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맹랑한 부하 직원의 비난에 심기가 비틀린 제이든이 나를 해고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나는 힘없이 침대에 누워 드넓은 천장을 새삼 애틋하게 훑었다.
과분한 이 숙소도 이제 안녕인 건가. 나는 부드러운 침구를 쓰다듬으며 필연적으로 다가올 이별을 준비했다.
애초에 데네브 말에 화가 나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의외로 나는 일하며 자아실현을 이루고 있었다.
까다로운 상사인 제이든이 군말 없이 내 보고서를 받아 들 때면 스스로 인지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만족감과 자부심을 느꼈다. 물론 정신없는 업무는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역설적이게도 내게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한 나는 영원히 별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보고서 한 개를 완성하면 비로소 평범한 사람들의 궤도에 들어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도 내 자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삶도 끝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굴러갈지 고민했다. 이번 달 월급을 받을 수 있는지부터 시작해서 제이든이 과연 해고에서 멈출지까지. 걱정은 끝도 없었다.
설마 아예 황궁 밖으로 추방시키진 않겠지? 나는 제이든이 내 구직 활동을 번번이 막는 상상을 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떠나는 건 국가적 손실과도 같으니 제이든 걔가 구제할 수 없는 철부지가 아니고서야 그러진 않을 거다. ……아마도.
“결국 이렇게 될 거였으면 진작부터 하고 싶은 말 참지 말걸.”
내가 그동안 얼마나 성격을 죽이려고 노력했는지 제이든이 알아야 하는데. 입술 달싹거리는 걸 보고 할리가 필사적으로 나를 말린 적이 얼마나 많았더라?
제이든 몰래 손가락으로 엑스 자를 긋던 할리의 모습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앞으로 할리와 헤어질 생각을 하자 문득 슬퍼졌다. 걔 덕분에 거지 같았던 출근도 조금 즐거웠는데.
그러나 또 다른 문제에 비하면 할리와 헤어지는 것 정도는 어린애들 장난이었다. 할리는 연락만 한다면 언제든 만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남자는? 나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신시……. 아니, 레이 걔는 또 뭐냐고.”
레이는 제이든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제이든이 좋아하는 사람은 여자인 ‘신시아’이므로, 신시아라는 인물이 허상인 이상 제이든의 사랑은 무조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사정이 있길래 외관까지 바꿔 가며 정체를 속인 거지?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어제의 기억을 반추했다.
‘내가 사실은 남자라는 거.’
‘정식으로 소개할게. 내 진짜 이름은 레이야.’
헛소리라 치부했다. 비웃을 게 뻔한 나를 훤히 내다보고 레이는 친히 변장까지 풀어 가며 궤변 같은 주장에 근거를 더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훨씬 전부터 숨겨 왔을 비밀을 고백하면서까지 날 붙잡은 이유가 뭘까?
그가 내게 특별한 감정을 품었다는 걸 안다. 우정인지, 동경인지, 집착인지, 사랑인지 모를 종류의 것. 난 독심술사가 아니기에 그 감정에 정확한 이름은 못 붙이겠다. 하나 그 크기가 결코 작지 않다는 걸 이제는 안다.
비밀을 고백하면 내가 정말로 마음을 열 거라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본인 또한 어떻게 보면 제이든을 엿 먹이는 쪽에 가까우니 손절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어필하려던 거였을까?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의미가 있나? 그가 사실 신시아가 아니라 레이고,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고 해서 이미 일어난 일이 바뀌진 않는다.
사람들은 여전히 국혼의 가능성에 대해 우려할 것이고, 제이든은 이 기회를 틈타 이미 결정된 결혼을 뒤엎고자 할 것이며, 아로네는 모든 일로부터 유리된 채 상처에 썩을 것이다.
레이가 계속 신시아 행세를 하는 이상 우리의 사이에 진전은 없다. 그 결정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하지만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했는지 물어봐야 할 필요는 있다. 답을 듣고 나서 후회할 것 같긴 하지만. 그렇다고 왜 그랬을까 평생 혼자 자문하는 것도 멍청한 짓이었다.
나는 레이에게 보낼 편지를 휘갈기고 급히 외출 준비를 했다. 목적지는 공작가였다.
***
급서를 부치고 마차가 오기 전까지 여유 시간이 있어서 할리를 찾아갔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 침대에 누워 간식을 집어 먹고 있었다.
“어, 왔어?”
“어휴 이 화상아. 방 좀 치우고 살아라.”
옷가지와 잡다한 물건으로 널브러진 바닥은 발 디딜 틈 없었다. 나는 실낱같은 빈 공간을 밟아 가까스로 의자에 앉았다. 힘을 준 탓에 발바닥이 아렸다. 할리가 능숙하게 잔소리를 흘려들으며 다과상을 내왔다.
“발은 좀 어때? 도대체 신발은 왜 벗고 있던 거야?”
“약 발라 줘서 고맙다. 그럴 일이 좀 있었어.”
“무슨 일? 그 남자는 누구고? 얘기 좀 해 봐!”
할리가 본격적인 수다를 위해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오래 있을 생각이 전혀 없는 나는 손을 저었다. 다음 일정이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하마터면 토크 지옥에 빠질 뻔했다.
“나 오래 못 있어. 아로네 보러 가거든.”
“아…… 그거 때문에?”
“어.”
