럽게 웃으며 데네브에게 악수를 청하자 그가 반신반의하면서도 손을 맞잡았다. 나는 그의 손을 짧게 흔들었다가 바로 놓았다.

“알겠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볼게요. 하지만 너무 기대하지는 마세요. 신시아랑 꽤 친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도 다 한때였으니까.”

그제야 데네브는 길을 비켰다.

하, 데네브 덕분에 연기력만 점점 늘어. 나는 혹여나 데네브한테 붙잡힐까 봐 아로네 방까지 전력 질주했다.

아로네는 내가 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발 빠른 시종이 아로네에게 미리 언질 해 준 것 같았다. 나는 문턱을 넘자마자 활짝 웃으며 아로네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아로네, 넌 내 행운이야.”

“갑자기 무슨…….”

아로네는 당황스러워하면서도 기쁜 기색이었다. 입꼬리를 씰룩거리다가 이윽고 함박웃음을 짓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나는 루나와 베키에게 눈인사를 하고 테이블 앞에 앉았다. 한 입 크게 떠먹은 블루베리 치즈케이크가 환상적이었다.

“아, 진짜 맛있다. 스트레스가 쫙 풀리는 기분이야.”

나는 본격적으로 케이크 먹방을 찍기 시작했다. 아로네는 턱을 괴고 내 몸을 꼼꼼하게 훑었다. 다친 곳이 정말 없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그 주도면밀한 관찰이 괜히 겸연스러워서 나는 케이크 한 조각을 잘라다 아로네에게 건넸다.

“어휴, 나 다친 곳 하나 없으니까 너도 좀 먹어. 주방장한테 뽀뽀 백 번이라도 해 주고 싶은 맛이라고.”

“오늘 네가 오기 전까지 잠을 한숨도 못 잤어.”

“왜?”

“왜겠어. 그런 일 당하는 게 흔한 건 아니잖아. 외상은 없는 거 같고…… 마음은 잘 추슬렀니?”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갑자기 정곡을 찔려서 그런지 딸꾹질이 나왔다. 내가 당황하며 계속 물만 들이켜자 아로네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했다. 이렇게 쉽게 들통날 거면 도대체 감정 컨트롤은 왜 한 거지.

아로네가 아이를 어르듯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 없을까?”

그 순수한 걱정이 눈물 나오도록 고마워서 나는 잠깐 침묵했다. 확실히 아로네는 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로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자연스럽게 온기를 내주었다.

“이걸로 충분해.”

***

나는 심각한 일보다 재미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내 강력한 주장하에 우리는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수다를 떨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사위가 깜깜해지고 나서였다.

나는 시계를 흘깃거렸다. 불행하게도 내일 출근하려면 적어도 1시간 내로 떠나야 했다.

“아.”

출근할 생각을 하니 오전의 재수 없던 제이든 얼굴이 떠올랐다. 난데없는 탄식에 아로네가 눈썹을 씰룩였다.

나는 이 얘기를 아로네한테 해도 되는지 고민했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나중에 뒤통수 맞는 것만큼 기분 더러운 일이 없기에 그냥 얘기하기로 했다.

“놀라지 말고 들어.”

“뭔데?”

“제이든이 파혼 절차를 밟을 거라고 했어.”

나는 아로네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폈다. 제이든의 그림을 모조리 불태우고 끝내 아로네는 웃었지만, 사실 난 그 외사랑이 지독하게 길어서 재발할 수도 있겠다고 내심 생각했었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아로네는 무덤덤했다.

“바라던 바였는데 잘됐네.”

“와, 정말로?”

“정말로.”

미련도 분노도 담겨 있지 않은 눈동자는 그 말이 진실이라 고하고 있었다. 나는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그럼 동의해 주는 조건으로 위약금 같은 거라도 잔뜩 뜯어내!”

“나쁘지 않네.”

“근데 제이든이 어떻게 나올지 뻔하다. 그치?”

걔는 자기 잘못도 모르고 어이없어할 게 분명하다. 같은 미래를 상상한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다시 생각해도 당분간 제이든 옆에 남아 있자는 선택은 정말 탁월한 것 같다.

***

아로네가 붙여 준 기사 덕분에 나는 패닉에 빠지지 않고 마차를 탈 수 있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과 같이 있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 되었다.

아로네한테 앞으로 더 잘해 줘야지. 밝게 빛나는 달을 올려다보며 나는 다짐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내 앞으로 두 통의 편지가 와 있었다. 하나는 레이로부터 온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뜻밖의 인물이 보낸 것이었다.

기억 저편에 박혀 그 형체도 흐릿했던 이름이 시나브로 선명해졌다. 얘가 나한테 편지를 다 썼네. 나는 감탄을 내뱉으며 바로 봉투를 뜯었다.

「혜라 님께.

안녕하세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제 이름은 로빈이에요. 이노피아에 오셨을 때 혜라 님을 밀쳐 넘어뜨렸던 남자애요.

너무 늦게 연락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감사한 마음을 하루빨리 전하고 싶었는데, 부끄럽게도 사실 제가 글을 잘 쓰지 못하거든요.

혜라 님께 해 드릴 이야기가 정말 많아요. 우선 보잘것없는 저희 가족을 위해 후원금 보내 주신 거, 정말 감사해요.

이노피아와 절대 어울리지 않는 남자 두 명이 저희 집을 찾아왔던 날을 아직도 기억해요. 그들은 제가 로빈이 맞냐고 물었죠. 돈으로 가득 찬 가방을 받았을 때 저는 제가 꿈꾸고 있는 줄 알았어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죽어서 천국에 와 있는 줄 알았다니까요. 우습죠?

처음엔 그 어마어마한 돈을 정말 받아도 되는 건지 고민했었어요. 철없는 동생들은 이제 굶지 않아도 되는 거냐면서 좋아했지만…… 저희 어머니는 돌려주자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어요.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까요.

어머니는 최악의 가정을 이야기하며 동생들을 다그쳤어요. 사실 저도 어머니랑 같은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어떤 대가를 치르든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상을 벗어나고 싶었어요. 그래서 처음으로 어머니한테 대들었어요. 돈 때문에 불효를 저지르는 제가 너무 미웠지만 저 혼자 생계를 떠맡는 건 정말 힘들었거든요.

제 막내 동생 소피가 발견한 편지가 아니었다면 정말 크게 싸웠을 거예요.

긴 말을 하신 건 아니었지만 저희 가족을 울리기에는 충분한 말이었어요. 그때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저는 아직도 혜라 님의 글을 기억해요.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요.」

나는 잠시 편지에서 눈을 떼고 먼 과거를 회상했다. 도대체 과거의 나는 뭐라고 썼길래 일가족을 울려 버린 거야?

진심을 담아 꾹꾹 내려썼던 철자는 희미해지고, 공감이 적선으로 비춰질까 봐 걱정했던 감정만이 기억났다. 하지만 고맙게도 로빈이 희미한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혜라 님은 그러셨죠.

‘난 어린애라면 조금 더 꿈과 환상 속에 젖어 있어도 좋다고 생각해. 하지만 넌 너무 사회에 물들어 버렸더라. 그건 어른과 사회의 탓이겠지? 태양의 빛은 어디든 비춘다던데, 가난의 그늘이 너무 어두운가 봐.

잠깐 봤는데도 알겠더라. 죽도록 힘든 상황 속에서도 살려고 아등바등 애쓰고 있는 거. 너보다 열 살은 더 먹은 나도 힘들었는데 도대체 너는 어떻게 버틴 거니?

내가 아주 힘든 시기를 보냈을 적, 항상 날 도와줄 믿을 만한 어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 그러나 언제나 소망으로만 그쳤고 현실은 시궁창 같았지. 근데 네 얼굴에서 조금 더 어렸던 내가 겹쳐 보이더라.

그래서 이 돈을 보내. 대단한 금액은 아니지만 이노피아를 벗어나는 데 보탬은 되겠지. 고맙고 부채감이 든다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걸로 갚아. 그거면 충분해.’

그 편지를 읽고 저희 가족 다 같이 얼싸안고 울었어요. 회의적이었던 어머니조차 결국 고개를 끄덕이셨죠. 덕분에 저희는 지긋지긋한 이노피아를 떠나 수도 변두리에 제대로 된 집을 얻을 수 있었어요.

더 이상 추위에 몸을 떨지 않고, 끼니를 굶지 않고, 가끔씩 군것질도 하고, 어머니의 병세도 나아졌지요.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는 저와 제 동생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친구들은 공부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다고 했지만, 저는 그게 배부른 소리라고 생각해요. 저는 내일 뭘 배울지 기대돼서 잠도 못 잘 정도거든요.

저희 가족의 삶이 얼마나 행복해졌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알려드리고 싶지만 너무 편지를 길게 쓰면 바쁘신 분의 시간을 빼앗는 것 같아서 이제 그만 쓸게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열심히 공부해서 베푸는 사람이 될게요.

그리고…… 혜라 님은 제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셨지만, 그래도 언젠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긴다면 꼭 말해 주세요. 혹시 몰라서 뒷장에 저희 집 약도도 그려 놨어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로빈 올림.」

“로빈 이 자식…….”

고작 한 번 본 애한테 이런 감정을 느껴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로빈이 기특해서 눈물이 다 나올 것 같았다.

저 나이대 애들이 이런 수준 높은 편지를 쓸 수도 있는 건가? 주변에 비교 대상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로빈은 훗날 큰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편지를 속독하고 약도도 꼼꼼히 관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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