할리가 알만 하다는 얼굴을 했다. 힘내라는 듯이 그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초콜릿 피넛 쿠키를 내밀었다. 나는 피식 웃고 오독오독 쿠키를 씹었다.
할리가 잔뜩 기대에 차서 눈을 반짝였다. 끝까지 모른 척하려고 했건만, 저리 궁금해하니 완전 입을 싹 닫고 있을 순 없겠다 싶었다. 나는 최소한의 진실만을 말하기로 했다.
“알다시피 내가 아로네의 유명한 친구이잖니? 난 황태자님의 보좌관이기도 하지만 아로네의 친구이기도 해서 어제 그분이 저지른 일에 상당히 화가 나 있는 상태였어. 그리고 그런 상태로 숙소로 가는데 황태자님이랑 신시아를 마주치고 만 거야.”
“맙소사. 너, 너 설마…….”
할리가 믿고 싶지 않다는 듯이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곧 내 입에서 나올 이야기를 듣기 싫으면서도 듣고 싶어 하는 딜레마에 빠져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나는 할리의 숨이 곧 넘어갈 것 같아서 황급히 말을 이었다.
“맞아. 황태자님한테 조금 대들었어. 그리고 너무 빡쳐서 뛰어가는데 환장할 구두가 자꾸 뒤꿈치 상처를 건드리는 거야. 그래서 그냥 차라리 맨발로 걷기로 했지. 그러다 네가 말한 겁나게 잘생긴 미남을 우연히 만났어. 뭐…… 만나자마자 내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갑자기 쓰러져 버렸지만. 이게 끝이야. 허무하지?”
나는 혹여나 할리가 레이에 대해서 더 자세히 캐물을까 봐 긴장했다. 하지만 할리는 잘생긴 미남에 대해선 안중에도 없었다.
그가 패닉에 빠져 “황태자님한테 조금 대들었다고? 조금? 과연 정말 조금이었을까?”이란 말을 계속 되뇌었다. 예상했던 그대로의 반응이라서 나는 웃음을 꾹 참았다.
할리가 한참 뒤에야 내 눈을 바라보고 패가망신한 사람처럼 멍하니 말했다.
“……이건 정말 좋지 않은데.”
어젯밤에는 내가 기절했더니 지금은 할리가 쓰러질 것 같았다. 나한테 경쟁의식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질세라 얼굴을 새하얗게 물들이는 모습이 시트콤 같았다.
내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피식거리자 할리가 급발진하며 쾅 테이블을 내리쳤다.
“웃어?”
“어.”
“……웃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뭐라고?”
“아니! 어떻게 잘릴 수도 있는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어? 제이든 님 성격에 100%! 아이고 앞으로 난 어쩌라고……!”
이상하다. 언젠가 비슷한 광경을 본 것 같은데. 데자뷔인가?
할리가 꺼이꺼이 통곡하며 내 손을 간절하게 붙들고 앞으로 혼자서 어떻게 제이든을 감당하냐고 징징거렸다.
나는 화난 건 이해하지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제이든한테 대들었냐는 말부터 시작해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따지는 할리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할리가 진정할 때까지는 장장 30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마침내 그가 현실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눈치채고 티슈를 건넸다.
그가 야무지게 코를 풀고 말했다. 발개진 눈가에서 광기 어린 투지가 불타올랐다.
“난 절대 너 못 보내. 무슨 수를 써서든 네 책상이 비워지는 걸 막겠어.”
“그래 열심히 한번 해 봐라.”
저 둥근 성격에 해 봤자 뭔 일을 하겠어. 할리가 무슨 수를 쓰든 제이든한텐 쥐뿔도 안 먹히리라 속으로 단언했다. 할리는 제 딴에 전략을 짠답시고 양피지와 사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저 조그만 머리로 어떤 전략을 짜는지 궁금했지만 때마침 마차가 도착할 시간이 됐기에 몸을 일으켰다. 나는 수고하라는 의미로 성의 없이 할리의 머리를 헝클이고 방을 나섰다.
***
“아로네는 좀 어때?”
“말도 마세요……. 겁날 정도로 차분하세요. 마치 폭풍 전 고요함처럼요.”
루나가 울상을 지었다. 내 표정도 그의 얼굴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으니 성인식 때보다 상심이 큰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나는 고작 제이든 같은 남자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친구가 세상이 떠나가라 슬퍼하는 모습은 죽어도 못 본다. 나는 아로네가 또 골골거리고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신 차리게 해 주겠다고 다짐했다.
“근데 진짜로 아로네 잘 봐주고 있었나 보네?”
“당연하죠! 혜라 님 오신 뒤로 아로네 님 완전 사람……. 헉.”
루나가 입을 꾹 다물고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폈다. 마침 복도에 우리밖에 없어서 망정이지, 만약 데네브라도 지나가고 있었어 봐. 그 얄미워 죽겠는 주둥아리로 루나를 탈탈 털었을 것이다.
특유의 젠체하는 말투로 우리를 갈구는 모습을 상상하자니 갑자기 혈압이 오르고 눈앞에 있지도 않은 데네브의 입술을 쥐어뜯고 싶었다. 나는 길게 호흡하고 인자하게 웃었다.
“됐어, 우리밖에 없는데 뭘. 나도 아로네 성격 전에는 정말…… 정말 별로였다는 거 알아.”